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기현의 살림운동

눈의 비유(마 6:22~24) 본문

비유의 복음

눈의 비유(마 6:22~24)

유앙겔리온 2010. 11. 17. 13:47

  오늘 저녁에 우리가 보게 된 예수님의 비유의 말씀은 좋은 눈과 나쁜 눈에 대한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네 몸의 등불은 눈이라, 네 눈이 성하면 온 몸이 밝을 것이요 만일 나쁘면 네 몸도 어두우리라"하셨습니다. 여기서 눈은 일차적으로 육신의 눈 즉 시력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눈의 상태 즉 시력의 여하에 따라서 사물의 보이고 보이지 않고가 결정됩니다.
  그리고 좀더 깊이 다루면 정신적 영적으로 생각해보면 눈은 곧 가치관을 말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세상을 어떤 시각으로 어떤 가치관으로 바라보느냐 하는 것입니다.  
  눈은 몸의 등불이여서 좋은 눈은 결국 우리의 마음과 몸과 생활과 장래를 좋은 쪽으로 인도하며 끌어가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나쁜 눈은 결국 마음과 몸과 생활과 장래를 나쁜 쪽으로 인도하게 되는 것입니다.


  눈은 몸의 등불이라는 말에서 눈은 사람의 인생관을 나타내는 비유임을 발견하게 됩니다. 사람이 사물을 보는 방식은 사람이 행동하는 방식에 영향을 미치고 따라서 그 사람의 성품과 인격에도 영향을 미치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이 점과 밀접하게 관련해서 사람이 자신의 인생관에 따라서 보이는 반응을 언급하셨습니다.


  유대 전통에서 보면 좋은 눈은 사랑이 담북 담겨있는 눈, 자비가 풍성한 눈을 좋은 눈, 성한 눈으로 본 것입니다.
  어떤 것을 볼 때 사랑의 눈으로 보는 것과 사랑이 없는 눈으로 보는 것은 전혀 다른 것입니다. 사랑의 눈으로 보면 다 좋게 보이는 것입니다.
  자비가 있는 눈으로 보는 것과 자비가 없는 눈으로 보는 것은 전혀 다른 것입니다.
  예수님의 눈길은 늘 사랑과 자비가 넘치는 눈길이셨습니다. 그러했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세리와 창기와 죄인들의 친구가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볼 때 불쌍히 여겼던 것입니다. 그들을 볼 때 눈물을 흘릴 수가 있으셨던 것입니다. 그러나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의 눈길은 그렇지를 못했습니다. 불쌍히 여기기는 커녕 오히려 그들을 깔보고 정죄하고 비판하고 없신여겼던 것입니다.


  반대로 유대전통에서 나쁜 눈은 탐욕과 탐심과 미움으로 보는 눈은 나쁜 눈이라고 본 것입니다. 잠언 28:22에 "악한 눈이 있는 자 재물을 얻기에만 급하고 빈궁이 자기에게로 임할 줄은 알지 못하느니라"고 했습니다.
  탐심으로 보면 모든 것이 다 그렇게 보이는 것입니다. 돈독이 눈에 올라 있는 사람은 모든 것을 돈으로 환산을 하고 돈의 가치로만 보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을 사람으로 보지 않고 돈의 힘으로만 사람을 보는 것입니다. 
  음란한 눈을 가진 사람은 모든 것을 음난하게 보는 것입니다.
사람이 이렇게 좋지 못한 눈을 가지고 있으면 만사가 그렇게만 보이는 것입니다.


  예말에도 백문이 불여일견이라고 해서 백번 듣는 것보다 한 번 보는 것이 더 낫다는 말이 있습니다만 특히 오늘날은 보는시대입니다. 과거와는 달리 지금은 듣는 것보다는 보는 것에 익숙해져 있습니다.

