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기현의 살림운동

집나간 탕자(눅 15:11~32 본문

비유의 복음

집나간 탕자(눅 15:11~32

유앙겔리온 2011. 5. 24. 21:44

  오늘 본문에 나오는 비유는 너무 유명한 비유이기 때문에 믿는 자 뿐 아니라 믿지 않는 이들조차 잘 알고 있는 비유입니다. 그래서 설교학자들은 이 본문으로는 설교하지 말라고 까지 할 정도입니다. 너무 많이 듣고 너무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은혜를 끼치기가 쉽지 않다는 것입니다. 식상해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오히려 역발상으로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기 때문에 오히려 더 모를 수도 있다는 생각으로 다른 비유와는 달리 오늘 본문에 나오는 비유는 세 시간에 걸쳐서 살필려고 한 것입니다.

 

  본문에 나오는 세 사람, 즉 아버지와 첫째아들 그리고 둘째 아들은 모두 다 탕자와 다를바가 없다는 말씀을 드린 바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신학자는 오늘 이 비유에는 탕자 밖에 없다고 했습니다.
오늘 저녁에는 지난 시간에 이어 두번째로 "집 나간 탕자"를 함께 생각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어떤 이는 집을 나간 이 탕자를 집을 지킨 형과 비교하여 제1의 탕자라고 하기도 했습니다.

 

  집나간 탕자는

  1. 아버지 죽기도 전에 유산달라고 요구했던 아들입니다.
  "그 둘째가 아버지에게 말하되 아버지여 재산 중에서 내게 돌아올 분깃을 내게 주소서 하는지라"(12절)고 했습니다.
  유산는 자식의 요구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결단과 용단으로 주어지는 것이 보통입니다. 그래서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거나 떠나기 전일지라도 혹이 자녀의 장성한 분량을 보고 이제 내 재산을 물려주어도 좋겠다고 생각할 때 자식들에게 분배하는 것이 보통입니다.
  그런데 오늘 집나간 탕자는 아버지의 이러한 결심과는 상관없이 아버지의 재산을 빼앗듯 강요해서 받아냈다는 사실입니다.
아버지의 재산은 곧 내 재산이다고 생각해서 내 몫을 내놓으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집나간 탕자의 첫번째 탕자의 기질입니다. 

 

  2. 유산을 받자 마자 챙겨서 먼 나라로 가서 허랑방탕하여 재산을 다 낭비한 탕자
  "그 후 며칠이 안 되어 둘째 아들이 재물을 다 모아 가지고 먼 나라에 가 거기서 허랑방탕하여 그 재산을 낭비하더니"(13절)했습니다.
  왜 탕자는 재산을 가지고 멀리 갔을까요?
아버지의 간섭, 형제와의 비교, 동네 사람들의 눈총과 간섭 등등 이런 것들이 싫었겠지요.
  사랑을 사랑을 받지 못하는 상한 마음, 굳은 마음, 비뚤어진 이 마음이 문제입니다. 이것 때문에 아무도 상관하지 않는 그들의 간섭이 미치지 않는 곳, 그래서 아주 먼곳으로 떠나버린 것입니다.

  아버지에게서 멀리 떠나고 싶은 마음
이것은 자유가 아니라 방종이며, 신앙이 아니라 불신앙입니다. 

  가끔, 아이가 너무 애뻐서 사랑스러운 재스처를 할 때 아이가 경계심을 갖고 "앙~"하고 울어버리면 얼마나 민망한지 모릅니다.

  이런 삐뚫어진 마음으로 차지한 물질을 옳고 바르게 쓸리가 만무합니다.
  집나간 탕자의 물질관은 벌줄은 모르고 쓸줄만 아는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물질을 어떻게 쓰면 잘 쓰는 지를 모르는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자기가 땀흘려 번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 물질을 함부로 썼습니다. 아무리 큰 돈도 계획도 없이 쓰면 금새 바닥이 들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복권에 당첨되는 사람치고 거지 않된 사람이 없다고 하지 않습니까? 어차피 공돈인데 한 번 멋떨어지게 써보자 하다가 결국은 거지가 되는 것입니다.

 

  3. 다 잃고서야 제정신이 돌아온 탕자
   "이에 스스로 돌이켜 이르되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꾼이 얼마나 많은가?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 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르기를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 하리라 하고"(17~19절)했습니다.
  조금이라도 남아 있을 때 제정신을 차리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많은 사람들이 다 잃고 난 다음에 후회를 합니다. 덜 잃었을 때 돌이켰다면 상황은 좀더 나았을 것을 하고 말입니다.
범죄자들이 초범일 때 죄를 끊는다면
노름하는 사람들이 처음 작은 재산을 잃었을 때 오락비좀 지출한 것으로 여기고 손 훌훌 털고 그것으로 끝을 낸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런데 대부분이 갈데까지 가고 맙니다. 그래서 돌이키기가 힘든 상태까지 가고야 마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한두번 실수한 것으로 끝을 내시기를 바랍니다.

  그래도 아쉽지만 집 나간 탕자는 다 잃고라도 회개하고 돌아왔습니다는데 의미가 있습니다. 다 잃고도 회개하지 않는 사람들도 있지 않습니까?

  집 나간 탕자가 아버지 집으로 돌아 가기로 용기를 낸 이유가 어디서 생긴 것이겠습니까?
그것은 아버지가 나를 다시 쫓아 내지는 않으리라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아버지를 믿는 신뢰가 그에게 있었고 또 탕자는 이것 때문에 용기를 낼 수 있었던 것입니다. 탕자의 어처구니 없는 요구에도 거절하지 않고 자신을 믿고 유산을 아낌없이 주셨고 먼 곳으로 가겠다고 했을 때도 허락해주신 아버지셨습니다. 그러니 실패하고 돌아갈지라도 받아줄 것을 믿을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가정에 이런 것이 있어야 합니다. 최종적으로 돌아갈 수 있는 곳, 내가 어떤 모습일지라도 용납될 수 있는 곳, 그곳이 바로 가정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4. 아버지에게 맞추는 사람이 된 것입니다.
   "아들이 이르되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하나 아버지는 종들에게 이르되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으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하니 그들이 즐거워하더라"(21~24절)했습니다.
  둘째 아들은 자신은 자격이 없지만 아버지가 원하시니 그대로 받아들입니다.
이것이 중요합니다. 자격이 있고 없고의 문제가 아니라 아버지의 마음을 헤아리고 아버지의 마음을 받아들이는 것이 중요합니다.
  자신이 자신을 평가할 때도 자신은 아들보다는 종의 한 사람 정도 밖에 되지 않습니다. 아니 종도 될 자격이 없습니다. 그러나 아버지가 아들이라고 인정하시니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자신은 용서받을 수 없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아버지가 이미 용서하시는 자신도 자신을 용서합니다.

  집 나갔다가 돌아온 탕자는 자신이 죄인이라는 것을 아는 죄인입니다. 그러기에 이제 더 이상 자기의 의지가 중요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아버지의 의지가 중요하고 이제라도 남은 세월은 아버지를 기쁘게 하고 살겠다는 생각 밖에 없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