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기현의 살림운동

무슨 집을 지으랴?(사 66:1~4) 본문

하나님의 질문

무슨 집을 지으랴?(사 66:1~4)

유앙겔리온 2021. 1. 8. 06:30

무슨 집을 지으랴?
사 66:1~4

사66:1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하늘은 나의 보좌요 땅은 나의 발판이니 너희가 나를 위하여 무슨 집을 지으랴 내가 안식할 처소가 어디랴
사66:2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 손이 이 모든 것을 지었으므로 그들이 생겼느니라 무릇 마음이 가난하고 심령에 통회하며 내 말을 듣고 떠는 자 그 사람은 내가 돌보려니와
사66:3 소를 잡아 드리는 것은 살인함과 다름이 없이 하고 어린 양으로 제사드리는 것은 개의 목을 꺾음과 다름이 없이 하며 드리는 예물은 돼지의 피와 다름이 없이 하고 분향하는 것은 우상을 찬송함과 다름이 없이 행하는 그들은 자기의 길을 택하며 그들의 마음은 가증한 것을 기뻐한즉
사66:4 나 또한 유혹을 그들에게 택하여 주며 그들이 무서워하는 것을 그들에게 임하게 하리니 이는 내가 불러도 대답하는 자가 없으며 내가 말하여도 그들이 듣지 않고 오직 나의 목전에서 악을 행하며 내가 기뻐하지 아니하는 것을 택하였음이라 하시니라

  고든 맥도날드가 쓴 "하나님이 축복하시는 삶"이란 책에 "페르소나호를 만든 어떤 선주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어떤 사람이 자기가 회원으로 있는 보트클럽에서 가장 웅장하고 화젯거리가 될만한 배를 지어서 인정받고자 했습니다. 그는 배의 외관을 최대한 하려하게 온갖 장식물들을 달고 선실에는 안락한 설비와 편의시설을 갖추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라틴어로 '배우의 가면'을 뜻하는 '페르소나(persona)'라는 이름을 배에 부여하고 멀리서도 그 이름이 보일 수 있게 황금색 페인트로 글자를 써서 선미에다 붙였습니다.

  그는 페르소나호를 진수하면서 오직 클럽 회원들이 보낼 탄성과 갈채에 대한 기대로 가득차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배의 외양에 많은 시간과 관심과 물질을 쏟아 부었습니다. 그러다보니 그는 배의 밑 부분에 대해서는 거의 신경을 쓰지 않았습니다. 아무도 그 밑바닥을 볼 사람은 없을 것이기에, 그리고 자신의 경험상 그 밑창에 대해 감탄하는 사람은 지금까지 아무도 없었기에 그는 선박의 보이지 않는 곳에 대해서는 시간과 돈을 쓰려 들지 않았습니다.

  마침내 배는 완성이 되었고 첫 출항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의 짐작대로 이 배를 본 보트클럽 사람들은 그 화려한 외양에 대해 칭찬과 감탄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클럽 역사상 가장 웅장한 배를 지은 수고를 인정받아 언젠가는 회장으로 선출될 거라는 이야기도 들렸습니다. 지난 수년 동안 고대했던 그 모든 소리가 그의 귀에 노래처럼 들려왔습니다. 클럽 사람들의 부러움과 박수갈채 속에 페르소나 호는 힘차게 물살을 가르고 바다로 나아갔습니다.

  페르소나호는 정말 멋지고 웅장했습니다. 처음 얼마동안은 그랫습니다. 그러나 바다 멀리 몇 십 킬로미터 더 나가자 폭풍이 일었습니다. 태풍까지는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잠깐 부는 돌풍도 아니었습니다. 배는 흔들리기 시작했고 양옆으로 물살이 들이쳤습니다. 채 몇 분도 되지 않아 페르소나 호의 화려한 외관들은 찢겨나갔고 금빛찬란한 간판은 떨어져 나갔습니다. 선실에는 물이 점점 차오르고 있었습니다. 바로 그때 이제껏 보아온 파도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큰 파도가 페르소나 호를 세차게 내려치는가 싶더니 그만 배가 뒤집히고 말았습니다. 

