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기현의 살림운동

자라나는 씨의 비유 막(4:26-29) 본문

비유의 복음

자라나는 씨의 비유 막(4:26-29)

유앙겔리온 2010. 8. 20. 21:27

  오늘 저녁에 우리가 함께 나눌 예수 그리스도의 비유의 복음은 "은밀히 나서 자라는 씨의 비유"입니다. 이 비유는 다른 복음서에 없고 유일하게 마가복음에만 있는 독특한 비유입니다. 그리고 이 비유는 신학자들도 잘 주목하지 않았고 설교자들도 사실 이 비유는 잘 설교하지 않았습니다. 씨뿌리는 비유와 겨자씨비유에 치중하다보니 그렇게 된 것입니다. 이 스스로 자라는 비유는 마태도 모르고 누가도 포기하고 신학적 석학들이나 설교자로부터도 주목받지 못했습니다.


  이러한 비유를 오늘 저녁 우리는 주목해 보고자 합니다. 이 비유로부터 오늘 저녁 우리들은 예수님의 어떤 목소리를 들을 수 있을까요? 또한 어떤 음성을 들어야 할까요?

 

  이 자라나는 씨의 비유에서 눈여겨 볼 것은, 하나님 나라는 우리가 노력하는 것과 별 상관없이 진행되고 있는 듯한 인상을 준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생각하기에는, "하나님 나라가 오는 것도 우리의 노력 여하에 달려 있으니 열심히 노력해야 한다"는 말이 나올 것 같았는데, 뜻밖에도 농부가 씨를 뿌려놓고 "자고 깨고 하는 동안에 씨가 자라나는 것과 같다"라고 하신 것입니다. 농사를 지어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얼마나 농사가 힘든지 잘 알고 있을 것입니다. 심은 다음에도 물과 퇴비를 주어야 하고 자라면 김을 매고 잡초도 뽑아 주어야 하는데, 그저 밤에 자고 낮에 깨는 동안에 씨가 자란다고 하는 말은 농사를 지어본 적이 없는 사람이 하는 말 같이 들립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농부의 그런 수고를 모를 리 없습니다. 하지만 여기서 예수님은 그런 수고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보다는 아무리 농부가 수고를 한다 해도 농사는 농부의 그런 수고만으로 되는 것은 아님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농부는 씨가 자랄 수 있도록 도울 수는 있어도 그것을 자라게 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이 본문 말씀의 주제는 생명의 경이로움이며 신비함입니다. 사람이 땅에 씨앗을 뿌리지만 사람 스스로가 그 씨앗이 움트고 자라며 마침내 열매를 맺는 모든 과정을 주관하지는 못합니다. 그러나 어느덧 열매가 익으면 사람은 그 열매를 추수함으로써 결실을 누립니다.

  그래서 주제를 파악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합니다. 이 스스로 자라는 비유가 씨뿌리는 자의 수고를 주제로 하고 있다고 하면 그것을 강조해야 합니다. 그러나 이 비유는 씨를 뿌리는 자에게 중심점이 있는 것이 아니라 "씨와 땅"에 그 중심점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씨의 생명력과 땅의 생명력, 그 신비한 힘을 강조하다 보니, 그것에 비하면 농부가 한 일은 그저 밤에 자고 낮에 깨고 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씀한 것입니다.
  실제적으로 자고 깨는 일만 하는 농부는 한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농부의 역할이란게 자고 깨는 것만 한 것처럼 씨와 땅의 생명력과 신비함에 비하면 별볼일 없는 것이란 의미입니다.

  어떤 사람은 여기 농부를 해석하면서 게으르다느니, 무능하다느니 농부의 자격이 있다느니 없다느니 하는 식으로 해석을 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전혀 거기에 주안점이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첫째로 씨 곧, 하나님의 말씀이 좋은 밭에 뿌려지면 저절로 성장하여 풍성한 열매를 맺게 된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본문에서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나라를 농부가 밭에 뿌린 씨앗이 자체의 생명력으로 성장하는 것을 비유 하고 있습니다.
이 비유는 씨 자체가 가지고 있는 생명력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농부는 씨를 땅에 뿌렸을 뿐 즉시 일상으로 돌아가 "밤낮 자고 깨곤" 합니다. 그러나 그 사이 땅에 떨어진 씨앗은 역동적으로 움직입니다. "씨가 나서 자라"는 것입니다(27절). 농부가 모르는 가운데 씨는 땅에서 자라고 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씨는 복음이며 하나님 나라입니다. 복음이나 하나님 나라는 그 자체 안에 생명력이 있고, 능력이 있습니다.

