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기현의 살림운동
주의 크신 이름을 위하여 어떻게 하시려 하나이까?(수 7:6~12) 본문
주의 크신 이름을 위하여 어떻게 하시려 하나이까?
수 7:6~12
수7:6 여호수아가 옷을 찢고 이스라엘 장로들과 함께 여호와의 궤 앞에서 땅에 엎드려 머리에 티끌을 뒤집어쓰고 저물도록 있다가
수7:7 이르되 슬프도소이다 주 여호와여 어찌하여 이 백성을 인도하여 요단을 건너게 하시고 우리를 아모리 사람의 손에 넘겨 멸망시키려 하셨나이까 우리가 요단 저쪽을 만족하게 여겨 거주하였더면 좋을 뻔하였나이다
수7:8 주여 이스라엘이 그의 원수들 앞에서 돌아섰으니 내가 무슨 말을 하오리이까
수7:9 가나안 사람과 이 땅의 모든 사람들이 듣고 우리를 둘러싸고 우리 이름을 세상에서 끊으리니 주의 크신 이름을 위하여 어떻게 하시려 하나이까 하니
수7:10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일어나라 어찌하여 이렇게 엎드렸느냐
수7:11 이스라엘이 범죄하여 내가 그들에게 명령한 나의 언약을 어겼으며 또한 그들이 온전히 바친 물건을 가져가고 도둑질하며 속이고 그것을 그들의 물건들 가운데에 두었느니라
수7:12 그러므로 이스라엘 자손들이 그들의 원수 앞에 능히 맞서지 못하고 그 앞에서 돌아섰나니 이는 그들도 온전히 바친 것이 됨이라 그 온전히 바친 물건을 너희 중에서 멸하지 아니하면 내가 다시는 너희와 함께 있지 아니하리라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가기 위한 출애굽한 공동체가 가나안 땅 첫번째 성읍이며 대성읍인 여리고성을 하나님의 은혜로 쉽게 정복했습니다. 교두보를 마련한 것입니다. 이 일로 이스라엘 백성들의 사기는 높아졌고, 그와는 반대로 가나안 땅의 온 족속들의 마음은 물과 같이 녹아내렸습니다.
여리고 성을 정복하고 승리의 공동체가 된 이스라엘은 내친김에 작은 성읍에 불과했던 아이성을 사소한 전쟁으로 취급하고 자신만만하게 소수의 군대만 파견하여 취하고자 했습니다. 여리고 성처럼 모든 백성들을 보내어 싸울 필요가 없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정탐꾼들을 보냈으나 정탐꾼들도 듣고싶은 말만 했고, 듣고 싶은 말을 하니 백성들도 좋아했고 여호수아도 좋았습니다. 그래서 제대로 숙고의 시간도 없이 흥분을 가라안치지 못하고 전쟁에 돌입했습니다. 그러나 기대와는 다르게 희생자만 내고 아이성 정복에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이로 말미암아 수 7:5절에 보면 "백성들의 마음이 녹아 물같이 되고 말았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녹다(마싸쓰)'는 말은 약해지다, 기절하다, 두려워하다는 의미입니다. 아주 절망적인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여호수아는 "사시는 하나님이 가나안 족속을 너희 앞에서 정녕히 쫓아내실 것이다"(3:10)라고 백성들을 확신시켰습니다. 그래서 큰 성 여리고도 두려워하지 않고 정복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아이성의 실패로 말미암아 백성들이 마음이 녹아 물같이 되고 말았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이 녹아 물과같이 되었을 때, 나타나는 결과를 여호수아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습니다. 이것 때문에 모세와 아론이 겪었던 일들을 곁에서 지켜보았던 여호수아였습니다.
모세를 이어 이스라엘의 지도자가 된 여호수아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이 녹아 물과 같이 되었을 때에, 이 일을 놓고 어떻게 했는가를 오늘 말씀은 보여주고 있습니다. 여호수아는 "옷을 찢고 이스라엘 장로들과 함께 여호와의 궤 앞에서 땅에 엎드려 머리에 티끌을 뒤집어 쓰고 저물도록 있다가 드디어 입을 열어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다시 말해서 그 슬프고 고통스러운 원인을 하나님께 여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 이 실패는 어찌된 일입니까?" "주여, 이스라엘이 그의 원수들 앞에서 돌아섰으니 내가 무슨 말을 하오리이까?" "가나안 사람과 이 땅의 모든 사람들이 듣고 우리를 둘러싸고 우리 이름을 세상에서 끊으리니 주의 크신 이름을 위하여 어떻게 하시려 하나이까?"
여호수아가 아이성의 실패 앞에서 이토록 괴로워하며 슬픔에 잠겨 하나님을 향하여 질문하고 있는 무엇 때문이었을까요? 전쟁을 하다보면 이기도 하고 지기도 하는 것 아닙니까? 아이성은 작은 성읍이므로 지난번에 얏잡아보다 실패했으니 다시 큰 군대를 편성헤서 전쟁하면 될 것이 아니겠습니까? 실패한 전쟁의 책임을 누군가에게 묻고 다시 하면 되는 것이 전쟁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여호수아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 앞에 엎드렸습니다. 여호수아는 하나님 앞에 날이 저물도록 기도했습니다. 이렇게 한 것은 아이성의 실패가 단순한 군대의 수효나 군의 작전의 차원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여호수아가 아이성의 실패를 겪고나서야 영적으로 짚이는데가 있었고 막히는 데가 있음을 깨닫았던 것입니다.
