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기현의 살림운동
집안의 탕자(눅 15:11~32) 본문
돌아가시지도 않은 아버지의 유산을 미리 챙겨가지고 집을 떠난 작은 아들이 '집나간 탕자'라면, 본문 말씀에 나오는 큰아들을 '집 안에 있는 탕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비록 큰 아들은 동생처럼 아버지의 유산을 미리 챙기지도 않았습니다. 아버지의 재산을 축내지도 않았습니다. 아버지의 마음을 드러내놓고 노골적으로는 아프게 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에게는 아버지의 사랑에 대한 고마움이나 감격이 없습니다. 아버지가 돌아오기를 간절히 소망하는 동생에 대한 애정도 없습니다. 단지 마지못해 집 안에 남아 있을 뿐입니다. 사실 그는 탐욕스런 아들입니다. 위선자입니다. 집을 나간 아들보다 더 무서운 탕자입니다.
예수님께 단순히 집 나간 탕자의 이야기로 비유를 끝내지 않고 집안에 머물러 있는 탕자의 이야기를 하신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예수께서 이 비유를 말씀하신 동기를 알아야 그 해답을 찾을 수 있습니다. 당시 자기 의로 충만했던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이 죄인들과 어울리는 것을 못 마땅해 하고 공개적으로 비난했습니다. 예수님은 이 완악한 청중들, 특히 당시의 종교지도자들에게 진짜 죄인이 누구인가를 가르쳐 주실 필요를 느끼셨기 때문에 작은 아들 이야기에서 끝내지 않으시고 큰 아들 이야기까지 해 주신 것입니다.
눅15:25~26절 "맏아들은 밭에 있다가 돌아와 집에 가까이 왔을 때에 풍악과 춤추는 소리를 듣고 한 종을 불러 이 무슨 일인가 물은대"
아버지에게 묻지 않고 한 종을 불러 물었습니다.
한 다리 걸처서 듣는 것 이것이 꼭 문제를 가져옵니다. 종은 이해당사자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아무렇게나 말할 수 있습니다. 무슨 문제든 이해당사자에게 직접들어야 합니다. 그래야 오해가 생기지 않습니다. 처음부터 큰 아들이 아버지에게 묻고 아버지에게 대답을 들었다고 하면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그런데 그는 아버지에게 직접 묻지 않습니다. 한 종을 불러 이야기한 것입니다.
좀 실겁고 인격이 후덕한 사람에게 들었다면 괜찮을 일도 심신이 허약하고 어두운 생각하고 부정적인 사람에게서 들었다면 상황은 달라지는 것입니다. 같은 말도 전하는 사람에 따라서 전혀 달리 전달 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눅15:28 "그가 노하여 들어가고자 하지 아니하거늘 아버지가 나와서 권한대"
아버지가 그토록 기다리던 동생이 돌아왔습니다. 잠을 못 주무시고, 먹을 것을 못 드시고, 입을 것을 못 입으시고 기다리던 아들입니다. 큰 아들은 곁에서 아버지의 그런 모습을 지켜보았을 것입니다. 그토록 기다리던 동생이 돌아왔으니 살진 송아지 한마리쯤 잡아 잔치를 여는 것이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잃어버린 동전 한 잎을 찾고도 기뻐해서 잔치를 배풀고, 잃어버린 양 한마리 찾고도 그러하건데 이건 그런 차원이 아니지 않습니까? 아들입니다. 그러니 아버지가 그렇게 하는게 당연한 것이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그는 노했습니다. 화를 냈습니다. 여기서 '노하다'라는 말은 헬라어로 '오르기조'인데, 이 말은 '콧구멍을 벌름거리다'라는 말에서 온 말로, 일시적으로 격양된 감정에서 나온 화가 아니라 깊이 쌓인 분노와 노여움을 암시하는 말입니다. 오랫동안 쌓인 감정이 폭발한 것입니다.
눅15:29 ~30절 "아버지께 대답하여 이르되 내가 여러 해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이 없거늘 내게는 염소 새끼라도 주어 나와 내 벗으로 즐기게 하신 일이 없더니 아버지의 살림을 창녀들과 함께 삼켜 버린 이 아들이 돌아오매 이를 위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나이다"
자기에게는 염소 새끼 한 마리도 주지 않았던 아버지가 아버지의 유산을 탕진한 아들을 위해서는 살진 송아지를 잡았다는 것입니다. 그는 동생이 돌아왔다는 것에 화가 난 것이 아니라 못난 동생이 돌아왔는데 아버지가 큰 잔치를 베푼 것에 화가 난 것입니다. 내가 못사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다른 사람이 잘 사는 것이 문제입니다.
상대적인 박탈감이 화나게 하고 분노를 품게 하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제일 치사하고 더러운 죄가 질투하는 죄입니다. 시기하는 죄입니다. 내가 고생하는 것은 억울한 것이 아니라 나보다 공부도 못했던 친구가 나보다 더 잘사니까 억울하고 분해서 못살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시기하지 말라, 질투하지 말라, 악인의 형통함을 부러워하지 말라" 말씀하셨습니다. 시기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질투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분노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분노는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합니다. 큰아들은 분노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동생에 대해서 시기하고 질투했습니다. 그 결과 아버지를 실망시켰습니다. 우리의 질투와 시기심은 결국 하나님을 실망시킵니다. 큰 아들은 분노의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무한한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저 사람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복과, 나와는 상관관계, 이해관계가 전혀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저 사람 때문에 내가 받을 복이 줄어드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정말로 구주와 주님으로 영접하면, 사촌이 땅을 사도 배가 안 아파지는 역사가 반드시 옵니다. 저와 여러분이 이렇게 되시길 축원합니다.
