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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을 잃은 아버지의 비유(누가복음 15:11~32) 본문

비유의 복음

아들을 잃은 아버지의 비유(누가복음 15:11~32)

유앙겔리온 2011. 5. 11. 12:30

  오늘 본문 말씀은 흔히 탕자의 비유로 통하고 있습니다. 틀린 이야기는 아닙니다. 그러나 이 비유를 좀더 잘 이해하려면 오늘 제가 잡은 제목처럼 "아들을 잃은 아버지의 비유"라고 해야 옳을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탕자에게 포커스가 마춰진 것이 아니라 잃은 아들을 가진 아버지에게 그 포커스가 맞추어진 그런 비유가 아닌가 합니다.
  오늘 비유에 나오는 아버지는 족장시대에 그 사회에서 아버지가 지니는 성격과는 판이하게 다릅니다. 여기 나오는 아버지는 자신의 명예나 상속재산, 당시의 족장사회의 기준을 무시하고 마치 어머니처럼 행동하는 아버지입니다.

 

  이 비유에 나오는 두 아들은 모두 율법을 범한 아들들입니다. 작은 아들은 우리가 잘 아는 대로 그는 탕자였습니다. 그의 문란한 품행은 더 이상 망가질 것이 없는데까지 가버린 그런 망나니였습니다. 그리고 큰 아들은 아버지의 잔치를 거절하고 아버지에게 창피를 주었습니다. 그는 자기 도취에 빠져 공격적인 자만을 드러냈습니다. 그에게는 형제애라는 것이 없는 몰인정한 사람이었습니다. 형제가 집을 나갔는데 아무런 감정도 드러내지 않았고 찾으려는 시도나 걱정하는 기색은 전혀 없습니다. 이들은 모두 그 당시의 법규를 위반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이 비유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새로운 신관을 보여주는 아주 귀중한 비유입니다. 하나님은 그의 자녀들 모두에게, 즉 온 인류 가족에게 무한한 사랑을 보이시는 하나님을 표상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은 이 잃은 아들의 비유를 통하여 하나님은 심판하시고 정죄하시는 율법적인 하나님이 아니라 불쌍히 여기고 궁휼히 여기고 용서와 사랑이 넘치는 하나님이신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예수께서 새롭게 보여주시는 복음적인 신관입니다.
하나님을 어떻게 볼 것인가하는 문제의 답을 주는 것입니다.

 

  이 비유에 나오는 아버지의 주요 관심사는 정의가 아니라 자비였습니다. 아버지는 두 아들에게 조건 없는 사랑을 심어주어 그들도 서로에게 자비를 보이도록 만들고자 한것입니다.

  예수님은 뇌물이나 촌지나 거금이나 정성이나 금일봉을 들고 가야만 만나주시고 알아주시고 들어주시는 하나님이 아니라 돌아오지 않을 때도 여전히 사랑하시는 것은 변함이 없으시며 돌아오면 누구나, 돌아오면 언제나 받아주시고 용서해 주시는 하나님 아버지 되심을 말씀한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대로 한다면 "그가 집에까지 가려면 아직도 거리가 먼데 아버지가 그를 보고 측은하여 견딜 수 없어 달려가 껴안고 입을 맞추어 주시는 아버지"(눅 15:20)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이런 논리를 전개하다보면 부딪치는 문제가 있음도 알고 있습니다. 보상과 형벌, 의와 불의, 가치와 무가치에 대한 주장이 중요한 것으로 취급받고 있는 작금의 상황에서 우리는 포도원 주인의 처사에 항의했던 포도원 일꾼들과 집을 지키고 있었던  탕자의 형이 제기한 항의 속에서 인습적인 지혜의 음성을 들을 수 있습니다. 그들은 당시 뿐 아니라 모든 시대의 인습적인 의식을 대변한다고 하겠습니다. 불평등하다고 생각하는 그들의 심정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불평과 항의 때문에 포도원 주인이나 탕자의 아버지는 뜻을 돌이키지 않습니다. 늦게 라도 포도원에 들어가 일한 것, 뉘우치고 이제라도 돌아와 준 것만 가지고도 어찌 할 바를 모르는 사랑의 아버지가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제자들이 회개치 않는 성읍들에 불로써 천벌을 내리고자 예수께 제안했을 때 예수는 "너희가 ..... 였다면"이라고 탄식함으로써 천벌이 아닌 한탄의 심정을 피력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불의에 대한 단호한 복수가 아니라 그저 의를 자라게 하시는 느리고 더딘 방법을 사용하셨습니다. 그렇게 하심은 그분이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어쩌면 하늘의 벼락보다 훨씬 큰 힘을 갖고 있는 인간들은 전 인류를 없애버릴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야고보와 요한처럼 반대자들을 모조리 없애버리고 싶은 충동을 끊임없이 받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야고보와 요한을 돌아보시며 꾸짖으시고 함께 다른 촌으로 가셨음을(눅 9:55-56)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요한복음서 기자는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저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고 했고, 예수도 "......내가 온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함이 아니요 세상을 구원하려 함이로다"했습니다.
    불의한 자가 심판을 받았다고 여기는 일을 만났다면 그것은 자승자박이요 아버지를 떠났기 때문에 그리고 여전히 돌아오지 않고 있기 때문에 빠진 함정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도 잘못되기를 원치 않는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잊이 않기를 바랍니다.