 

 둘째는 땅이 스스로 자라나게 합니다. 농부는 씨를 뿌리고 나중에 거두기만 합니다.
이 모든 일은 농부가 "밤에 자고 깨고 하는 중에" 일어납니다. 씨를 품은 땅은 농부가 밤에 자고 깨고 하는 중에도 열심히 활동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씨가 저절로 싹을 내고 자라 열매를 맺도록 하는 것은 오직 땅 그 자체입니다. 땅은 스스로 이런 일을 합니다. 바로 이런 땅의 힘, 이 '땅심' 때문에 농사가 가능한 것입니다. 아무리 농부의 수고가 있어도 이런 땅심이 없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고 예수님은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로 이 땅의 힘에서 하나님 나라를 보고 있습니다. 이 땅의 힘에 비하면 우리가 노력하는 것은 그저 밥 먹고 뒷간 가는 일 정도, 밤에 자고 낮에 깨고 하는 정도라는 것입니다.

  땅의 역할이 중요합니다. 하나님이 만드신 땅은 모든 씨앗이 스스로 자라나가게 합니다.
땅이 좋아야 합니다. 땅이 실종되면 안됩니다. 땅이 땅으로서 회복되어야 합니다.
  땅을 살려야 합니다.

  캐나다의 존 캐디라는 선교사는 식인종이 사는 작은 섬으로 복음을 들고 갔습니다.  그는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그들을 돌보고 언어를 습득하여 성경을 번역하고 교육을 시켰습니다.  그가 죽었을 때 그의 기념비에는 이렇게 씌어 있었습니다.  "1848년에 그가 이곳에 처음 상륙 하였을 때에는 이곳에 그리스도인이 한 명도 없었다. 그러나 그가 세상을 떠난 1872년에는 여기 식인종이 한 명도 없다"  즉 그는 섬사람 모두를 그리스도인이 되게 한 것입니다. 복음은 이렇게 변화시키는 능력이 있습니다. 

 

  세번째는 이 비유가 가르치고 있는 것은 성장에는 단계가 있고 그 단계에 따라 자라간다는 사실입니다.
그만큼 과정이 중요합니다. 여기서 어떤 하나의 과정을 건너띄면 제대로 된 식물이 되지 못합니다.  과정을 거쳐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땅이 스스로 열매를 맺되 처음에는 싹이요 다음에는 이삭이요 그 다음에는 이삭에 충실한 곡식이라 고 하셨습니다. 성장 과정이 이처럼 세 가지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첫째는 싹이요, 다음은 이삭이며, 그리고 마지막은 잘 익은 곡식이 그것입니다.

  때때로 이런 단계나 시간들을 앞질러 가고 싶은 욕구나 욕망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앞질러 가려는 그런 것 때문에 문제가 발생하게 됩니다.

  여기서 얻는 교훈은 성장하는 시간의 기다림이 필요하다는 사실입니다. 특히, 성장 과정에서 특징적인 것은 씨가 싹이 나서 잘 익은 곡식이 되기까지의 모든 과정이 씨를 뿌린 사람에 의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에 의해서 이뤄진다는 사실입니다. 씨에서 싹이 나서 이삭과 열매를 맺는 것, 즉 하나님의 나라는 인간의 어떤 노력으로 건설되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만이 행하시는 하나님의 기적임을 강조함을 보게 됩니다.
  그러므로 인간이 하나님을 앞지르러 하지 말고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온전히 신뢰함으로 그분께 맡겨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농부는 밭을 일구고 비옥하게 하며 씨앗을 뿌리고 물을 줍니다. 그러나 그는 씨앗을 싹트게 하고 성장시킬 수는 없습니다. 그 자라는 과정의 신비도 알 수 없습니다.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하나님께서 싹트게 하시고 성장시켜 주실 것을 믿고 노력하여 기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나라의 성장은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의 손안에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지금도 계속 성장하고 있습니다.

  식물이 싹트는 과정 없이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까?
때를 기다리며 선을 행하다가 보면 거두게 됩니다. 
눈물로 우리의 씨앗을 계속해서 뿌려 가꿔갑시다.
시126: 56에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단을 거두리로다." 약속했습니다.
   
  예수는 하나님의 나라야말로 농부의 모든 기대와 노력을 배제한 채 농부가 밤낮 자고 깨고 하는 중에 스스로 자라나는 씨와 같다 말한다.

  네번째 또한 이 비유에서 추수의 시기, 그 때가 강조됨을 볼 수 있습니다. 땅에 떨어진 씨앗이 싹을 내고 열매를 맺어 그 열매가 익으면  반드시 추수의 때가 온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곧 씨가 땅에 떨어져 싹을 내고 열매를 맺듯이 하나님의 나라도 시작이 있으면 그 마지막 완성이 분명히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 추수의 시기를 확정하시는 분은 오직 하나님 한 분이시기에 그 시기를 인간이 조종하거나 계산할 수도 없고 인지할 수도 없는 것입니다. 마지막 때는 우리에게 비밀로 남겨져 있지만 그러나 그 마지막 날이 분명히 도래한다는 사실이 본 비유에서 강조되고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 파종기와 추수기의 중간기에 살고 있습니다. 이 때 요청되는 것은 인내와 끈기와 희망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