  보는 것이 중요하다면 어떤 눈으로 어떻게 보고 무엇을 보느냐가 대단히 중요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그리스도인은 모름지기 좋은 눈, 성한 눈을 가지고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눈이 건강해야 건강한 삶을 살 수가 있습니다. 볼아야 할 것을 보고 바로 보고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좋은 눈이 되기 위해서는 첫째로 눈을 뜨는 것이 중요합니다.
감겨진 눈을 좋은 눈이라고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눈을 감고 있으면 사물을 볼 수가 없습니다. 우리 교인들 중에는 실재적으로 한분도 눈이 감겨진 분은 없습니다.
  이 말씀을 좀더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사람이 무엇을 몰랐다가 알게 되면 눈을 떳다고 합니다. 깨달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보고도 깨닫지 못하면 참으로 본 것이 아닌 것입니다.
  우리는 눈을 떠야 합니다. 신령한 세계를 보는 눈을 떠야 합니다.
일찍이 다윗은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꼬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시 12:1) 고백하며 하나님을 향한 눈을 열었다.

 
  좋은 눈은 분명하게 보는 눈이 좋은 눈입니다.
분명하게 보지 못하고 흐릿하게 보면 안 됩니다. 흐려진 눈은 성한 눈이 아닙니다.
  많은 사람들이 눈이 흐려져버리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물질이 앞을 가리면 자기 이권 앞에서는 눈이 흐려져 버립니다. 물질이 있는 곳에 마음이 있습니다. 
자기와 자기 가족 앞에서는 눈이 흐려져버립니다. 학연과 지연앞에서는 눈이 흐려져버립니다. 편가르기 앞에서는 눈이 흐려져 버리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옳고 그른 것이 없어져 버립니다.
  가끔 딱부러지고 명쾌해서 사랑받은 연예인들이나 아나운서들이 정치판에 뛰어들어 국회의원을 하는 것을 보면 결국 눈이 흐려져서 제대로 분별하지 못하는 것을 봅니다.


  어떤 경우라도 우리의 눈이 흐려지지 않고 분명하게 볼 수가 있어야 하겠습니다. 남의 허물을 볼 때나 나의 허물을 볼 때나 눈이 흐려져서는 않됩니다.


  좋은 눈은 똑 바로 봅니다.
삐딱하게 보면 안 됩니다. 삐딱하게 보면 모든 것이 다 삐딱합니다. 돌라먹고 빼돌리고 훔쳐 먹었을 것이라고 보면 다 그렇게 보이는 것입니다. 다 도적놈같이 보이는 것입니다. 항상 앞에서 못보고 뒷모습, 옆모습만 보는 사람이 있습니다. 똑바로 보아야 합니다.
   마 20:15에서 예수님께서는 "내 것을 가지고 내 뜻대로 할 것이 아니냐 내가 선하므로 네가 악하게 보느냐" 말씀하셨습니다. 


  좋은 눈은 긍정적인 눈입니다.
우리가 이 땅을 살아가노라면 넘어가야 할 산도 많고 극복해야 할 장애물도 많습니다. 좋은 일도 있지만 굳은 일들도 있습니다. 내 눈이 내거티브하면 다 내거티브하게 보입니다. 내 눈이 어두우면 다 어둡게 되고 내 눈이 불신에 쌓여 있으면 다 불신으로 보이게 됩니다.  그럴때 좋은 눈이 필요합니다. 긍정적인 눈이 필요합니다. 믿음의 눈이 필요합니다.
역경중에 있을 때에도 더 좋게 하시려는 하나님을 발견해야 합니다.
악한 부모도 자식이 무엇을 달라하면 더 좋은 것으로 줄줄 아는데 하물며 천부께서 구하는 자에게 더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고 주님은 묻고 계십니다.


  내 눈이 성하면 온 몸이 밝을 것이요 눈이 나쁘면 온 몸이 어두울 것이니"라고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눈은 이렇게 중요한 것입니다. 눈이 온 몸의 주인이라는 말씀입니다. 늘 우리의 눈이 분명하고 똑바로 보는 눈이 되도록 해야하겠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우리의 눈이 예수님의 눈길을 닮아감으로 사랑의 눈길, 자비의 눈길, 불쌍히 여기는 눈길이 있어야 하겠습니다.


  어떻게 해야 좋은 눈을 가질 수 있습니다.
주님은 요한계시록에서 라오디게아 교회에 보내는 편지를 보면, 라오디게아 교회의 눈 먼 상태를 지적하면서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는 처방을 내려 주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