송기현의 살림운동

좀과 동록과 도둑의 비유(마 6:19~21) 본문

비유의 복음

좀과 동록과 도둑의 비유(마 6:19~21)

유앙겔리온 2011. 7. 29. 17:10

  오늘 이 시대를 이끌어가는 가장 큰 영향력은 누가 뭐래도 '돈'입니다. 돌잔치를 참석해보면 그 부모들이 아이가 돈을 잡는 것을 가장 좋아 합니다.

평생 안경점으로 살아온 아버지가 아들에게 장사하는 법을 가르쳐 줍니다. "아들아, 손님의 눈을 검안하고 새 안경을 다 만든 후, 손님 얼굴에 안경을 끼워드리고는 '15만원입니다'라고 말해야 한다. 그 말을 듣고도 손님이 아무런 말을 하지 않는다면, 재빨리 한마디를 더 붙이려무나.  '이 가격은 렌즈 값만 입니다.' 그런데도 손님이 그 말을 듣고도 아무 말을 하지 않으면 이젠 한 마디를 더 해도 좋다. '한 쪽 렌즈 값만 15만원입니다."

 

  누구도 물질의 유혹 앞에 자신있게 맞설 사람은 없습니다. 장사를 처음 하시는 분들이 제일 처음에 겪게 되는 어려움이 '정직'과 '이윤추구'사이에서의 갈등이라고 합니다. 크리스천도 '신앙'과 '이익'사이에서 고민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주님도 그 갈등을 아시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말씀은 물질에 대한 말씀입니다. 물질은 사람이 살아가는 동안에 꼭 필요한 생활의 수단이며 요소입니다. 인간이면  입어야 하고, 먹어야 하고, 잠자고 쉴 곳이 있어야 합니다. 이것을 의식주라고 합니다.  이것을 떠나서는 생활이 되지를 않습니다. 그런데도 물질을 떠나라고 하고 생각하지 말라고 하면 어떻게 살란 말입니까? 기독교는 정신세계만 다루는 그런 종교가 아닙니다. 기독교는 정신세계와 물질세계를 함께 종합적으로 다루는 종교인 것입니다.

 

  오늘 주시는 예수님의 비유의 말씀은 물질생활을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을 가르쳐 주시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먼저 본문 말씀에서 보화가 무엇인가를 정의해 보는 것이 좋겠습니다. 현재 여러분들이 가장 귀중히 여기는 것이 보화일 것입니다. 보화는 사람에 따라서 그리고 시대에 따라서 살고 있는 지역에 따라서 달라지는 것입니다.

 

  1. 이 보화는 영원하지를 않다는 사실을 말씀하고 있는 비유가 좀과 동록과 도둑의 비유입니다.
 
  예수님 당시는 옷이 보화였던 것 같습니다. 사실 우리 어렷을 적만해도 고급 옷은 정말 보화와도 같은 것이었습니다.
구약성경에 보면 옷은 금과 은과 함께 보물처럼 여겨졌습니다. 그래서 엘리사의 종 게하시는 두달란트와 옷두벌 옷을 나아만 장군으로부터 받아와서 엘리사에게 진노를 샀습니다.
  예수님 당시는 더욱 그러했을 것입니다. 예수님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 군병들이 예수님의 옷을 제비뽑아 가져간 것을 상기해보시기를 바랍니다.
 
  좀은 옷을 갉아먹는 벌레입니다. 옛날 옷들은 대부분 자연섬유질 옷들이어서 오래 보관할 수가 없었습니다. 아무리 좋은 옷도 좀이 먹게 되어 못입게 되고 마는 것입니다.
  요즈음은 지천에 깔린 것이 옷입니다. 그리고 옷도 잘 상하는 법이 없습니다. 그런데 요즈음도 옷, 옷하며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동록 곧 쇠가 녹이 스는 것입니다. 아무리 좋은 차도 5년에서 10년 타면 폐차를 시켜야 하지 않습니까? 선박도 마찬가지 일 것입니다. 영원하고 무한한 것은 이 세상에 아무것도 없습니다. 무쇠라고 할지라도 영원하지를 않습니다. 녹이 슬어서 가치는 떨어지고 언젠가는 버리게 되고야 마는 것입니다.

  도둑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어디에나 있는 것입니다. 특히 우리 나라는 도둑이 참 많습니다. 도둑질은 남의 것을 탐을 내서 내것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도둑은 남의 것을 주인의 의사하고 반하게 빼앗아가는 것입니다.
  진짜 도둑을 맞아서 빼앗기는 경우도 있지만 자기는 원치 않지만 어쩔 수 없이 소유권이 넘어가는 것도 어찌보면 빼앗기는 것과도 같은 것입니다. 도적은 아니지만 도적처럼 빼앗아가는 사람들이 이 세상에는 참 많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보물"은 "재물 보다 훨씬 더 큰 것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물론 여기에 언급된 보물은 재물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에 언급된 보물은 재물 뿐 아니라 "우리가 귀중히 여기는 모든 것"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나오는 "보물"은 우리가 귀중하게 생각하는 시간, 재능, 재물, 보석, 집, 식량, 그리고 의복 등을 모두 포함하는 개념입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남편이나 아내, 그리고 자녀가 보물이 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에게는 젊음, 남이 갖지 못한 아름다움이나 명예나 재물이 보물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보물이라고 생각하는 이런 것들은 필연적으로 언제가는 좀 먹은 옷처럼, 녹슨 쇠처럼, 도둑맞은 물질 처럼 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이런 것들을 자랑하다가 하나님 앞에서 신앙을 소홀리 여기고 신앙적인 것을 희생시켜 버리기 일 수 입니다.
 