자신들은 여리고성 전투의 승리에 도취 되어서 하나님을 의지하는 시간이나 하나님께 기도할 타이밍을 놓쳤습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실 타이밍을 잃었습니다. 전쟁준비만 열심히 했습니다. 그러다가 하나님의 군대가 하나님의 진노를 사고 있었는데도 그것을 눈치 채지 못했습니다. 이 아이성의 싸움은 아간의 범죄로 인하여 이미 지고 들어가는 싸움이었던 것입니다. 아이성을 진격했던 3000명의 군사들은 싸워보지도 못하고 겁을 먹고 도망하게 되었고 36명의 사망자도 싸우다 죽은 자들이 아니라 후퇴하다가 죽은 군사들이었습니다. 하나님께 범죄한 채로는 그 어떤 인간적인 준비도 하나님 앞에서 허사임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출애굽으로부터 시작해서 지금까지 하나님께서는 편팔과 강한 손으로 이스라엘 백성들과 함께 하심으로 인해서 그 근동 모든 나라와 민족들이 여호와의 크신 이름으로 말미암아서 이스라엘을 두려워하고 무서워했습니다. 그런데 아이성의 실패 이후에 그 근동 나라와 민족들이 그런 것에서 벗어나게 되어 이제는 이스라엘과 싸울만 하다고 생각하게 될까 하는 염려에 사로잡히게 된 것입니다. 기껏 여리고 전투를 통해서 그 근동의 나라와 민족들의 마음이 녹아 물과 같이 되게 해놓았는데 이제 오히려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이 녹아 물과 같이 되고 가나안 온 족속들의 마음이 담대해질까 걱정한 것입니다.
전쟁은 무기나 군대의 수로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전체적인 분위기가 중요합니다. 전투에 임하는 군인들의 정신과 마음이 중요합니다. 얼마전에 미국이 아프카니스탄 전쟁을 끝내고 군대를 철수했습니다. 미국의 심장부에서 일어난 9,11테러(2001년)로 인해서 시작된 아프카니스탄에서 미군이 정부군에 개입하여 탈레반과 전쟁을 하는 과정에서 총사망자 23만 명, 난민 500만 명, 재산 1100조원(한화)의 피해가 발생했습니다. 미국과 동맹국들의 최첨단 무기와 우수한 군대를 동원해서 한 전쟁이었지만 이 전쟁은 결국 실패로 끝났습니다. 그것은 아프카니스탄의 정부와 정부군들의 부패와 무능, 싸울의지가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결국은 아프카니스탄은 탈레반의 찬하가 되고 말았습니다.
여호수아의 이 탄식과 부르짖음과 질문은 이와같은 일이 일어나고 말까하는 두려움 때문이 아니었겠습니까? 그렇습니다. 9절을 보십시오. "가나안 사람과 이 땅의 모든 사람들이 듣고 우리를 둘러싸고 우리 이름을 세상에서 끊으리니 주의 크신 이름을 위하여 어떻게 하시려 하나이까?"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신 32:27에서도 언급된 말씀이기도 합니다. "혹시 내가 원수를 자극하여 그들의 원수가 잘못 생각할까 걱정하였으니 원수들이 말하기를 우리의 수단이 높으며 여호와가 이 모든 것을 행함이 아니라 할까 염려함이라"했습니다.
여호수아의 직감은 틀리지 않았습니다. 아이성의 실패는 단순한 군사적인 전략의 실패가 아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게서는 여호수아에게 "일어나라 어찌하여 이렇게 엎드렸느냐?" 하시면서 "이스라엘이 범죄하여 내가 그들에게 명령한 나의 언약을 어겼으며 또한 그들이 온전히 바친 물건을 가져가고 도둑질하며 속이고 그것을 그들의 물건들 가운데에 두었느니라 그러므로 이스라엘 자손들이 그들의 원수 앞에 능히 맞서지 못하고 그 앞에서 돌아섰나니 이는 그들도 온전히 바친 것이 됨이라 그 온전히 바친 물건을 너희 중에서 멸하지 아니하면 내가 다시는 너희와 함께 있지 아니하리라" 말씀하여주셨습니다.
성도의 승리의 요건은 하나님의 함께 하심입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실때 여리고 백성들의 마음이 녹아 정신을 잃었고(2:11절), 이스라엘은 크게 승리를 얻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작은 아이에 패했고, 오히려 이스라엘 백성들이 마음이 녹아 물같이 되어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들은 작은 성, 적은 수의 주민들 앞에서 자신들의 힘을 신뢰하였고, 하나님의 뜻을 구하지도 않았습니다. 이스라엘은 여리고성의 승리에 도취되어서는 아간의 범죄도 몰랐고 하나님이 함께 해주시지 않는 것도 깨닫지 못했습니다.
아이성이 실패를 겪고서는 여호수아는 여호와의 크신 이름의 소중함을 다시 발견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주의 크신 이름을 위하여 어떻게 하시려 하나이까?" 여호와의 크신 이름이 업신여김을 받게 될까봐 염려하여 부르짖습니다. 성도의 삶은 하나님의 이름을 위한 삶이여야 합니다. 하나님의 이름 앞에서 성결한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은 여호와의 크신 이름이 높임을 받으시는 곳에서 하나님의 백성들과 함께 하시는 줄로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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