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기현의 살림운동
용서할 줄 모르는 종의 비유(마태복음 18:23~35) 본문
오늘 우리가 보게 된 예수님의 비유의 말씀은 베드로의 질문으로 부터 시작된 것입니다. "형제가 내게 범죄하면 몇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번까지 하오리까?"하고 용서의 한계를 물었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어떤 대답을 기대했겠습니까? 적어도 예수님의 입에서 그렇게도 많이 용서를 하느냐?하며 칭찬을 기대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왜냐하면 유대전통에 의하여 용서의 한계가 세번쯤이기 때문입니다. 아마도 이것은 우리나라 전통하고도 맞아떨어집니다. 우리도 최고의 자비의 한계, 최고의 용서의 한계를 세번 정도에 두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답변은 베드로의 기대를 송두리채 무너지게 했습니다. 일곱번뿐 아니라 일흔번씩 일곱번이라도 할지니라"이를 계산하면 490번이 됩니다. 그런데 그렇게 계산할 문제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고자 하시는 용서의 한계는 없다는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정죄가 아닌 하나님 나라에로의 초청이며 용서였습니다. 예수님는 "인자는 인간의 목숨을 멸망시키려고 온 것이 아니라 구원하러왔다"(눅 9:56)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에 복음의 본질이 있습니다. 멸망시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구원하시기 위해서 예수는 이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인간에게는 언제나 정죄나 심판이나 멸망이 아닌 용서가 필요합니다. 사랑이 필요하며 구원이 필요한 것입니다.
율법은 죄를 정죄하고 심판합니다. 그러나 주님의 복음은 죄의 과실에 대한 용서를 하여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더 크게는 죄에서 풀어놓아주시는 자유를 주시는 것입니다.
구약이나 서신을 우리는 "복음"이라고 하지 아니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길을 예비한 세례요한의 메시지를 우리는 기쁜소식 즉 "복음"이라고 말하지 아니 합니다. 그의 말은 "나무 뿌리에 이미 도끼가 놓여 있고, 불이 내리고 심판과 멸망이 이 세상에 임박했다"고 경고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에게 있어서의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은 심지어 멸시받고 잃어버린바 된 자녀들에게까지 미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선포는 그 주제가 회개가 아니라 용서에 있으며 용서에로 초청하는 것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습니다. 유대종교와 바리새인들은 죄인이 구원을 받을 수 있을지라도 선을 행하고 그의 삶의 길을 바꿈으로써 그의 회개의 진실됨을 증명했을 때에만 가능합니다. 그런 다음에라야 그를 하나님의 사랑의 대상으로 보았습니다. 먼저 그는 의인이 되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회개에로의 부름이 아닌 복음이었으며 죄인이 회개하기 전에 하나님의 사랑을 선포한 것입니다.
회개만 일삼으면 되는 것으로 생각하면 안됩니다. 그 보다 한 수 위에 복음이 있습니다.
사랑해야 합니다.
요한복음 8장에 현장에서 간음하다가 잡혀온 여인을 향한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 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고 하셨습니다(요8:11). 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용서가 심판과 정죄를 넘어 용서가 전제된 사랑과 자유함의 복음임을 나태내주는 것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은 바로 용서가 전제된 사랑의 계시였고 그의 십자가는 용서의 절정이었습니다.
오늘 비유의 말씀을 통하여 천국백성들이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갸 할 것인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오늘 말씀에도 보면 일만 달란트 빚진자는 빚을 갚을 만한 아무런 힘도 능력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 몸과 처와 자식들과 모든 소유까지 팔아 갚을 수 밖에 없는 지경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주인이 그를 불쌍히 여겨서 모든 빚을 탕감해주었던 것입니다.
이 일만달란트를 탕감받은 빚쟁이는 곧 바로 나가서 자신에게 일백달란트 빚진자를 만나자 "목을 잡고 빚을 갚으라" "이에 가서 저가 빚을 갚도록 옥에 가두어 두거늘"이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큰 죄악을 탕감받은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빚을 탕감받은 자의 윤리로 이 땅에서 천국의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우리가 죄용서함을 받았으니 또한 우리도 마땅히 용서를 실천하는 삶을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일만달란트 탕감받은 사람처럼 자신은 전혀 빚져본 사실이 없는 사람처럼 그리고 자신은 하나도 탕감을 받아본적이 없는 사람처럼 하고 사는 것은 천국백성으로 합당한 삶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주인으로부터 많은 빚을 탕감받은 백성은 그 은혜를 모르고 그 기쁨을 모르고 그 은혜를 망각한채 자신 앞에 있는 더 작은 빚, 더 작은 죄도 용서하지 못했습니다.
이러한 사람은 주기도를 할 자격이 없는 사람입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과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주옵소서"하고 기도하라고 주님께서는 주의 기도를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용서할 줄 모르는 종의 처지가 어떻게 되었습니까? "주인이 노하여 그 빚을 다 갚도록 저를 옥졸들에게 붙이니라"했지 않습니까?
우리가 용서의 삶을 살지 않았을 때의 결과를 우리 주님은 보여주신 것입니다. 용서가 없는 삶은 결국은 율법으로 사는 사람들이며 정죄하며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결론적으로 "너희가 각각 중심으로 형제를용서하지 아니하면 내 천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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