  2. 이 물질을 땅에 쌓아두지 말라 하늘에 쌓아두라는 의미는 무엇입니까?
  이 말씀을 곡해를 해서  소유를 금하는 것으로 이해해서는 안됩니다.
성경 어디에도 소유를 금한 말씀은 없고, 예수님도 사유재산을 금하는 가르침을 주신 일이 없습니다. 주기도를 가르치실 때에도 우리에게 '우리의 일용할 양식'(Our daily bread)을 주옵시고...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저금하지 말라는 말로 알아들어서는 않됩니다.
잠언에 보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일할 수 없는 겨울을 위해 여름에 땀흘려 일하고 저축하는 개미에게서 배워야 한다고 가르치십니다. 잠6:6을 보실까요. "게으른 자여 개미에게 가서 그가 하는 것을 보고 지혜를 얻으라."
잠6:8입니다. "먹을 것을 여름 동안에 예비하여 추수때에 양식을 모으느니라."

 

  저금은 해야 합니다. 그래야 국가 경제도 살아나고 기업은 그 돈을 빌려다가 경제활동을 해서 돈을 벌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들도 저축을 통하여 목적있는 일을 하게 되고 또 위급한 일을 당했을 때 저축된 돈이 있음으로 인해서 문제를 해결할 수가 있습니다.
  과소비를 해서는 안됩니다. 자원은 한정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면서 미래의 안전과 행복을 위해 땅에 쌓아두는 것이 결코 안전을 위한 전부가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믿을 것은 보물밖에 없다고 생각하고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이 땅에 보물을 쌓아두지만 그것이 오히려 안전을 해치는 경우도 없지 않아 있습니다.

 

  땅에 쌓아두는 것은 안전한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영원하지 않습니다. 좀과 동록은 보이지 않는 가운데 우리가 아끼는 보물을 못 쓰게 만들고 도둑은 이것들을 훔쳐갑니다. 예를 들면 불이 나서 재산을 잃기도 하고, 사업에 실패하여 하루아침에 노숙자 신세가 되기도 합니다. 질병이나 교통사고 등으로 인해 그동안 애써 모은 모든 것이 물거품이 되기도 합니다. 결국은 죽음과 함께 일생 모은 보물은 헛것이 되고 맙니다. 이러한 삶은 얼마나 헛되며 얼마나 불쌍한 삶입니까? 그러므로 주님의 말씀대로 이제 땅에 쌓아두는 것을 중단해야 합니다.

 

  "물질을 땅에 쌓아두지 말고 하늘에 쌓아두라"는 이 말씀은 단순한 물질의 보관 방법이나 장소만을 말씀하고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물질을 어디에 어떻게 쓰느냐의 문제를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땅에 쌓는 다는 말은 자기만을 위하여 물질을 쓰는 것을 말합니다. 자기 쾌락, 자기 만족만을 위하여 쓰는 것을 의미합니다.

  물질을 하나님 뜻대로 쓰면 그것은 하늘에 쌓아두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를 위하여 보화를 땅에 쌓으려고 합니다. 그런데 오늘 예수님은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두라고 하십니다. 이것이 "너희를 위하여" 곧 우리를 위하는 길이라고 하십니다. 왜냐하면 그곳은 가장 안전하기 때문입니다. 하늘나라는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가장 안전한 곳입니다.(벧전 1:4) 그곳에는 좀이나 동록은 물론 도둑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도둑은 그곳에 들어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둘 때 가장 안전하고 영원합니다.

 

  3. 네 물질이 있는 곳에 네 마음도 있느니라
  물질이 있는 곳에 네 마음도 있다는 주님의 말씀은 진리입니다. 우리가 보배처럼 여기는 것이 있는 곳에 우리 마음이 있는 것입니다. 보물과 마음은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습니다. 사람이 물질을 어떻게 쓰는가를 보면 그 사람의 마음이 어디에 있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어떤 성도들은 정말로 자기 쓸 것을 아껴서 주님께 희생적으로 드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는 그 마음이 하나님께 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보물과 마음은 떼려야 뗄 수 없는 실과 바늘 같은 불가분의 관계입니다.

 

  기독교는 물질을 죄악시하지 않습니다. 물질을 죄악시 가르치는 것은 기독교의 진리를 잘 모르는 사람들입니다.
  기독교는 물질과 마음을 일체로 봅니다. 마음이 있는 곳에 물질도 있고 물질이 있는 곳에 마음도 있는 것입니다. 사랑은 마음으로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은 물질과 함께 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면 선물도 사주게 되고 사랑하면 음식도 사먹이게 되고 사랑하면 물질을 나누어주고 싶은 것입니다. 입으로만 마음으로만 사랑한다는 말은 그것은 거짓말입니다.
  제가 해보아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는 아까운게 없어요 귀찮은 것도 없습니다. 그러나 사랑하지 않은 사람에게는 작은 것도 아깝도 그리고 접촉하고 부딛치는 것도 귀찮아요. 이것이 정상입니다. 마음과 물질은 따로 따로 일 수가 없는 것입니다.

  좀이 먹기 전에,  녹이 슬기 전에, 도둑을 맞기 전에 이제는 하늘에 쌓아두는 그런 그리스도인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