  오늘 저녁에 우리는 이 비유의 복음을 통하여 조금 부차적인 문제를 다루어보는 것도 좋을 듯합니다.
그것은 아버지의 물질관입니다. 

  아버지는 입지전적인 인물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아마도 자식이 달라고 하면 넉넉히 줄 수 있는 그런 물질이 있었던 것같습니다. 옛날에 그만한 물질을 모으기란 그리 쉽지 않았을 터인데 이 아버지는 성실히 일하고 아끼고 힘을 다하여서 물질을 모은 것 같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가진 이러한 물질을 자식보다는 덜 귀하게 생각한 것입니다. 탕자가 유산 다라고 하기 훨씬 이전부터 아마도 자식들에게 아버지의 것은  다 너희들의 것이다라고 말씀했지 않나 십습니다. 그리고 물질보다는 너희들이 더 소중하단다 하고 말해오지 않았을까 생각해 봅니다.

  그래서 둘째 아들은 부자집 둘째 아들로서 상당히 물질에 대해서 넘치는 생활을 했을 것이고 이제는 그정도 가지고는 안되겠고 내 몫을 타내서 마음껏 사용해 보리라 하는 생각을 하게되었으리라 생각합니다. 아버지는 탕자의 이러한 요구까지도 아낌없이 수용해하고 허락해주었습니다.
 
  가끔 오늘 본문 말씀을 묵상하는 사람들 중에는 아버지가 탕자의 요구를 거절했으면 탕자가 집 나가는 일은 없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들에게 유산을 미리주지 않았으면 어떻게 허랑방탕한 생활을 할 수 있었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버지를 탓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일리가 없진 않습니다. 그럴 수도 있겠지요? 그러나 이 아들은 불량한 아들입니다. 아버지가 안준다고 순순히 집에 머물러 있었겠습니까? 혹 집에 머물러 있다고 해도 좋은 아들로 머물러 있었겠습니까? 빈손으로 라도 나갈수도 있고, 또는 강탈해서 나갈 수도 있고, 혹은 집에 머물러 있으면서 못된 아들노릇을 할 수도 있었겠지요.
  달라고 한 물질을 주지 않으면 최악의 상태로 잘못될 수도 있을것 같아서 아버지는 그 물질을 아들에게 주기로 한 것 같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것은 물질관의 문제가 아닙니다. 물질은 보다 더 중요한 것을 이야기하려는 것입니다. 입지전적으로 어럽게 돈을 모았지만 그런 돈 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는 것을 이 아버지는 알고 있었습니다. 물질때문에 부모와 자식이 등지는 일이 얼마나 지금 이 땅에는 많습니까? 이러한 문제는 예나 지금이나 다를 바가 없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아버지의 일차적인 관심사는 과연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두 말할 것도 없이 물질이야 어떻든 두 아들 모두 여전히 자신의 자식으로 존재하기를 원한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아버지는 재산을 다 없애더라도 좋은 자식이 되기를 바란 것이고 자식 만큼은 잃지 않기를 바란 것입니다. 
  아버지는 자식이 출세해서 돌아오리라고는 기대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오히려 거지가 되어 돌아올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보나마나 저 아이는 다 업애고 거지가 되어 돌아올텐데 그럴바에는 건강하게 살아서 돌아오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고 날마다 노심초사하고 기다리셨지 않나 생각합니다.

 

  돌아왔을 때, 보통 아버지들 같으면 어떻겠습니까?
심은 대로 거두었구나, 아버지 거역하고 나간 놈 치고 잘 되는 놈 보지 못했다고 시원하구나. 하고 분노하고 책망하고 채찍을 드는 일이 보통 하는 일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오늘 본문의 아버지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비판이 없습니다. 그저 목을 끌어 안고 입을 맞추고 감격해할 뿐입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옷을 갈아 입히고 신발을 신기고 살진 송아지를 잡아서 잔치를 배풀었습니다.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고 잃었다가 다시 찾았다는 것입니다. 이제라도 돌아와준것, 이제라도 정신을 차려준 것이 자랑스럽고 고마운 아버지입니다.

 

  그리고 한가지 더 원한 것은 두 아들을 하나가 되게 하는 일입니다. 그들을 사랑으로 한데 묶어주는 것이었습니다. 탕자와 맏아들 사이는 맏아들의 말을 들어보면 알 수가 있습니다.
아버지는 이 둘 사이를 중재하고 있습니다. 
  28~32절 "그가 노하여 들어가고자 하지 아니하거늘 아버지가 나와서 권한대 아버지께 대답하여 이르되 내가 여러 해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이 없거늘 내게는 염소 새끼라도 주어 나와 내 벗으로 즐기게 하신 일이 없더니 아버지의 살림을 창녀들과 함께 삼켜 버린 이 아들이 돌아오매 이를 위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나이다 아버지가 이르되 얘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내 것이 다 네 것이로되 이 네 동생은 죽었다가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얻었기로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니라"


  "그래 내 말은 하나도 틀리지 않다. 그러나 실패하고 돌아온 동생이라고 어디 마음이 편하겠니?"

  첫째 아들이나 둘째 아들이나 차별하지 아니하시고 죄인이나 의인이나 결국 죄인이기는 마찬가지인데 이 둘이 그 조그마한 차이 때문에 원수가 되고 서로 적대시하고 멀리하는 것을 원치 않는 아버지는 이 둘이 아버지 안에서 여전히 한 자식이며 한 형제이기를 원하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