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기현의 살림운동
빈집의 비유(마태복음 12:43~45) 본문
농촌의 빈집과 도시의 빈 건물들이 범죄의 장소로 또는 청소년들의 탈선의 장소로 사용되고 있다는 보도를 보았습니다. 빈집의 위험성을 알고 속히 철거를 하든지 새 주인이 살 수 있도록 하던지 해야 할 것을 지적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빈집은 항상 위험하고 흉물스럽습니다.
오늘 주신 주님의 비유는 빈집의 비유입니다.
더러운 귀신이 들린 사람이 있었는데 어떻게 해서 귀신을 쫓아낼 수가 있었습니다. 귀신이 나갔다는 것은 참으로 다행스러운 일입니다. 그런데 쫓겨나간 귀신이 물없는 곳으로 다니며 쉬기를 구하였으나 얻지 못하고 "내가 나온 내 집으로 돌아가리라"하고 돌아와 보니 집이 소제되고 수리되었으나 비어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는 다시 쫓겨나지 아니하기 위해서 저 보다 더 악한 귀신 일곱을 데리고 들어가서 거했다는 것입니다.
결국은 그 사람의 처음 귀신들린 형편보다 나중 형편이 더욱 심한 상태가 되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왜 그렇게 되었습니다. 빈집이었기 때문입니다. 귀신을 쫓아냈으면 참된 주인을 모시어 들였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빈 집 그대로 놓아두니 귀신이 되돌아왔고 그리고 다시는 쫓겨나지 않기 위해서 자기보다 더 악한 귀신 일곱을 대동하고 들어온 것입니다.
다시 들어온 귀신은 이제는 다시는 쫓겨나지 않으리라 각오를 하고 꽉 달라붙어버린 것입니다.
빈 집이 문제입니다.
이것은 영적 문제만이 아닙니다. 질병도 그렇습니다. 처음 발병한 것보다 재발이 문제입니다. 재발하면 그만큼 완치율이 낮아지는 것입니다.
습관성, 중독성 있는 것들도 그렇습니다. 처음 끊어버리는 것은 조금만 절제하면 됩니다. 그러나 다시 빠지면 끊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므로 처음 문제가 해결되었으면 그 문제가 다시 발생하지 않도록 다른 것으로 채워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 이 빈집의 비유의 결론과 주제는 처음 형편보다 나중 형편이 더욱 심하게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이와 같은 모습이 이 악한 세대의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악한 것에는 회귀성이 있습니다.
되돌아가고자 하는 습성입니다. 귀신도 회귀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한번 들어갔던 집에 다시 들어가고 싶어야 하는 것입니다. 죄악도 그렇습니다. 한번 죄짓는 인간은 다시 죄의 유혹에 빠지기 쉬운 것입니다. 나쁜 습관도 그렇습니다. 이러한 것들은 얽매이기 쉬운 것들입니다. 모든 악한 것에는 회귀성이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어떤 획기적인 변화가 없으면 다시 옛 상태로 돌아가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일단 버리고 떠나고 새롭게 마음을 고쳐 먹었으면 옛 상태로 돌아가지 못하도록 확고한 조치를 취해 놓지 않으면 안되는 것입니다.
빈 집은 이미 귀신을 내쫓아버린 집입니다. 그리고 그 빈집은 깨끗이 소제가 되었고 수리가 되어 있는 집입니다. 그러나 그 집은 비어 있는 집입니다. 여기까지는 좋았으나 빈 집은 참된 믿음과 하나님의 사랑으로 그 심령을 충만히 채운 바가 없기 때문에 또 다시 귀신이 노리는 집이 되고 말았던 것입니다.
주인없는 집은 아이들이 놀이터가 되고 마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주인없는 인간의 마음의 집도 결국은 악한 귀신의 거할 처소가 되는 것입니다.
귀신을 몰아냈으면 예수 그리스도를 주인으로 모셔들여서 다시는 귀신이 돌아오지 못하도록 해야하는 것입니다.
집을 소제해 놓았으면 다음 단계로 반드시 그 집에 새 주인을 모셔들여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옛 주인이 되돌아 오지 못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의 마음을 회개하고 청결히 한 것으로 문제가 해결되는 것이 아닙니다. 귀신의 권세를 물리쳤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된 것이 아닙니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주예수 그리스도를 마음에 충만하게 영접해서 다시는 그 악한 것이 돌아오지 못하도록 하는 일입니다. 어설프게 하면 이전보다 더욱 악한 모습이 될 수가 있는 것입니다.
빈집을 자랑해서는 않됩니다. 빈집은 불행한 집입니다. 집은 사람이 살아야 제 구실을 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인생은 하나님이 거하시는 집이든지 아니면 귀신이 거하는 집이든지 둘 중의 하나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빈집과 같이 이것도 저것도 소용이 없다고 교만을 떠는 것은 결국 더 무섭과 사악한 귀신을 불러들이는 결과를 가져와서 처음 형편보다 나중 형편이 더 나쁜 상태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단순히 비웠다는 것을 자랑으로 삼지 말고 채우는데 힘을 쓰셔야 합니다.
예수님은 빈집이 더 위험하다 말씀하십니다. 빈집이 되어 더 악한 귀신이 들어와 나중에 더 심하게 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따라서, 비우기 보다는 채우기에 집중하여야 합니다. 미움을 비우는 것이 아니라 사랑을 채워야 합니다. 슬픔을 비우기 보다는 기쁨으로 채워야 합니다. 악한 생각을 비우기 보다는 선한 생각으로 채워야 합니다. 비우는 것이 초점이 아니라 채우는 것이 초점입니다. 하지 말라는 것이 초점이 아니라, 하라는 것이 초점입니다.
사도바울 또한, 거짓을 버리는 것이 끝이 아니라 참된 것을 말하여야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도둑질, 더러운 말을 그만두는 것이 끝이 아니라, 빈궁한 자를 구제하고 덕을 세우는 말(복음)을 전하여야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기독교는 비우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채우는데 더 집중하여야 합니다.
죄 않짓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선을 행해야 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마음을 착하게 가지는 것도 중요하고 행실을 고치는 것도 중요하고 마음을 고쳐보고 다짐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회개도 중요하고 뉘우치는 것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 말씀에서 강조하고 있는 것은 주인을 바꾸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주인을 바꾸지 아니하고서는 소용이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인생의 주인이 되도록 바꾸어 놓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다시 돌아오고 싶은 죄악도 악한 마귀 사단의 권세도 돌아와서 거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인간의 마음에는 무엇인가가 충만히 체워지지 않으면 욕구불만이 생기고 그것을 채우게 되는 것입니다. 먼저 좋은 것으로 충만해 채워 놓으면 나쁜 것이 들어올 수가 없는 것입니다.
주님의 은혜로 충만히 체워야 하는 것입니다. 성령의 충만함을 가져야 합니다.
믿음의 열심으로 충만히 채워야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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