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기현의 살림운동
감추인보화의 비유(마태복음 13:44) 본문
한 농부가 어느날 동리의 밭에서 일하다가 쟁기에 부딪히는 것이 있어서 하던 일을 멈추고 땅을 깊이 파 보았더니 무수히 많은 보화가 그 속에 있는것을 발견하게 된 것입니다. 지혜로운 이 농부는 급히 묻어 두고서 그 밭 주인에게 가서 그밭을 사고 싶다했습니다. 밭 주인은 많은 값을 불렀지만 이 농부는 그 밭을 사기 위해서 집에 있는 자기의 소유를 모두 팔아서 그 밭을 사고야 말았습니다.
내용을 모르는 이웃사람들은 이 농부의 하는 일을 비웃으면서 어리석은 짓을 한다고 했을 것입니다. 그런 쓸모 없는 땅을 사다니 ...... 그러나 매매계약이 끝난 다음에 이 농부는 가족들과 함께 삽과 곡팽이를 메고 그 밭으로 나가서 보화를 깨내기 시작했습니다. 정말로 놀라운 보물들이 그곳에서 나왔습니다. 값으로 친다면 자기가 지불한 금액과는 가히 비교할 수 없는 보물들이었습니다. 그때에야 이웃들도 이 농부가 결코 어리석은 사람이 아니었다는 것을 깨달았을 것입니다.
고대 사회에서는 값진 보화를 약탈하려는 자들은 많았었지만 그 보화를 안전하고 편리하게 보관할 수 있는 지금의 은행과 같은 기관이나 제도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약탈자들이 두려워 자기의 귀중한 보물을 보관함에 있어서 가장 좋은 방법으로 선택한 것 중에 하나가 바로 아무도 모르게 땅에 묻어두는 것이었습니다. 쥐도 새도 모르게 땅에 묻어놓으면 안전할 수가 있었습니다.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에도 보면 여리고 길에서 강도가 출몰했던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오늘날도 그렇지만 옛날에는 더욱 돈이 있는 곳에 흑심을 품는 사람들이 달라붙게 되는 것입니다. 돈 있는 사람들은 절대로 돈 자랑하면 안됩니다. 돈파리들이 날아들기 때문입니다.
더욱이 팔레스타인은 우리가 익히 잘 아는 것처럼 세계에서 가장 전쟁이 많았던 곳입니다. 전쟁통에는 보화를 지니고 있는 것 자체가 위험을 초래하는 것이기 때문에 전쟁이 나면 전쟁을 하려 가는 사람이나 피난을 가는 사람이나 함락당할 위험성을 안고 있는 곳에서는 귀중품들을 땅 속에 묻어두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전쟁이 끝나면 돌아와서 다시 캐내곤 했습니다. 그러나 돌아오지 못해서 영영 못캔 것들도 많았습니다. 바로 이것이 감추인 보화가 되는 것입니다.
강화(江華) 땅은 고려시대의 몽고 내습(蒙古來襲) 이래 병자호란(丙子胡亂)에 이르기까지 전란이 있을 때마다 도성 사람들의 피란지였다. 피란간 장안 부자들이 보물 상자를 땅 속에 묻어둔 채 알리지 못하고 죽어갔기에 후세에 이를 우연히 발견해서 벼락부자가 된 사람이 적지 않았다. 우리 한국 사람은 전통적으로 재물을 패물로 만들어 지하에 묻어두는 것이 체질화돼 있었다. 서울 누상동, 옥인동, 통인동의 경계 즈음에 금은보화(金銀寶貨)가 가득 담긴 석함(石函)이 묻힌 땅이 있다고 구전(口傳)되어 그 인근 땅값이 오랫동안 곱절이 비쌌던 적이 있었다. 옛날 공주(公主) 한 분이 그 인근에 살면서 패물 석함을 묻어두고 후손이 없어 알리지 않고 죽었다는 전설 때문이었다.
아마 우리나라도 이북에서 내려온 수많은 피난민들 중에 얼마 안 있어 곧 다시 고향에 돌아갈 줄 알고서 귀중품을 땅 속에 묻어두고온 사람들이 더러 있었을 것입니다. 지금도 땅속 어딘가에는 그런 애끊는 사연이 담긴 보화들이 감추어져 있을 가능성이 많습니다.
그런가하면 옛날 권력가들이나 부자들의 무덤에는 많은 부장품들이 함께 묻혔는데 그 무덤들이 후손이 끊기거나 세월이 지나 평토장이 되고 화전민들에 의해서 밭으로 계간되는 경우가 있을 것입니다.
이처럼 땅 속에 항아리나 궤에 넣어서 묻어둔 것이 어떤 사람이 남의 땅을 파다가 우연히 그 보화의 존재를 알게 되었을 때 그는 땅을 삼으로서 그 보화를 손에 넣게 되는 것입니다.
아마도 예수님시대에도 이런 횡재를 한 사람들이 더러 있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이 뉴스거리가 되고 예수님 귀에도 들려져서 예수님께서 알고 계셨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을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하나님 나라를 가르칠 때 비유꺼리 즉 에화꺼리로 사용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비유에서 "천국은 마치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다"고 하셨습니다. 이 이야기 속에는 기독교의 구체성과 현실성이 잘 설명되어 있는 것입니다.
첫째로, 보화는 땅에 감추었던 것이므로 발견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보화의 속성입니다.
여러분에게 보화가 있으면 자랑하고 싶은 마음과 함께 또 다른 한편에서는 이것을 어떻게 하면 감출 수 있을까를 생각하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보화는 아무렇게나 널려져 있는 것이 아닙니다. 보화란 것은 범상한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그렇다보니까 본래적으로 귀한 것이기 때문에 감추어져 있기 쉽상인 것입니다.
