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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아들의 비유(마 21:28-32) 본문

비유의 복음

두 아들의 비유(마 21:28-32)

유앙겔리온 2010. 12. 13. 21:27

  오늘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비유의 복음 중에 "두아들의 비유"를 나누게 되었습니다.  이 두 아들의 비유의 특징은 마태복음에만 있는 비유입니다. 다른 복음서에는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비유를 하시게 된 이유가 무엇이었습니까?
  예수님의 성직에 대한 의문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성전에서 가르치실 때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네가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느뇨. 또 누가 이 권세를 주었느뇨?" 하고 의문을 제기하고 방해하려고 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무슨 권세로 성전에서 가르치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예수님에게 시비를 건 것입니다.
  의도적으로 권위를 부정하려는 사람들에게 그 권위를 내세우는 것처럼 어려운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래서 직접적으로 그들의 질문에 대답하지 아니하시고 스스로 깨닫게 하시려고 그들에게 말씀하신 비유가 바로 오늘 저녁에 우리가 보게 된 "두 아들의 비유"입니다.

 

  어떤 포도원 주인에게 두 아들이 있었다는 겁니다.
그런데 포도원의 일이 다급했습니다. 그래서 하루는 아버지가 두 아들을 차례로 찾아가서 "포도원에 들어가서 아버지 일을 도우라"고 했다는거지요. 그런데 첫째 아들은 습관적으로 "예"하고 대답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대답만 하고 가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대답은 했지만 실행한다는 것은 땀을 흘려야 하고 수고를 해야 하는 일이었습니다.
  한 여름 뜨거운 포도원에서 일하는 것은 쉬원한 그늘에서 쉬는 것보다 결코 편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예"라는 대답으로 생색은 내고 실재적으로는 포도원에 들어가서 일 하지는 않았습니다. 

  둘째 아들은 일단 "아니오"라고 했습니다. 내가 부지런히 일해보았자 그것은 아버지 것이고 형님 것이지 내것이 아니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반항심과 둘째 아들의 끼를 유감없이 발휘합니다. 처음에는 반항심과 분노로 또는 상한 감정으로 '아니오'라고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나중에 아버지를 생각하고 뉘우치고 포도원에 돌아가서 열심히 일했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의 비유 중에는 유독 포도원과 관련지어 이야기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것은 팔레스틴 문화가 포도원이 많은 곳이며 그래서 포도원에 얽힌 사건과 교훈들이 많을 수 밖에 없는 문화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이야기를 하시고 난 후에 "누가  아버지의 뜻대로 행했느냐?"고 물으셨습니다.
 누가 아버지의 뜻대로 행했느냐? 누가 아버지를 기쁘게 해드린 아들이냐?를 묻는 예수님의 질문이 이 비유에서 주제이고 중요점입니다.
  누가 아버지의 뜻대로 행했습니까?  누가 아버지를 기쁘게 한 아들입니까? 
  아버지를 만족스럽게 기쁘게 한 아들은 둘 다 아닙니다. 예하고 안간 아들이나, 아니오 하고 나중에서야 간 아들이나 아버지의 마음을 아프게 한 아들들인 것이 틀림이 없습니다.
  이 두 아들에게서 좋은 점만 뽑아내서 예하고 곧 바로 가서 포도원에서 일하는 제 삼의 아들이 있었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나 그런 아들은 애초에 없었던 것 같고 이 두 아들 중에서 그래도 아버지를 기쁘게 한 아들을 고르라면 어떤 아들이겠느냐?고 주님이 물으신 것입니다.
이 때 무리들이 스스로 대답하기를  "둘째입니다" 라고 했던 것입니다.
  이 대답을 이끌어내기 위해서 주님께서는 이 비유를 말씀하신 것입니다.
  가겠다고 해놓고 안간 아들보다는 그래도 안가겠다고 했다가 회개하고 간 아들이 아버지의 뜻대로 한 자라는 것입니다.
  지금 예수님 앞에서 "당신이 무슨 권세로 그렇게 하느냐?고 하면서 자신들이 가장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 있는 사람처럼 하는 바리새인들과 대제사장과 서기관들보다는  오히려 지금까지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지 못한 것을 후회하고 성전에서 가르치시는 주님의 말씀을 순종하는 세리와 창기와 죄인들이 더 아버지의 뜻대로 사는 자라는 것입니다. 

