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기현의 살림운동

씨뿌리는 비유(마13:1-9, 막4:1-9, 눅 8:4-8) 본문

비유의 복음

씨뿌리는 비유(마13:1-9, 막4:1-9, 눅 8:4-8)

유앙겔리온 2010. 8. 7. 18:22

  예수 그리스도는 제자들과 그리고 그를 따르는 무리들에게 말씀을 가르치실 때 대부분을 비유로 가르치셨습니다. 거기에는 알기 쉽게 말씀하시려는 의도가 깊게 깔려 있습니다. 그리고 비유로라야만 영원성과 무궁성을 가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받지 않고 전달될 수 있는 방법으로 가르치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들이 이정도라도 남아 있어서 우리에게 신앙의 도움을 주고 있는 것은 대부분의 말씀을 비유로 하셨기 때문입니다. 성서학자들은 예수님의 공생애를 1년에서 3년반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에 관한 말씀과 그의 복음이 기록된 것은 30일 분량 정도 밖에 안된다는 것이 정설입니다. 그래서 사도요한은 그가 기록한 복음서에서 요21:25 "예수께서 행하신 일이 이외에도 많으니 만일 낱낱이 기록된다면 이 세상이라도 이 기록된 책을 두기에 부족할 줄 아노라"했던 것입니다.

 

  비유는 곧 이야기와 속담과 격언들과 체험담인 것입니다. 거기에는 삶의 현장과 현실이 담겨져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비유들은 아주 오래전부터 하나의 법칙으로, 원리로 모두가 수긍하고 부정할 수 없는 이유 있는 경험적 지식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가 가르치시고자 한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비유라는 형식을 빌려 곧잘 말씀하신 것입니다.

 

  오늘부터 수요일저녁기도회 시간을 통하여 성경의 비유들을 강해할 텐데 먼저 예수님이 말씀하신 비유를 함께 나누기로 하겠습니다. 먼저 마태복음과 마가복음과 누가복음 모두에 공통적으로 나오는 비유부터 시작해서 각각의 복음서에 나오는 비유들을 차례로 살펴보고자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비유라고 생각되는 그러면서도 복음서에 없는 비유들도 발굴하여 소개할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램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허락이 된다면 구약성경과 신약의 서신서들에 나오는 비유까지 낱낱이 살펴볼 계획입니다.

 

  그러면 맨 처음으로 씨뿌리는 자의 비유를 살펴보겠습니다(마 13:1-9, 막 4:1-9, 눅 8:4-8).
  사실 이 비유는 씨뿌리는 자의 비유라고 제목을 잡으면 약간의 문제가 발생할 수가 있습니다. 오히려 씨를 받아들이는 밭의 비유라고 해야 옳을 것입니다. 제목에 대한 시시비비를 따지는 것은 그만한 이유가 있기 때입니다. 제목은 그 비유의 내용을 "이러 이러한 내용일 것이다"하고 미리 예상하게 하는 효과와 역할을 하기 때문에 제목을 잘 잡아야 합니다. 신문 기사를 보면 제목을 어떻게 뽑아내느냐에 따라서 강조점이 달라지고 희비가 엇갈리게 되는 것입니다. 언론이 어떤 집단을 편들때 꼭 그런식으로 합니다. 언론이 여당을 편들고 싶으면 여당에 유리하도록 큰제목을 돌출하여 잡아내서 기사를 쓰는 것입니다. 그리고 야당을 편들고 싶은 때에는 야당에 이롭도록 제목을 이끌어내서 큰 글자로 인쇄를 해버리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전혀 아닌 것은 아니니까? 다른 이들은 할말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피해를 볼 집단은 피해를 보고 이득을 챙길 집단을 이득을 챙기게 되는 것입니다.

 

  씨뿌리는 자의 비유라고 이름을 붙이면 씨를 뿌리는 자가 누구인가? 그 씨를 뿌리는 자가 얼마나 열심히 뿌리는가? 어떤 씨앗을 뿌리는가? 등의 문제가 다루어져야 합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 나오는 이 비유는 사실 그런 문제는 그렇게 중요하게 다루어지지 않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씨를 뿌리는 자는 주님 자신이며 그리고 주님이 파송하시는 자들입니다. 그리고 씨는 주님의 말씀, 즉 복음입니다. 여기에는 별문제가 없음을 전제로 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비유는 씨의 운명은 그 씨가 어디에 떨어지느냐에 달려 있다는 것을 알게 하려는 것입니다. 아무리 좋은 씨앗도 나쁜 밭에 떨어지면 그 결과는 뻔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전하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 곧 말씀의 씨앗은 결코 품질이 낮은 것이 아닙니다. 이것에는 전혀 문제가 없다는 전제를 가지고서 출발해야 합니다. 문제가 있다면 그 말씀을 듣는 마음의 밭이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에 성서의 땅인 팔레스틴에서 씨뿌리는 방법은 두 가지였습니다. 하나는 나귀 등에 씨앗을 담은 자루를   얹어놓고 군데 군데 구멍을 뚫어둡니다. 그리고 농부가 나귀를 끌고다니면 자연스럽게 씨가 뿌려지게 됩니다. 이 방법은 넓은 땅에 씨를 뿌리는 방법입니다. 그리고 그리 넓지 않는 밭에는 농부가 바구니 같은 것에 씨를 담아가지고 직접 밭에 씨를 흩어뿌리는 방법입니다. 오늘 주님이 하신 비유의 말씀은 전자의 씨뿌리는 방법이 아니고 두번째 방법인 농부가 씨를 흩어뿌리는 방법의 이야기를 하고 계신 것입니다.

