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기현의 살림운동
넉넉히 이기는 자 본문
우리는 전쟁 없는 세상을 꿈꾸고 그것을 위해서 기도하고 노력해야 한다. 그러나 전쟁은 없으면 더 없이 좋은 일이지만 전쟁은 다른 것과는 달라서 결코 시작되면 져서는 안 될 것이다. 지는 것은 때때로 이기는 것일 수도 있다는 말은 전쟁에서는 합당한 말이 아니다. 지는 것은 때때로 분통이 터지고 괴로운 일이지만 특히 전쟁에 지는 것은 정말 못당할 노릇이다. 패전국의 백성은 자유를 잃고 수치를 당하며 종노릇을 하게 된다. 그러므로 전쟁에서는 반드시 이기는 자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신앙생활속에는 영적 전쟁이 있다. 이것은 혈육과 같이 때때로는 보이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보이는 전쟁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전쟁이다. 보이지 않기 때문에 무시되기도 한다. 하지만 영적전쟁에서 우리가 지면 우리는 마귀의 종이 된다. 참 자유를 잃어버리게 된다.
우리는 많은 절박한 상황을 만난다. 그럴 때마나 내가 지면 어떻게 하나 걱정을 하게 된다. 그러나 우리를 위하시고 사랑하시는 주님이 함께 계시는 한 우리는 이것들을 이길 힘이 있다. 우리는 결코 지는 자가 되지 아니하고 이기는 승리자가 될 것이다. 우리의 승리는 겨우 견디어 내는 승리가 아니라 넉넉히 이기는 차고 넘치는 승리가 될 것이다.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려 하시기 위함이라고 하셨다. 그러므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어떤 경우라도 결코 지는 것을 상상하거나 이길 수 있다는 가능성을 포기해서는 아니 된다.
우리에게는 환난의 문제가 있다. 앞길을 헤쳐 나간다는 것이 아득하게 느껴지고 불안하고 걱정이 태산같이 우리 앞을 막아서기도 한다. 거기다가 대적마귀는 우는 사자와 같이 삼킬 자를 두루 찾고 있다. 그러나 기억할 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신다는 사실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는 그 사랑의 줄이 어떤 경우라도 끊어지지 아니하고 우리와 함께 하며 우리를 붙잡아 주실 것이다. 그래서 겨우 이기는 정도가 아니라 넉넉히 이기게 하실 것이다. 우리는 문제만을 바라보아서는 안 된다. 역사만을 바라보아서는 안 된다. 풍랑만 바라보아서는 안 된다. 문제 뒤에 서 계시는 하나님, 역사 뒤에 서 게신 하나님, 풍랑 뒤에 서 계시면서 우리를 위하시고 우리를 도우시고 우리를 이기게 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한다.
참 여처구니 없는 사건이지만 코털 하나 잘못 뽑아 파상풍에 걸려 죽은 사람도 이 세상에는 있다. 세상에 코털 뽑다가 죽은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그런데 있더라는 것이다. 환난의 크고 적음이나 그 심각성이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이 보호해 주셔야 한다. 시편 3:6절에 다윗은 이렇게 고백한다. "천만인이 나를 둘러치려 하여도 나는 두려워 하지 아니하리이다"했다. 왜 그러한가?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는데 누가 우리의 대적이 되겠는가? 하나님은 눈물의 선지자인 예레레미야에게 사명을 주시면서 분명하게 약속하셨다. "내가 너를 견고한 성읍, 쇠말뚝, 놋성벽이 되게 하리라. 누가 너를 이길 수 있겠느냐? 내가 너와 함께 해주며 내가 너를 구원하여 주리라"했다(렘 1:18-19)
여러 모양으로 우리의 대적 마귀는 역사한다. 육체의 질병으로도, 생활의 가시와 영겅퀴로도, 죄악으로도 우는 사자처럼 우리를 삼켜 실족케 하기 위해서 마귀는 역사하고 있다. 그러나 성경의 말씀은 마귀가 아무리 우리를 삼킬려고 해도 마귀는 우리를 결코 이길 수 없다. 승리는 우리가 할 것이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승리하셨기 때문이며 승리하신 주가 우리를 위하고 계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아무리 태산같은 문제가 온다고 할지라도 우리는 두려워하지 않을 것이다. 아무리 소낙비처럼 쏟아져오고 홍수처럼 밀려오는 환난이 있을지라도 우리는 무서워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주가 우리를 위하고 계시기 때문이다. 우리를 위하시는 그 사랑이 끊어지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를 위해서 하나님의 우편에 계시면서 기도하시는 주님께서 우리의 생애가 다하도록까지, 이 세상 끝날까지 그 기도를 쉬지않으실 것을 믿기 때문이다. 세상을 이기었노라 하신 주님께서 우리를 넉넉히 이기게 하실 줄 믿기 때문이다.
이제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넉넉히 이기는 삶을 살아갈뿐만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말미암아 이김이 있는 삶을 전하는 메신저들이 되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