 

  단순히 기질적인 요소만을 따져본다면 여려분들에게는 어떤 기질이 있습니까?
큰 아들의 기질입니까? 작은 아들의 기질입니까?
  그러나 믹서형 기질이 어떻게 보면 가장 적합한 기질이 아닌가 하는 것입니다.

  혹시 외국어로 된 성경이나 헬라어 원어로된 성경을 보았거나 공동번역이나 표준성경이나 또 이 비유를 다른 사람을 통해서 알고 있는 사람을 위해서 한 가지 말씀을 드리고 넘어가야 하겠습니다. 혼동이 없기를 바랍니다. 방금 언급한 그런 성경에보면 첫째 아들과 둘째 아들의 역할 이 바뀌어 기록이 되어져 있습니다. 첫째아들은 아니오 했다가 돌아와서 포도원에서 일했고, 둘째 아들은 예 하고는 일하지 않고 놀았습니다.
  중요한 것은 첫째 아들이냐 둘째 아들이냐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아무래도 상관이 없습니다. 문제는 어떻게 대답을 하고 그리고 어떻게 행동했느냐하는 것이 중요한 문제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비유를 말씀하신 것은 유대인들중에서 특별히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을 교훈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입술로는 하나님을 존중한 다고하면서도 마음은 하나님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사는 삶을 산 것입니다. 위선적이었습니다. 이중적이었습니다. 이것이 대다수 유대인들의 삶의 스타일이었습니다. 입으로는 말끝마다 예 예하지만 행동으로는 그렇게 하지를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죄인처럼 취급하는 세리나 창기나 이방인들은 처음에는 아니오 했지만 곧 뉘우치고 돌아온 탕자와 같다는 것입니다. 지금까지의 삶의 방식을 청산하고 새로운 삶의 방식을 취하여 정말 죽도록 충성한 것입니다.

 

  오늘 말씀에서는 집 안에 있으면서 사사건건 아버지의 발목이나 잡고 불순종하는 자식보다는 한 때 과오로 집을 나갔지만 그래도 뉘우치고 돌아와서 열심히 아버지의 말씀에 순종하는 자식이 아버지를 더 기쁘시게 한 자식으로 평가가 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설프게 예수를 믿게 되면 위선자가 되기 쉽습니다. 실제로 회개하지 않았으면 회개한 척 하고, 구원에 대한 확신이 없으면서도 구원에 대해서는 졸업한 것처럼 행동하기 쉽습니다. 처음부터 자신의 죄에 대한 철저한 깨달음이 있어야 하고 그래서 철저하게 하나님 앞에 회개하는 기도가 필요합니다. 예수님께서 오셔서 첫 번 외치신 말씀이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다"였습니다. 회개함 없이, 자기를 철저하게 깨트림 없이는 천국은 우리에게서 멀리 있습니다.
 
  오늘 이 비유는 복음적으로 살아가는 우리 자신에게 너는 누구이며 어떻게 행하느냐 하는 문제를 짚어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익히 잘 알고 있는 야고보 사도의 말로 그 의미를 요약할 수 있을 것입니다. "너희는 도를 행하는 자가 되고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자가 되지 말라"(약 1:22)라는 말로 의미를 찾을 수 있을 것으로 봅니다. 본 비유는 부탁받은 일을 거절하였으나 후에 그의 마음을 바꾸어 그 일을 실행한 사람이 하겠다고 약속을 해놓고 실행치 않은 사람보다 낫다는 사실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