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기현의 살림운동
성서를 어떻게 하면 올바로 이해할 수 있을까? 본문
기독교인이라면 한번쯤 진지하게 성서를 어떻게 하면 올바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인가를 생각지 않는 이는 없을 것이다. 그리고 성서이해의 첫 번째 관문인 “하나님의 영감으로 된 책”이란 의미가 어떤 의미인가를 생각해 보지 않는 사람도 없을 것이다. “하나님의 영감”이란 말을 두고 해석이 분분하거니와 이것을 여기서 논하기에는 부적절하다고 생각함으로 생략하기로 한다. 그러나 “영감”이란 말을 어떻게 해석하고 이해하든지 간에 성서는 역사의 한 순간에 특정한 문화권에서 살았던 특정한 성서기자들에 의해서 쓰여진 역사적인 산물이란 것은 그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서를 올바로 이해하려면 적어도 양피지나 파피루스에 일점일획 철필로 글을 쓰던 사람들의 사고방식을 조금이라도 알아야 하며 이해해야 한다. 성서의 세계와 우리의 세계는 다르다는 사실을 망각해서는 안 된다. 그래야 오늘의 우리가 성서를 이해할 때 주관적으로 왜곡하는 것을 피할 수 있을 것이다.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의 주관적인 해석으로는 고대 성서기자들을 통해 드러난 하나님의 계시의 온전한 뜻을 분명하게 파악할 수 없는 위험성을 안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성서를 바르게 이해하려면 상황의 포로들로 부터 벗어나야 한다는 것이다. 성서를 읽을 때 모든 사람들은 자기 상황하에서 성서를 읽게 되고 적용하게 된다. 각자가 처한 삶의 상황에 따라 성서 말씀에 대한 이해 방식도 달라 질 수 있다는 사실을 거의 자각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성서를 바르게 이해하려면 털어내고, 벗어버려야하고 깨뜨려버려야 할 것들이 있다. 그렇지 않고 성경을 무턱대고 읽거나 해석하거나 대하면 "또 그 모든 편지에도 이런 일에 관하여 말하였으되 그 중에 알기 어려운 것이 더러 있으니 무식한 자들과 굳세지 못한자들이 다른 성경과 같이 그것도 억지로 풀다가 스스로 멸망에 이르느니라"(벧후 3:16)했다.
성서는 하늘에서 어느 날 갑작스럽게 뚝 떨어져 내려온 하나님의 직접적인 계시인가? 성서는 한솔로 짠 단일한 작품인가? 그렇지 않다는 것이 사실이다. 적어도 40명이 넘는 성서기자들에 의해서 구약은 1000년의 저작기간을 거쳤으며, 신약은 1세기의 저작기간을 가지고 있는 역사적인 산물인 것이다. 이런 오랜 세월 동안 성서는 기록, 정정, 편집의 과정을 거쳐서 이루어진 복합적인 것이다. 신구약 성서는 적어도 3000년에서 2000년의 세월이 흐른 역사적인 산물이다. 이는 곧 성서가 기록된 것이 그만큼 많은 세월이 흘렀다는 것이다. 그리고는 각 교단과 교회와 신학과 신경과 신조의 전승에 의존하여 성서를 읽게 된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성서를 정확하게 읽으려면 긴 세월 동안 쌓아놓은 먼지를 털어내야 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학교를 다니며 자란 대다수의 그리스도인들은 수십권으로 이루어진 성서를 한솔로 짠 통옷처럼 생각하고 읽어왔고 대하여 왔다. 그리고 성서기자들은 성령의 감동을 받아 직접 말씀을 받아썼다고 생각을 해왔다. 성서는 전체적으로 보더라도 서로 일치 하지 않는 여러 권의 책들로 이루어져 있을 뿐만 아니라 각각의 낱권 안에서도 도저히 융합될 수 없는 상반된 이야기들이 수록되어 있기도 하다. 이러한 것은 성서가 어떻게 만들어졌는가를 여실히 보여주는 일례에 불과한 것임을 밝혀주고 있다. 성서는 결코 그렇게 단순한 책이 아니다. 성서는 말할 수 없이 깊고 복잡한 문학적이고 신학적이고 신앙적인 작품이다. 이것은 우리 21세기를 살아가는 현대문명의 색안경을 끼고는 온전히 이해할 수 없는 기원전후의 작품이라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성서를 읽거나 연구하거나 성서로부터 하나님의 음성과 계시를 받고자 하는 현대인들은 성서가 저작된 시점으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성서에 덮이고 끼인 먼지를 떨어내고 고대인들의 시점으로 되돌아가서 성서를 읽어낼 때 바르게 성서의 계시를 발견하게 된다. 저작된 그 때부터 1년에 1mm정도의 먼지만 끼이고 쌓였다고해도 지금은 태산처럼 높은 산이 되었을 것이다.
21세기를 사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성서를 의미 있게 읽을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과학의 발달로 교회는 윤리의 중요성과 의미에 대해 전에 없던 새로운 도전을 받고 있으며, 성서저작시대에는 생각지도 못했던 일들이 발생하고 있다. 이러한 새로운 도전에 응하기 위해서는 성서구절이나 들먹거리며 방패로 삼는 자세로는 어림도 없다. 그리고 전통적으로 성서를 읽고 해석하는 방법을 무턱대고 강요할 수도 없다. 역사의 어떤 특정한 시기에는 의미 있는 표현 방법이 오랜 기간 동안 변하지 않은채 고정되어 있으면 결과적으로 그 계시 내용을 크게 오해하게 만들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생명력 있는 신앙을 간직하려면 그 신앙을 표현하는 방법이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에 적합해야 한다. 새로운 기술이 등장할 때마다 무조건 받아들이거나 박수하는 것이 온당하지 못한 것처럼 무조건 거부하고 부정하는 것도 신앙인의 적절한 자세라고 할 수 없으며, 해결책은 성서와 전승과 교회와의 책임감 있고 조심스러운 대화를 통해 힘겹게 찾아내는 수밖에 없다. 그리하여 역사를 통해 자신을 점진적으로 계시하시는 하나님의 역사를 이해해야 할 것이다.
성서를 읽고 그 성서를 올바로 이해하고자 하는 사람이라면 성서에 대해서 열려진 마음이 있어야 하며 오늘날의 성서신학의 학문적인 성과를 인정할 수 있는 지적 능력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지금까지 성서에 대해 가지고 있던 고정관념을 벗어던질 수 있는 자세가 아니면, 그리고 진실의 실체를 보기보다는 전통과 인간의 유전에 갇혀있기를 원한다면 이 글을 읽지 말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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