  그것은 물론 엄청난 파도였기는 했으나 그러나 대부분의 배라면 그런 파도쯤은 강타를 당하여도 다시 제 위치로 돌아갈 수 있었겠지만 페르소나 호는 그러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이 한심한 선주가 배를 지을 때 수면 밑 부분을 무시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 쪽에 무게가 전혀 없었습니다. 이 사람은 배의 외관만 생각했지 폭풍을 견뎌낼 수 있는 보이지 않는 부위의 무게와 탄성과 안정성은 충분히 생각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하여 우리에게 질문하십니다. "하늘은 나의 보좌요 땅은 나의 발판인데 너희가 나를 위하여 무슨 집을 지으랴 내가 안식할 처소가 어디랴"하셨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크고 웅장하고 위대한 건물을 지어 하나님께 봉헌한다고 해도 하나님의 보좌인 하늘과 비교할 수 있겠으며 하나님의 발판인 땅과 견줄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이런 것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는 것은 애초부터 인간들의 잘못된 인식으로 출발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믿는 자를 통해서 받고 싶어하시는 집, 우리가 지어드려야 하나님의 집은 어떤 집입니까?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멸하시리라.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니 너희도 그러하니라." 고 고전 3:16, 17절에 말씀하고 계십니다. 우리 자신들이 하나님이 머무시는 하나님의 참된 성전이기에 아무리 화려하고 웅장한 건물로써의 성전을 지었어도 그 안에서 예배드리는 우리들의 몸이 거룩하지 못하면 헛된 일이 되고야 맙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머무시는 성전인 우리들의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하신 것입니다.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 자신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하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집을 지어야 한다면 어떤 집을 지어야 합니까? 겉모양만 화려하게 짓는 사람의 눈을 홀리기 위한 집이 아니라 하나님이 눈여겨 보시고 돌보시는 집, 하나님을 위해서 성전을 짓고 그곳에서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며 제사를 드리고, 하나님이 그 집에 거하시며 안식하시기를 위한다면 세상의 집과 구별되는 집을 지어야 할 것입니다. 
 
  1, "가난한 마음의 집"을 건축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무릇 마음이 가난하고"했습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하나님의 성전일진데 우리가 하나님을 위해서 지어야할 진정한 집은 가난한 마음의 집입니다. 이 말씀은 물질적인 빈곤을 부추기거나 경제적인 파탄의 문제를 다루고 있는 말씀이 아닙니다. 그리고 지식의 부족이라든지, 지각의 부족 혹은 능력의 부족이나 영력의 결핍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류의 것을 다루고 있는 말씀이 아닙니다. 오히려 이런 가난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벗어나야 할 것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에서 가난을 짊어지셨고 대속을 해주셨습니다. 기독교는 경제적인 가난이나 궁핍을 선포하고 가르치는 종교가 아닙니다.

  본문에서 말하는 마음의 가난은 '겸손'을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집이 되기 위해서 하나님을 집의 주인으로 모실 수 있는 마음의 겸손이 준비되어야 합니다. 자신의 주인됨을 내려놓고 하나님을 주인으로 모셔야 합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겸손으로 지어진 집에 들어가시기를 기뻐하십니다. 하나님없이는 살 수 없다는 마음을 가진 자가 하나님이 거하실 최고의 성전일 것입니다.  

  가난의 상태를 잘 나타내주는 표현이 성경에 있습니다. 시편기자는 목마른 사슴이 시냇물을 찾는 것처럼 주님을 찾는 마음이야 말로 가장 가난한 마음임을 비유했습니다. 시 42:1~2절을 보시기 바랇니다.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니이다 내 영혼이 하나님 곧 살아 계시는 하나님을 갈망하나니 내가 어느 때에 나아가서 하나님의 얼굴을 뵈올까"

  목마른 사슴이 시냇물을 찾다가 죽을 수도 있습니다. 정글에서 많은 야생동물들이 목마른 목을 축이려고 시냇물을 찾았다가 변을 당합니다. 그렇게 위험한 것을 몰라서 그렇게 한 것이 아닙니다. 그만큼 목마름이 절실하기 때문입니다. 그 길만이 살길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절실함이 심령이 가난한 상태입니다. 이런 마음의 집을 지어야 합니다. 