아무런 노력도 하지 않았는데 우연하게 발견되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형태로든지 탐구적인 자세로 살아갈 때 발견하게 되고 얻게 되는 것입니다.
둘째로, 그 보화를 발견하고, 소유한 자에게는 큰 기쁨이 있습니다.
"크게 기뻐하며"하였습니다. 보화를 발견한 농부는 한없이 기뻐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자기의 소유로 삼게 되었을 때는 더 큰 기쁨이 넘치게 되었던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기독교의 진리를 가진다는 것이 한없이 기쁜 일입니다. 이 기쁨은 물질이나 지식, 명예 등이 주는 기쁨과는 비할 수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오는 사죄와 구원의 기쁨은 그렇게 큰 것입니다.
비록 그리스도인이 땅에서는 가난과 고통의 삶을 살지라도 하나님의 부유와 그의 넘치는 위로에서 오는 기쁨은 그렇게 큰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도바울은 고린도후서 6:10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는 근심하는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유하게 하고 아무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 빌립보서 4:4에서는 "주 안에서 기뻐하라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라고 권면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실 바울 당시 즉, 제1세기에 가장 큰 기쁨과 만족의 삶을 산 사람들은 누구였습니까? 로마의 제왕들이었습니까? 귀족들이었습니까?아니었습니다. 그러면 누구였습니까?그것은 크리스챤들이었습니다. 핍박속에서도 가난속에서도 참 기쁨의 생활을 한 사람들은 그리스도인들이었던 것입니다.
셋째로, 이 보화를 내 소유로 만들기 위해서는 희생의 결단이 있어야 합니다.
보화를 발견한 사람이 그 보화를 자기 것으로 삼기 위해서 한 일이 두가지 있습니다.
첫째는 다시 감추었다는 사실입니다.
자기 소유를 삼기 위해서 이 사람은 필사적인 노력을 한 것입니다.
둘째로는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샀느니라"고 하였습니다.
밭에서 발견한 그 보화는 아주 귀한 것이니 이제는 내게 있는 모든 것을 다 희생해서라도 내가 꼭 소유하고야 말겠다는 결단이 필요한 것입니다. 만일 어떤 사람이 이세상에서 가장 값진 보물을 발견했다고 합시다. 그렇다면 그것을 누가 조금 비난한다고, 하는 일에 조금 지장이 있다고 그것을 버리겠습니까? 마찬가지로 우리 기독교의 진리는 그것이 값진 보화이기 때문에 어느 정도 희생적인 각오가 없이는 소유할 수가 없습니다. 감수할 것은 감수해야 합니다.
우리가 이 세상 살아가면서도 좀더 가치 있는 것에 투자를 할 때는 빚도 내고 생활의 규묘도 줄이고 나가서 땀흘려 일당이라도 벌려고 수고하는 것입니다. 이런 것을 어리석다고 비난할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밭에서 보화를 발견한 농부가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서 밭을 샀던 것이 결코 어리석은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 보화의 가치를 모르는 사람은 그를 어리석은 사람이라고 비난할 것입니다. 하지만 그 보화가 자기가 소유하고 있는 모든 재물보다 몇 천배나 몇 만배나 비할 수도 없이 값진 것임을 아는 사람은 비난을 들으면서도 어떤 희생이 따르더라도 그 밭을 사는 일을 감행할 수 밖에없습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는 것은 밭에 감추인 보화를 발견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발견한 자만이 아는 것입니다. 그리고 보화이기 때문에 소유한 자에게는 남이 모르는 큰 기쁨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보화를 소유하기 위해서는 어떤 희생이 있더라도 결단이 필요합니다. 이것을 잊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또 우리가 오늘 본문 말씀에서 한 가지 깊이 생각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이 보화를 발견한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보화뿐입니다. 밭은 사실 욕심나는 것도 아니고 밭에는 관심도 없습니다. 그러나 그는 밭을 샀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밭을 사지 않고는 그 밭에 감추어진 보화를 100% 자기의 것으로 소유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땅속에 묻혀 있는 것을 발견하면 전부가 발견한 사람의 몫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반드시 땅 주인하고 이익을 나누어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익을 빼앗기지 아니하려면 그 땅을 사야 하는 것입니다. 땅 주인과 발견한 자가 같을 경우에는 별문제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것은 사람이 마음 먹기에 따라서 그 보화 전부를 몰래 도둑질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예수님의 비유에 나오는 사람은 결코 쉽게 공짜로 얻겠다는 마음은 갖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구원을 얻고 천국에 들어가려면 이에 관계된 것들을 받아들여야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교회생활을 사야 합니다. 때로는 교회의 조직이나 예배의식, 행사 등이 내 마음에 꼭들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교회 안에 말씀이 있고 진리가 있기 때문에 교회 생활을 수긍하고 교회라고 하는 전체의 구조를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리고 그 교회의 생활과 교리와 예식들 까지도 따라해야 하는 것입니다.
보화만 사겠다고 하다가는 오히려 보화를 빼앗기게 되는 것입니다. 보화와 관계된 모든 것을 사는 것이 보화를 지키며 전부를 소유하는 것이 됩니다. 이것이 우리의 신앙생활이요 교회 생활인 것입니다. 오늘 지혜로운 감추인 보화를 발견하고 그 밭을 사서 전부를 소유하고 그것을 기뻐하며 자랑하는 그 사람이 바로 우리 자신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예수 믿는 것도 그렇습니다. 너무 지름길로 가려하지 말아야 합니다. 정당한 코스로 성경보고 기도하고 교회에 나오며 봉사하는 기본적인 과정을 밟아나가야 합니다. 천국은 나홀로 가는 것이 아니라 관계로 가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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