 

  씨가 떨어지는 밭을 4가지로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길가 밭, 돌짝밭, 가시떨기 밭, 좋은 밭 등입니다.
  예수님 당시에나 우리의 시골 풍경이나 거의 흡사한 면이 바로 이 밭의 모습입니다. 넓은 땅이 아닌 주로 산간이나 마을 어귀에 있는 밭들은 조금 넓은 밭이 있고 밭 곁에는 농부들이 다닐 수 있는 길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곳에는 밭곁에는 밭에서 나오는 돌무더기 같은 것을 쌓아놓은 버려진 약간의 땅이 있습니다.  그리고 농부가 밭을 더 개간하지 못해서 버려진 땅이 있습니다. 구릉지나 비탈이나 어쩧든 농부의 손이 미치지 않는 땅이 있습니다. 그곳에는 가시같은 것이 자라고 있습니다.

 

  농부가 일부러 길가에나 돌짝이 쌓여있는 돌무더기에나 가시밭에 씨를 뿌린 것이 아닙니다. 밭 가운데서 농부가 씨앗을 흩어뿌릴 때에 이곳 지곳에도 씨앗이 떨어지게 되는 것이지요. 밭의 순서는 씨앗이 떨어진 순서도 아니고 의도가 있는 순서도 아닙니다. 동시에 떨어지기도 하고 시차를 두고 떨어지기도 하겠지요. 단지 혜택을 입은 씨앗은 좋은 밭에 떨어진 씨앗뿐입니다. 왜냐하면 좋은 땅에 떨어진 씨앗만이 농부가 흙을 덮어씌워주어서 잘 자라게 하기 때문입니다.

 

  씨앗이 뿌려진 밭에는 동일하게 새가 날아옵니다. 길가밭에만 새가 날아오는 것이 아닙니다. 돌짝밭에도 가시떨기밭에도 옥토에도 새들은 날아 오는 것입니다.  그리고 햇빛이나 잡초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길가밭은 새들에게 쪼아먹혀버리고, 돌짝밭에 떨어진 씨앗은 새싹을 내나 그냥 말라버리고, 가시떨기 밭에 떨어진 씨앗은 새싹을 내나 곧 숨이막혀버리고 맙니다. 그러나 좋은 밭에 떨어진 씨앗은 이러한 많은 시련과 시험과 어려움에 고비를 만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곡식을 내는 것입니다. 곡식을 내되 30배 60배 100배의 열매를 내는 것입니다.

 

  이 뿌리는 비유 바로 다음에 예수님께서는 이 비유를 해석해주시는 친절을 베풀어주십니다. 마 13:19~23절을 보세요.
마13:19 "아무나 천국 말씀을 듣고 깨닫지 못할 때는 악한 자가 와서 그 마음에 뿌려진 것을 빼앗나니 이는 곧 길 가에 뿌려진 자요"
마13:20 ~21 "돌밭에 뿌려졌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즉시 기쁨으로 받되 그 속에 뿌리가 없어 잠시 견디다가 말씀으로 말미암아 환난이나 박해가 일어날 때에는 곧 넘어지는 자요"
마13:22 "가시 떨기에 뿌려졌다는 것은 말씀을 들으나 세상의 염려와 재물의 유혹에 말씀이 막혀 결실하지 못하는 자요"
마13:23 좋은 땅에 뿌려졌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깨닫는 자니 결실하여 어떤 것은 백 배, 어떤 것은 육십 배, 어떤 것은 삼십 배가 되느니라 하시더라

 

  그러므로 이 비유는 예수님이 하신 말씀을 듣는 청중들의 다양한 마음밭과 반응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그리고 깨닫는 마음, 이해하는 마음, 알아듣는 마음을 옥토 즉 좋은 밭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여러분의 마음 밭이 옥토와 같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