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기현의 살림운동
맛을 잃은 소금의 비유(막 9:49~50, 마5:13, 눅14:34~35) 본문
예수께서는 그를 따르는 제자들과 백성들에게 그리고 오늘을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세상을 향한 소금, 세상을 위한 소금,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역할이며 사명이라는 것입니다. 소금은 자기 존재만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은 모르는 사람이 아마도 없을 것입니다. 소금은 자기를 위해 존재하기 보다는 다른 것을 위해 존재하는 대표적인 물질입니다. 소금이 있어야 하는 이유는 자기를 녹여서 다른 것에 영향을 주기 위한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자신의 행복만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행복한 삶을 통하여 다른 이들에게 좋은 영향을 주어야 하는 사명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소금은 그 짠 맛으로 인해서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소금에 짠 맛이 없다고 하면 그것은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것이 되고 말 것입니다. 자기 안에 충분한 짠맛을 지니고 있는 소금이라야 소금의 가치가 있고 소금의 역할과 사명을 감당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소금이라고 함이 그 짜다는 그 맛을 잃으면 그 존재적 의미는 무가치하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자기 안에 짠맛을 지니지 못한 소금은 다른 물질에 어떠한 영향도 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는 왕소금입니다. 예수님은 순수한 짠맛을 가장 잘 간직하신 분이셨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닮은 소금이어야 합니다. 예수로 충만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예수로 충만해야 합니다.
소금은 아주 먼 옛날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인간생활과 아주 밀접한 관련을 갖고 있습니다. 소금은 흔한 것입니다. 특별히 유대땅에서의 소금은 귀한 존재가 아닙니다. 사해라는 소금바다가 있어서 언제나 소금은 풍성했습니다. 특히 유대땅에는 돌과 같은 소금덩어리가 사해바다 근처에서 생산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실재적으로 석염을 사용하는 경우가 있었고 석염은 때때로 소금맛이 다 빠져버려서 짠맛을 잃어버리는 경우가 발생하기도 했었던 것 같습니다.
예수님은 광야와 길바닥에 굴러다니는 맛을 잃어버린 소금덩어리들을 바라보면서 이러한 비유의 말씀을 하셨던 것입니다.
소금이 소금 되려면 짠맛을 간직하고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아니하면 그 양이 아무리 많아도 아무 쓸데 없는 것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기독교인들의 숫자가 아무리 많아도 맛을 잃어버린 소금과 같은 사람들만 우굴거린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짜지 않아도 소금이다" 라는 말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니까 소금이 맛을 잃으면 소금 모양을 갖추고 있어도 이미 그것은 소금이 아니다라는 것입니다.
소금이 맛을 지니고 있을 때는 그 용도가 다양하게 쓰였습니다.
소금의 첫번째 용도는 음식의 간을 조절하는 식용적인 용도입니다. 간이 맞지 않은 입맛을 떨어뜨립니다. 간이 맞지 않는 음식은 토할 것 같습니다. 적당히 간이 맞은 음식은 식욕을 돋구어주며 음식의 품격을 높여주는 것입니다.
두번째로 소금은 방부제의 역할을 합니다.
옛날 주부들은 대부분 해물이나 육류의 보관을 소금에 절여서 보관했습니다. 지금은 냉장고가 있어서 열려서 보관을 하면 썩지 않습니다만 옛날은 냉장고가 없었기 때문에 모든 고기는 일단 보관을 하려면 소금에 절이는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면 최소한 썩는 것을 막을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소금의 역할이 방부제로서 절대적인 것은 아니었습니다만 그래도 그 역할은 중요한 역할이었습니다.
세번째로 소금의 용도는 유대인들에게는 특별한 용도로도 사용이 되었습니다. 제물을 정결케 하는데 사용된 것입니다.
출 30:35 "그것으로 향을 만들되 향 만드는 법대로 만들고 그것에 소금을 쳐서 성결하게 하고"
레 2:13 "네 모든 소제물에 소금을 치라 네 하나님의 언약의 소금을 네 소제에 빼지 못할지니 네 모든 예물에 소금을 드릴지니라"
겔 43:24 "나 여호와 앞에 받들어다가 제사장은 그 위에 소금을 쳐서 나 여호와께 번제로 드릴 것이며"
이처럼 제물에 소금이 들어가는 것은 우리와 하나님과의 언약이 변함없이 영원토록 지속되어야 함을 상징하고 있는데 이렇게 변함없이 영원토록 지속되는 것은 소금을 쳐서 깨끗게 됨으로 가능한 것입니다. 그리고 소금을 처서 화목케 함으로 가능한 것입니다.
네번째로 성경에보면 의학적으로 깨끗게 하는데 사용이 되었습니다
겔 16:4 "너의 난 것을 말하건대 네가 날 때에 네 배꼽줄을 자르지 아니하였고 너를 물로 씻어 정결케 하지 아니하였고 네게 소금을 뿌리지 아니하였고 너를 강보에 싸지도 아니하였나니"
다섯번째로 화목케 하는 것으로 이해합니다. 막 9:50 " 너희 사이에 소금을 두어 화목케 하라"하셨는데 체소거리에 소금을 뿌려두면 기가 살았던 것들이 다 기가 죽고 숨이 죽습니다.
빨빨 살아서 서로 기싸움만 하면 어떻게 화목이 이루어지겠습니까?
소금을 쳐서 절이듯 성품이 절여져야 비로소 화목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이러한 모든 경우는 소금이 제 맛을 간직하고 있을 때 가능한 것입니다. 그러나 소금이 제 맛을 잃어버리게 되면 이것처럼 천덕구리가 또 없는 것입니다. 짐만 될 뿐이요, 사람의 발에 밟히거나 사람과 짐승을 걸려 넘어지게 하는 것이 되었던 것입니다.
소금은 맛이 있음으로 유용한 것입니다. 주님은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들에게는 세상이 갖지 못한 맛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의 영과 육이 가지고 있지 못한 맛을 지니고 있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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