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기현의 살림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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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림운동

물을 물로 보지 않는 지혜

유앙겔리온 2002. 5. 21. 22:26

올해는 여느 해와는 달리 봄 가뭄을 면하게 되었다. 작년만 해도 100년 만에 있는 가뭄이라던가. 농사를 짓는 농민이 물이 없어서 모내기를 할 수 없음을 인하여 비관하다 농약을 마시고 죽는 일까지 벌어진 상황이었다. 그런데 올해는 농민들 입에서 제발 비가 그만 왔으면 하는 소리를 듣게 되니 천만 다행이다. 그렇지만 늘 아쉬운 것은 가뭄이 심할 때나 물이 넘쳐 홍수가 날 때나 그 때만 요란스럽지 별다른 개선책이나 문제해결 노력이 별로 없다는 것이다. 가뭄이 들면 양수기선금 걷고 홍수가 나면 수재의연금 걷는 것이 고작일 때가 많다. 물 때문에 위기를 만났을 때 물에 대해서 시각을 달리하고 사고를 달리하고 가치를 새롭게 할 수 있는 기회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우리가 늘 사용하는 표현들 중에 "날 물로 보지마", "돈을 물 쓰듯 한다", "물 먹인다", "물봉" 등등의 표현들이 의미하고 있는 것처럼 이전시대에서는 물의 이미지는 가치 없는 것, 별로 생산성이나 경제성이 없는 것쯤으로 치부되어 왔다. 그러나 지금은 어떠한가 그리고 앞으로는 어떠할 것인가? 물은 이미 에너지원인 석유값과 동일하고 또 그보다 더 비싼 가치를 지니게 되었다. 옛날에 치렀던 오일전쟁대신에 이젠 물전쟁을 치루어야 한다. 오일을 지키는 사람들을 세우는 것처럼 이제는 물을 지키는 사람들을 세워야 한다. 실제적으로 물이 부족한 국가들에는 물경찰들이 존재하고 있다. 대표적으로 미국의 캘리포니아주에서는 물경찰이 있어 물 사용을 관리하며 지도하며 감시한다. 그들은 어느 사건 사고를 담당하고 있는 경찰들과 다름이 없다. 이러한 물 관리 노력을 통하여 가장 쓸모없는 땅을 가장 비옥한 땅으로 만들어서 그 생산성과 경제적 가치를 최고로 높이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물 부족 국가’로 분류된 이스라엘은 ‘물은 곧 생존’ 자체라는 차원에서 정부와 국민이 힘을 모아 물 부족 사태를 해결하고 있음을 타산지석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

우리는 지금 어떠한가? 다른 것도 후진성을 면치못하고 있지만 치수정책은 더욱 그렇다. 더욱이 정책입안자들과 환경론자들, 그리고 물을 관리하는 자와 소비하는 자들 사이에 자신들의 이익과 생각만을 앞세워서 근시안적인 접근을 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 곳곳에 대립과 대적의 논리만 있어 문제성이 심각하다. 정책입안자들과 환경론자들, 그리고 물을 관리하는 자와 소비하는 자들 사이에 흑백논리나 이분법적인 사고로 무조건 되니 안 되니 할 것이 아니라 우리의 민족 공동체가, 아니 더 나아가서는 지구가 생존의 수레바퀴를 연장하고 계속 지탱할 수 있는가에 모아져야 한다.

우리는 지금까지 물은 그저 우리 겉에 늘 있는 것이며 계속해서 앞으로도 그렇게 흘러주리라 생각을 하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물은 오일보다 더 소중한 것이며 고속도로보다도 수로가 더 중요한 것임을 우리 인류가 새롭게 인식을 해야 할 때가 된 것이다. 오일이나 고속도로가 없으면 불편할 뿐이겠지만 물과 수로가 없으면 생명이 고갈당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보다 근원적인 것이 물인 것이다.
UN은 1993년에 벌써 우리나라를 ‘물 부족 국가’로 분류한 바 있다. 국민 1인당 연간 사용가능한 물의 양이 1,000t 미만인 국가는 ‘물 기근 국가’에 해당된다. 이대로 물을 물 쓰듯 쓰면 물기근 국가로 전락할 수도 있을 것이며 멀지 않아 물 재해로 엄청난 고통을 겪을 것이 뻔하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지금 세계적으로 물이 원인이 되어서 죽는 사람이 매년 500만명이나 된다고 하니 놀랄 일이 아닐 수 없다. 즉 물이 부족해서나 좋지 않는 물 때문에 발생한 사망자의 수가 그렇다는 이야기인데 정말 심각한 세계적 생존의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사고의 전환이 있어야 하고 페러다임이 바뀌어야 한다. 인류의 문명은 물과 함께 시작되었고 물과 함께 발전해 왔다. 물이 없는 번영은 불가능한 것이다. 물은 생명의 젖줄기이며 발전과 번영과 행복의 젖줄기인 것이다. 이제 물을 물로 보지 않는 사고의 전환을 해야 하고 페러다임을 전환해야 할 때가 된 것이다.