  2, "심령에 통회하는 집"을 건축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심령에 통회하며"라고 말씀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위해서 지어야 할 집은 심령에 통회하는 집입니다. 심령에 통회하는 집은 어떤 집입니까? 여기 '통회하다'는 히브리 말 '라카'는 "치다, 때리다. 상처를 가하다. 죽이다. 학살하다."라는 말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범죄했을 때 우리의 영혼을 치고 때리고 상처를 가하고 죽이고 학살하는 것처럼 회개해야 하고 그렇기까지 회개해야 하기 때문에 두럽고 떨며 범죄치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 드리는 제사와 예배가 모름지기 그와 같아야 합니다. 

  다윗은 욕망의 유혹을 받아 범죄한 후에 시 51:17~18절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하지 아니하시리이다 주의 은택으로 시온에 선을 행하시고 예루살렘 성을 쌓으소서"라고 간구했습니다. 

  욕망이 시키대로 하고도 심령에 통회함이 없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집으로서 성전이 아니며, 하나님이 받으시는 제사와 예배와는 아무 관계가 없는 사람입니다. 욕망이 시키는대로 하지 않으려고 분투노력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심령이 통회하는 자를 만나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3,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떠는 자의 집"을 건축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내 말을 듣고 떠는 자"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말씀을 듣고 떠는 자를 만나주시고, 말씀을 듣고 떠는 자의 예배를 받으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위해서 우리가 지어야 할 집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떠는 자의 집"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떠는 자의 집은 어떤 집입니까? 여기 사용된 '하레드'는 '두려운' 또한 '존경을 나타내는' 그런 뜻입니다. 그러니까 단순히 공포에 사로잡힌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를 인정하며 그를 삶에 적용하여 살고자 하는 경건하고 바람직한 태도, 즉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경외감을 나타내는 표현인 것입니다. 구약 성경에서 이 단어는 모두 6번 사용되었는데, 그 가운데 4번이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태도를 나타내기 위해 사용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두려워하는 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소홀리 듣지 않습니다. 두려움으로 듣고 존경을 나타내면서 듣습니다. 

  4, 하나님께서는 이와 같이 집을 짓 자를 "내가 돌보려니와"했습니다. 여기서 <내가 돌보려니와>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단어 '나바트'는 '열심히 바라보다', '주목해서 보다'라는 말로서 '내가 깊은 관심을 가지고 바라볼 것이다'라는 의미를 나타내는 단어입니다. 개역성경에서 "권고하신다"고도 하셨고 "좋아신다"(새번역)곧 했습니다. 창조주 하나님께서 돌보시고, 권고하시고, 좋아해준다면 그것보다 더 힘이 되고 좋은 일이 어디이겠습니까? 생각만 해도 가슴벅차오르고 짜릿합니다. 

  그러나 가난한 마음이 없고, 심령에 통회함이 없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떨지도 않는 자는 비록 "큰 집을 짓고 그곳에서 소를 잡아 드리는 것은 살인함과 다름이 없이 하고 어린 양으로 제사드리는 것은 개의 목을 꺾음과 다름이 없이 하며 드리는 예물은 돼지의 피와 다름이 없이 하고 분향하는 것은 우상을 찬송함과 다름이 없이 행하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렇게 자기의 길을 택하며 마음은 가증한 것을 기뻐한 자들에 대해서는 "나 또한 유혹을 그들에게 택하여 주며 그들이 무서워하는 것을 그들에게 임하게 하리니 이는 내가 불러도 대답하는 자가 없으며 내가 말하여도 그들이 듣지 않고 오직 나의 목전에서 악을 행하며 내가 기뻐하지 아니하는 것을 택하였음이라"하셨습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하나님의 집입니다. 마음이 가난하고, 심령에 통회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떠는 자로 세워지므로 하나님이 돌보시는 하나님의 성전들이 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