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기현의 살림운동

부끄러워하였느냐?(렘 6:13~15) 본문

하나님의 질문

부끄러워하였느냐?(렘 6:13~15)

유앙겔리온 2021. 1. 18. 23:01

부끄러워하였느냐?
렘 6:13~15

렘6:13 이는 그들이 가장 작은 자로부터 큰 자까지 다 탐욕을 부리며 선지자로부터 제사장까지 다 거짓을 행함이라
렘6:14 그들이 내 백성의 상처를 가볍게 여기면서 말하기를 평강하다 평강하다 하나 평강이 없도다
렘6:15 그들이 가증한 일을 행할 때에 부끄러워하였느냐 아니라 조금도 부끄러워 하지 않을 뿐 아니라 얼굴도 붉어지지 않았느니라 그러므로 그들이 엎드러지는 자와 함께 엎드러질 것이라 내가 그들을 벌하리니 그 때에 그들이 거꾸러지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한자말에 '수오지심(睡惡之心)'란 말이 있습니다. 맹자가 한 말인데요. "자신의 잘못을 부끄러워할 줄 알고, 타인의 올바름에서 벗어난 것을 미워하는 마음"을 이르는 말입니다. 인간은 짐승과 달리 모름지기 부끄러움을 아는 존재여야 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부끄러움은 성향적으로 수줍어 하는 것과는 질적으로 다른 것임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부끄러워 할 필요가 없는 것들 때문에 부끄러워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것도 분명합니다. 

  복음적인 측면에서 생각할 때도 모든 인간이 다 부끄러움을 모른다고 할지라도 적어도 하나님의 백성들은 부끄러움을 부끄러워할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이 주님의 기대이실 것입니다. 부끄러움을 아는 사람은 회복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백성들은 거룩한 부끄러움이 있어야 합니다.

  대부분 사람이 부끄러운 일을 하게 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욕망에 끌릴 때입니다. 자신의 욕망에 휘둘릴 때 부끄러움을 느끼고 돌이킬 줄 아는 사람이야말로 진정한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 나오는 택한 백성이요 선민인 유다백성들은 부끄러워해야 할 때 부끄러워하지 않았고 얼굴조차 붉어지지 않았습니다.

  오늘 주신 본문 말씀을 중심으로 해서 하나님의 질문이신 "부끄러워하였느냐?"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13절 말씀에 "유다백성들은 가장 작은자부터 큰 자까지 다 탐욕을 부리며 선지자로부터 제사장까지 다 거짓을 행함이라"하셨는데 이것이 하나님 보시기에 가증한 일이었습니다. 

  선지자와 제사장은 그 시대에 영적 의사들이라고 할 수 있는데 유다의 중한 상처를 치료하면서도 그 상처를 가볍게 여기면서 "평강하다 평강하다"하였습니다. 거짓진단을 하고 거짓 치료행위를 한 것입니다. 그런데 유다백성들은 작은 자부터 큰 자에 이르기까지 이것을 좋아했고 그들을 좋은 의사처럼 따랐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전하는 "평강하다 평강하다"라는 메시지가 듣기 좋았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죄를 지적하고 회개를 촉구하는 예레미야의 말은 듣기에 불편했고 마주하기에 껄꺼러웠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레미야의 메시지를 싫어했고, 무시했고, 거부했습니다. 심지어는 예레미야를 죽이고자까지 했습니다. 

  이러한 일은 하나님 보시기에 가증한 일이고 참으로 부끄러워 해야 할 일이었습니다. 탈무드에 보면 "인간이 가지는 한 가지 가치는 부끄러움이다. 수치를 아는 인간은 쉽게 죄악에 떨어지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마크 트웨인은 "인간만이 얼굴이 붉어지는 동물이다. 혹은 그렇게 할 필요가 있는 동물이다"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15절 말씀에 보면, "그들은 조금도 부끄러워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얼굴도 붉히지 않았다"고 하셨습니다. 이처럼 염치가 없고 뻔뻔스러운 사람들의 얼굴을 쇠로 만든 낯가죽이라 해서 '철면피(鐵面皮)'라 합니다. 부끄러움을 모르면 뻔뻔해지고, 철면피가 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래요. 인간은 모름지기 수치를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수치를 느낄 때 적어도 얼굴정도라도 붉어져야 합니다. 그래야 희망이 있습니다. 그런데 요즈음은 부끄러움을 모르는 사람들이 너무 많습니다. 부끄러워해야 할 자리에서 오히려 당당합니다. 얼굴이 붉어져야 할 때에 얼굴 표정하나 바뀌지 않고 태연하기 짝이 없습니다. 오히려 부끄러움을 자랑으로 삼고, 죄짓는 자들이 너무 당당해서 무섭기까지 합니다. 