물은 인류에게 있어서 가장 보배로운 가치를 지닌 신의 선물이며 보화인 것이다. 이것은 다른 것으로 대체할 수 없는 자원이며 인간에게 가장 기본적이면서도 최상의 삶을 누리도록 하는 재료인 것이다. 사람과 물은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다. 사람의 육체를 구성하는 요소 중에 적어도 70-80%이상은 물로 되어 있다. 그러므로 물이 부족하면 견딜 수가 없는 것이다. 사람은 무엇보다도 물이 없이는 살수가 없다. 사람뿐만 아니라 모든 생물은 물 없이는 살 수가 없는 것이다. 물은 제가 흘러가면서 만나는 것들마다 모두 이롭게 한다. 문명과 문화의 발상지는 모두가 다 큰물이 흐르는 강을 중심으로 하고 있다. 물이 부족하면 문명과 문화가 발달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철학자인 탈레스라는 사람은 만물의 근원이 '물'이라고 까지 말한 것이다.

물에서 복음적인 의미를 한번 살펴보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 성서에 보면 최초의 문명의 발상지인 에덴은 비손과 기혼과 힛데겔과 유브라데라는 네 강이 흐르는 곳이었다. 그리고 이 에덴에서 쫓겨난 백성들은 그 때부터 물을 찾아나서게 되었고 물 때문에 전쟁도 하고 물 때문에 고생도 하게 되었다. 특히 광야생활을 하던 이스라엘백성들의 다툼과 원망 가운데 물 때문에 생긴 횟수가 가장 많다. 광야에서 마실 물이 없어서 원망하고 불평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하여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통하여 반석을 깨뜨려서 생수를 솟아나게 하여 마시게 해주셨다. 그리고 쓴물이어서 마실 수 없는 마라의 물을 달게 만들어 마실 수 있도록 해주셨다. 에스겔서에 보면 단에서부터 흘러내리는 생수의 강으로 말미암아 죽었던 바닷물과 생물들이 소생하게 되었으며 번영과 축복의 역사가 일어나게 되었으며 메마른 땅, 죽은 땅이 사람 살만한 곳이 되었다. 생수가 흐르는 곳에는 치유와 살림과 번영과 축복의 역사가 일어났다. 예수께서는 요한복음 4장에서 자신을 생수의 원천으로 이야기하셨다. 황량한 사막에서 조그마한 샘물에 그들의 삶과 미래를 걸고 있는 예수시대의 팔레스틴 사람들에게는 물이 어떤 물질보다 가치가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우물 때문에 분쟁을 겪어야 하고 우물 때문에 전쟁을 해야 했다. 그만큼 그들에게 있어서 물은 곧 생존권 자체를 의미했던 것이다. 물은 그들에게 생명 그 자체였을 것이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자신이 영원한 구원의 우물임을 말씀하신 것이다. 그리고 예수님을 믿는 자는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요7:37,38)고 하셨던 것이다. 그리고 원하는 자는 값없이 생수를 받으라(계 22:17)고 하셨다. 물이 사람들에게 깨끗한 몸을 내주고 더러운 몸이 되어 강으로 바다로 가는 것처럼 예수께서는 죄없으신 몸을 우리에게 주시고 더러운 죄짐을 짊어지신 몸이 되어서 십자가를 지셨다. 과연 우리 주님이 자신을 생수에 비유한 뜻이 무엇인가 이제 알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