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기현의 살림운동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누가복음 10:29~37) 본문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는 우리가 너무나도 잘 아는 예수 그리스도의 비유의 복음입니다.
그런데 이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는 어떤 율법사가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묻는 질문으로 부터 시작되고 있습니다. 25절에 "우리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을 수가 있겠습니까?"
예수께서는 이 물음에 26절을 통하여 율법에는 무엇이라고 했으며 너는 어떻게 읽느냐? 이에 율법사가 대답을 하기를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몸과 같이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였나이다." 예수님은 "네 대답이 옳도다 이를 행하라 그리하면 네가 살리라"
율법사가 다시 묻기를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입니까?하고 질문을 한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 말씀은 이 율법사의 질문에 대해서 어떤 이웃이 좋은 이웃이며 우리가 어떤 이웃이 되어야 하는가를 알려주시는 주님의 말씀입니다.
비유의 첫머리에 이스라엘 즉 유대인으로 추정되는 나그네 한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가던 도중에 강도를 당해 반쯤 죽은 상태로 길가에 버려진 장면이 나옵니다. 그런데 그 당시 가장 거룩하고 사회의 지도층에 속한 제사장이 그 강도만난 사람을 보고는 그냥 지나쳐 가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그 한 단계 아래에 있는 레위인 역시 마찬가지 였습니다.
그리고 오늘 성경에는 나와 있지 않았습니다만 보통 유대인들도 있습니다. 보통 시민에 속한 사람들은 예수님의 이야기에서 언급조차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는 껑충 뛰어서 생각지도 못한 사람이 등장합니다. 그 길로 내려온 사람이 누구였습니까? 유다민족과 철천지 원수인 사마리아인이었습니다.
여러분! 여기서 성경을 덮어놓고 생각을 해보셔야 합니다. 예수님의 비유의 말씀을 듣고 있던 사람들이 어떤 결과를 상상했겠습니까? 아마도 대부분의 유대인 청중들은 이 가련한 강도 만난 자가 마지막 은총마져 기대할 수 없게 되었구나 했을 것입니다. 대부분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있는 순간 아마도 사마리아인은 그 강도 만난 자를 헤치고 말겠지 하고 생각을 했을 것이 뻔합니다. 그들은 원수 사이었으니까 말입니다.
유대인들은 사마리인들은 나쁘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사마리아인하면 나쁜 사마리아인만을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이 사마리아인은 부상자의 상처에 기름과 포도주를 붓고 간호를 해줍니다. 그리고 자기가 타고온 말에 이 강도만난 사람을 태우고 대신 자신을 걸어서 여관으로 데리고 가서 숙식비까지 지불합니다. 그리고 지불한 것보다 더 들면 오는 길에 그것까지 다 책임을 지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마리아인에대한 이미지를 완전히 새롭게 해주셨습니다. 나쁜 사마리아인에서 좋은 사마리아인으로 말입니다.
이 세상에 있는 이웃 중에는 제사장과 같은 이웃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레위인과 같은 이웃이 있을 수 가 있습니다. 오늘 성경에는 나오지 않았지만 보통 평민에 속한 유대인과 같은 이웃이 있을 수가 있습니다.
이들은 어쩌면 강도를 만나 거반 죽은 상태에서 도움이 절실히 필요한 가련한 유대인의 가장 좋은 이웃일 것으로 생각되는 사람들이었습니다.그러나 정작 그들은 좋은 이웃이 되어주지를 못했습니다.
이들이 좋은 이웃이 되지 못한 이유에 대해서는 성경은 침묵을 지키고 있어서 우리는 상상을 할 수 밖에는 다른 수가 없습니다.
오늘 성경에 보면 특별한 이웃이 있습니다. 평상시에는 전혀 이웃일 것이라고는 기대할 수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가장 좋은 이웃이 되어준 사람이었습니다. 그 사람은 사마리아인이었습니다.
우리의 주변에도 이 사마리아인과 같은 이웃이 있을 수가 있습니다.
사마리아인은 유대인들이 생각할 때는 비록 유대인의 혈통을 이었지만 그들은 그 혈통을 이방민족의 피와 혼합하였고 유대에서 떨어져 나가서 다른 종교 예식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유대의 원수처럼 취급을 했으며 유대교에서 떨어져 나간 배교자로 취급을 했습니다. 당시 랍비 문헌에 보면 "사마리아 사람들의 음식을 먹는 자는 돼지의 먹이를 먹는 것이다"라고 나와 있을 정도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와 같은 세 종류의 이웃에 대해서 말씀하신 후에 사람들에게 누가 좋은 이웃이냐?고 물으신 것입니다. 모든 사람의 대답이 "자비를 베푸는 자입니다"라고 대답을 했습니다.
그러자 주님은 단호하게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고 부탁하신 것입니다.
선한 사마리아사람처럼 강도만난 사람을 불쌍히 여겨야 합니다.
"당할만하니까 당했지" "잘 되었다" 이렇게 대하면 안됩니다.
좋은 이웃은 자비를 베푸는 사람입니다. 좋은 이웃이 되는 조건에는 다른 어떤 것도 있을 수가 없습니다. 같은 민족이라고 좋은 이웃이 아니며 제사장이나 레위인이라고 해서 좋은 이웃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자비를 베푸는 자가 좋은 이웃인 것입니다.
강도를 만나 죽어 가는 사람을 일신상의 편의와 득실을 계산하는 이기주의적인 시선으로 바라보지 않고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지금 당장 도움을 주어야 사람으로 바라보는 시선을 가진 자가 선한 사마리아인 입니다. 바로 이같은 마음이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요, 자비를 베푸는 마음입니다. 그리고, 인간으로서 꼭 필요한 기본적인 마음가짐이기도 한 것입니다. 주님의 이야기 속에서는 제사장과 레위인이 개취급하는 사마리아인에게 이 아름다운 참 인간의 모습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아이러니칼 하게도 자신들이야말로 짐승같은 인간들과는 질적으로 다른 그야말로 인간 중에서도 인간으로 자부하는 바로 그 유대 선민인 그들에게는 개보다 못한 비인간적인 비열함과 매정함이 흘러 넘치고 있었던 것입니다.
상처를 치료해 주는 사람이 좋은 이웃이며 선한 사마리아인입니다.
우리 크리스천은 이 세상의 신음하는 인생들의 상처를 찾아내어 소독하며 치료해 주는 사명을 주께로부터 받은 사람들입니다. 이들의 생명을 구원하며, 고통과 아픔의 상처를 치료해 주는 일이라면 바쁘게 가던 길도 멈추고 도와 주어야 하는 사명자들입니다.
이미, 우리는 강도 만난 처치에 있었다가 선한 사마리아 사람으로부터 큰 도움을 받아 새 생명의 길을 지금 가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빚진 자의 심정으로 제2의 사마리아인으로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자꾸 상처를 내고 상처를 덧나게 하는 것은 옳은 일이 아닐 것입니다.
"추운데 옷 사서 입어라, 배고픈데 밥 사서 먹어라" 이렇게 말로만 하는 것은 선한 사마리아인이 아닙니다. 좋은 이웃이 아닙니다. 지갑이 열려야 좋은 이웃입니다. 선한 사마리아인은 자신의 물질을 강도만난 사람을 위해서 썼습니다. 그리고 더 필요하면 그것을 자신이 담당하리라 생각을 했고 그리고 약속을 했습니다.
좋은 이웃은 말로 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이 있는 물질로 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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