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기현의 살림운동
재판관에게 가는 길의 비유(마 5:25-26) 본문
오늘 저녁에 우리가 함께 나눌 예수 그리스도의 비유의 복음은 "재판관에게 가는 길의 비유"가 되겠습니다. 성경은 무려 143번이나 먼저하라는 명령이 있습니다. 예를 든다면 "먼저 평화를 선언하라, 먼저 섬겨라, 먼저 들보를 뺴라, 먼저 대접하라, 먼저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라, 먼저 강한 자를 결박하라, 먼저 안을 깨끗이 하라.........." 그 중에 오늘 본문 말씀은 제사보다도 재판보다도 먼저 해야 할 것은 화해를 시도해보고 화평을 이루는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본문의 재판관에게 가는 길의 비유는 화해를 강조하는 비유입니다. 마태복음서에는 너를 송사하는 자와 함께 길에 있을 때에 "급히 사화하라"고 했고 같은 비유인 누가복음서에는 법관에게 갈 때에 길에서 "화해하기를 힘쓰라"고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화해의 도를 전하셨으며 가르치셨습니다. 그리고 믿는 사람들에게 화해의 도를 행하라고 부탁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대결과 대적과 대립과 전쟁을 권하지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성육신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죄로 인하여 하나님과 원수된 우리들을 하나님과 다시 화목케 하시려고 오신 것입니다. 그의 가르침은 여기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습니다. 그리고 그의 십자가에 달리심도 끝까지 화목케 하시려는 육신을 입으신 하나님의 인내와 사랑과 용서의 모습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비유를 통해서 긴급하게 화해를 할 것을 권면하고 있으며 때 맞은 화해를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5:24에서는 예배보다 실 생활에서 형제와 화해하는 것이 더 우선적이라는 말씀을 하십니다. "먼저 형제와 화목하라"
형제나 이웃간에 다툼이 있을 때는 항상 속히 화해하여 문제를 미연에 방지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속히 화해하지를 못하고 때를 놓치면 점점 화해하기가 힘들어집니다. 그리고 점점 더 오해가 쌓이게 되고 급기야는 원수시까지하게 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래서 화해는 빠를 수록 좋은 것입니다.
사람과 불화하며 시간을 보내지 않기 바랍니다. 땅에서 막히면 하늘도 막힌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막힌 관계가 있다면 빨리 뚫어야 합니다.
성경에 보면 형제라도 화해하지 못함으로 말미암아 결국은 끔찍한 결과를 초래한 경우를 우리는 잘 알 고 있습니다. 가인과 아벨은 형제였습니다. 그러나 둘은 결국 화해하지 못함으로써 형제살육의 최초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에서와 야곱의 원수시는 20년의 긴 세월 동안 두 사람에게 등을 돌린 삶을 살게 했습니다.
야곱이 얍복강에서 밤을 새워 기도한 이튿날 형 에서가 4백명의 군사를 거느니고 왔습니다. 여기서 두 사람이 붙는 다면 결국 두 형제는 전멸하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야곱은 여기서 식구들 앞에 서서 일곱번 땅에 엎드려 절하면서 형에게 다가갔습니다. 그러자 에서가 달려와 그를 맞으며 목을 안고 입을 맞추며 서로 울었습니다. 이것은 평생을 싸우다 20년만에 만나 화해한 형제의 상봉 장면인 것입니다.
사소한 일로 남매가 다투자 그들의 모습을 지켜 보고 있던 어머니가 개입을 하셨습니다. 그러자 누이동생이 소리쳤습니다. "오빠가 먼저 시작했어요"
오빠도 지지 않고 외쳤습니다. "아니에요. 얘가 먼저 싸움을 걸었어요."
어머니는 두 아이의 말을 모두 듣고 나서 차분하게 말을 했습니다.
"누가 먼저 시작했는지는 알고 싶지 않고 단지 내가 알고 싶은 것은 누가 먼저 그만두려하느냐. 누가 먼저 화평케 하는 사람이 되려하느냐야."라고 했다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누가 먼저 싸움을 시작했느냐, 누가 먼저 시비를 걸었느냐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누가 먼저 싸움을 그만두느냐, 누가 먼저 화해를 하느냐가 중요한 것입니다.
조금이라도 나은 사람, 조금이라도 어른스러운 사람, 조금이라도 교양이 있는 사람, 조금이라도 신앙이 좋은 사람이 먼저 싸움을 그만 두고 먼저 화해를 하는 것입니다.
재판관에게 가는 길에서 피차 먼저 생각할 것은 화해를 하는 일입니다. 화해가 이루어지면 재판관에게 갈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들이 헐레벌떡 무슨 문제든지 해결하려고 뛰어가다가도 오늘 이 말씀을 생각해보시기를 바랍니다. 정말로 화해할 수 있는 가능성은 없는 것인가? 정말로 재판을 하고 주먹다짐을 하고 경계를 짓어 사이가 멀어지고 하는 이 방법 밖에 또 다른 방법이 전혀 없는 것인가를 다시 한번 생각해보아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의 오늘 "재판관에게 가는 길의 비유"는 현재 재판정에 가고 있는 길에 있을지라도 할 수만 있으면 속히 화해하는 최상의 것이라는 가르침인 것입니다.
싸움은 피차에 이로울 것이 없습니다. 더욱이 그것이 한 형제일 때나 한 공동체일 때나 한 목표를 항해가는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절대로 이로울게 했습니다. 뿐만아니라 그런 관계가 아닐지라도 근본적으로 서로 함께 살고자 하는 상생의 원리가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사단은 미워하게 하고 증오하게 하고 싸우게 하고 갈라서게 하고 갈데까지 가야 한다고 부추깁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화목케 하십니다. 화목케 하라는 음성이 하나님의 음성입니다. 하나님의 음성에 순종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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