큰 아들의 정체성이 문제였습니다. 큰아들은 자신의 정체성을 아들에 두지 않고 종에 두었던 것입니다. 29절의 내용은 좀 더 쉽게 말하면 이런 내용입니다. "보십시오. 저는 여러 해를 두고 아버지를 섬기며 아버지의 명령을 어긴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도 제게는 친구들과 함께 즐기라고 염소새끼 한 마리도 주신 적이 없습니다." "저는 여러 해를 두고 아버지를 섬기며" 란 말을 직역하면, "저는 여러 해를 두고 당신을 위해 종으로 살았습니다."라는 말입니다. 그는 그 동안 아
버지를 사랑하는 아들로서가 아니라 주인을 섬기는 종의 자세로 살아왔다는 충격적인 고백을 합니다.
아버지는 지금까지 큰 아들을 사랑스런 아들로 대해 왔는데, 큰 아들은 아버지를 '주인'처럼 대했다는 것입니다. 누가 그렇게 살라고 했습니까? 아버지가 요구한 것입니까? 이런 종에 정체성을 가진 큰 아들의 심중에는 오직 자녀만이 가질 수 있는 특권, 즉 아버지에 대한 애정, 자부심, 기쁨이 있을리 만무합니다. 오직 있다면 그것은 바로 부담스런 의무감만 있을 뿐입니다. 의무감만 있다 보니 아버지가 하시는 말씀은 모두 명령으로만 다가올 뿐입니다. "당신의 명을 어김이 없었다...." 명령이란 단어가 큰 아들 입에서 나온 것입니다.
오늘 우리 중에 이 큰 아들의 정체성을 가지고 신앙생활을 하시는 분이 없습니까? 없으시길 바랍니다. 특별히 몸된 교회를 불철주야로 섬기는 헌신자들 속에
이런 정체성을 가진 분이 없으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종으로 부르시기 전에 자녀로 부르셨다는 것을 늘 잊지 마십시오. 아버지가 진정으로 바랬던 것은 큰 아들이 종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자녀로 사는 것이었습니다. 자녀로서 누리는 특권, 기쁨, 즐거움이 종으로서 감당해야 할 일보다 더 중요하다는 것을 큰 아들은 몰랐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만이 누릴 수 있는 구원의 기쁨과 은총에 대한 감사가, 우리가 행하는 사역보다 훨씬 더 중요하다는 사실을 언제나 잊지 말아야 합니다.
눅15:31~32절 "아버지가 이르되 얘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내 것이 다 네 것이로되 이 네 동생은 죽었다가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얻었기로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니라"
우리는 오늘 본문 말씀에서 첫째 아들의 물질관을 볼 수가 있습니다.
소유하고도 그것아 자기 것인줄도 모르고 즐길 줄도 모르고 감사할 줄도 모르는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아버지의 것이 다 네것인줄 알지 못하느냐?하신 아버지의 말씀을 참고해 볼 때 이 맏아들은 그것을 깨닫지 못한 것같습니다.
예수님의 이 비유는 큰 아들이 아버지의 권고대로 집으로 들어갔는지를 이야기하지 않은 채 미완으로 끝이 납니다. 과연 아버지의 사랑이 큰 아들을 설득할 수 있었는지, 아니면 끝까지 집 밖에 서 있었는지 궁금합니다.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오직 당시의 청중이었던 바리새인들과 또 큰아들의 처지에 여전히 있는 독자들이 결정해야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큰 아들이 집에 들어가지 않음으로써 잃는 것이 얼마나 많은 줄 아십니까? 하루 종일 밭에서 일하다 지친 그에게 제일 필요한 것은 따스한 물과 음식, 쉼입니다. 그런데 큰 아들은 이러한 것들을 하나도 누리지 못한 채 서 있는 것입니다. 아무도 그에게 밖에 서 있으라고 하지 않았는데 말입니다. 자기를 뺀 모든 사람이 즐거워하고 있다고 생각하면 속이 부글부글 끓어오릅니다. 쓰라린 마음, 강렬한 질투심, 분노에 사로잡혀서 상처받으며 밖에 외로이 서 있는 것입니다. 얼마나 불쌍한 인생입니까?
우리는 집 안에 큰 아들과 같지 않나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집 안에서 최선을 다하든지 아니면 그럭저럭 자기할일을 하고 사는 정도이든지 간에 나름 그리스도인으로 살고 있습니다.
이런 우리가 늘 경계하며 살아야 할 삶은 우리 자신이 큰 아들의 신앙이 되지 않도록 조심하는 것입니다. 집 밖의 탕자가 아닌, 집안의 탕자가 되어 아버지 마음을 더 아프게 하고, 집나간 동생 받아들이지 못하는 그런 못난 아들 되지 않도록 날마다 우리 자신을 점검해 나가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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