  사람다움은 부끄러운 것을 부끄럽게 여기는데 있습니다. 참된 신앙은 부끄러움을 아는 것으로부터 시작됩니다. 그리고 신앙의 성숙은 부끄러움을 알고 돌이키는 것으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어디 무결점의 인생이 있겠습니까? 부끄러움을 아는 자와 부끄러움을 모르는 자가 있을 뿐입니다.   

  에스라 선지자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악(惡)을 깊이 통찰하면서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부끄럽고 낯이 뜨거워서 감히 나의 하나님을 향하여 얼굴을 들지 못하오니, 이는 우리 죄악이 많아 정수리에 넘치고, 우리 허물이 커서 하늘에 미침이니이다"(스9:6)고 고백했던 것처럼 예레미야시대의 모든 선지자들과 백성들도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부끄럽고 낯이 뜨거워서 감히 하나님을 향하여 얼굴을 들지 못하겠다"고 했어야 했습니다. 그랬더라면 희망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아쉽게도 예레미야 시대의 특징이 바로 수오지심이 없는 시대였고 염치가 없는 시대였던 것입니다. 이 수오지심이 없고, 염치없음이 하나님의 진노를 사게 되었습니다. 인간은 죄 때문에 망하는 것이 아니라 죄를 짓고도 부끄러워하지 않기 때문에 망하는 것입니다. 부끄럽지 않기 때문에 회개가 없는 것이며 부끄러움을 모르기 때문에 죄에서 떠나지 않는 것입니다. 

  성경을 통해서 살펴보나 동서고금의 문명을 살펴보나, 부끄러움을 모르는 사람들이 넘치는 세상이 되면 그 역사와 문명은 머지않아 멸망의 길로 들어갔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도 보세요. 부끄러움을 모르고 얼굴조차 붉어지지 않는 그들이 "엎드러지는 자와 함께 엎드러질 것이라"라 했고 "내가 그들을 벌하리니 그 때에 그들이 거꾸러지리라"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말씀대로 된 것입니다. 

  부끄러워해야 할 것을 부끄러워 하지 않은 것, 그로 인한 결과는 참혹했습니다. 피를 흘리고 고통을 당했습니다.
  성경에도 보면 부끄러워 해야 할 때 부끄러워하지 않는 이들이 많았었고 그리고 그들은 한결 같이 결말이 나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부끄러워할 줄 알았던 이들은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입었습니다. 그래서 '부끄러움을 아는 지도자와 그를 따르는 백성들'이 서는 것은 중요한 일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 큽니다. 평안과 위로를 전하는 말씀은 우리에게 매우 필요합니다. 그렇지만 그것만 있어서는 안 됩니다. 젖과 같이 부드러운 말씀도 필요하지만 단단한 음식과 같은 말씀을 먹어야 할 자로 자라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가 영적으로 건강한 사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사람으로 자랄 수 있습니다. 예레미야를 통해서 부끄러움을 깨우쳐주는 말씀을 그들이 받을 수만 있었더라도 결말이 좋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지 못했습니다. 

  부끄럽지 않게 삽시다. 부끄럽게 산다면 부끄러움이라도 알면서 삽시다. 뻔뻔하게 부끄러움 가운데 있으면서도 부끄러움도 모른채 얼굴도 붉히지 않는 자가 되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부끄러운 줄 알고 얼굴을 붉히며 하나님께 나아갈 때 하나님께서 긍휼히 여기시는 줄로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