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기현의 살림운동
내가 네게 무엇을 줄꼬?(왕상 3:4~10) 본문
내가 네게 무엇을 줄꼬?
왕상 3:4~10
왕상3:4 이에 왕이 제사하러 기브온으로 가니 거기는 산당이 큼이라 솔로몬이 그 제단에 일천 번제를 드렸더니
왕상3:5 기브온에서 밤에 여호와께서 솔로몬의 꿈에 나타나시니라 하나님이 이르시되 내가 네게 무엇을 줄꼬 너는 구하라
왕상3:6 솔로몬이 이르되 주의 종 내 아버지 다윗이 성실과 공의와 정직한 마음으로 주와 함께 주 앞에서 행하므로 주께서 그에게 큰 은혜를 베푸셨고 주께서 또 그를 위하여 이 큰 은혜를 항상 주사 오늘과 같이 그의 자리에 앉을 아들을 그에게 주셨나이다
왕상3:7 나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종으로 종의 아버지 다윗을 대신하여 왕이 되게 하셨사오나 종은 작은 아이라 출입할 줄을 알지 못하고
왕상3:8 주께서 택하신 백성 가운데 있나이다 그들은 큰 백성이라 수효가 많아서 셀 수도 없고 기록할 수도 없사오니
왕상3:9 누가 주의 이 많은 백성을 재판할 수 있사오리이까 듣는 마음을 종에게 주사 주의 백성을 재판하여 선악을 분별하게 하옵소서
왕상3:10 솔로몬이 이것을 구하매 그 말씀이 주의 마음에 든지라
솔로몬이 아버지 다윗을 이어받아 왕위에 올랐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라는 평가를 받은 왕이었습니다. 솔로몬은 하나님 마음에 합당한 자고 여겨졌전 아버지 다윗처럼 내가 잘 할 수 있을까 하는 염려와 걱정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도우심이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기브온 산당에서 일천번제를 드리며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했습니다. 그랬더니 기브온에서 밤에 여호와 하나님께서 솔로몬의 꿈에 나타나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이 필요없는 인생이 이 세상에 어디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도우심이 필요없는자처럼 살아가는 것이 곧 그 인생에게 다른 어떤 재앙보다 큰 재앙인 것입니다. 하나님을 인정치 아니하고 하나님이 없는 자로 살아가는 것은 스스로 어리석은 자가 되는 것입니다.
어리석은 자라고 번역된 히브리어 단어는 "나발"입니다. 성경인물 중에 나발은 구약시대에 어리석은 자요 미련스러운 자였습니다. 그는 자신의 수 많은 양떼를 말없이 지켜준 다윗이 도움을 요청했을 때, 한 마디로 거절했습니다. 그의 어리석음은 다윗에게 입은 은혜를 알지 못하는 자로 드러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입고 살아가면서도 하나님의 은혜를 입고 사는지도 모르고 사는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심지어는 하나님의 은혜를 입고 살면서도 하나님이 없다고 하는 자는 어리석은 자라고 시종일관하여 성경은 말씀해주고 있습니다.
솔로몬은 오늘 본문 6절에서 보는 것처럼 "솔로몬이 이르되 주의 종 내 아버지 다윗이 성실과 공의와 정직한 마음으로 주와 함께 주 앞에서 행하므로 주께서 그에게 큰 은혜를 베푸셨고 주께서 또 그를 위하여 이 큰 은혜를 항상 주사 오늘과 같이 그의 자리에 앉을 아들을 그에게 주셨나이다"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은혜를 알고 하나님의 은혜를 덧입기를 원하여 하나님께 나아가서 도우심을 구할 때 하나님께서는 솔로몬에게 나타나 주셨고, "내가 네게 무엇을 줄꼬?" 그에게 물어주셨습니다.
"내가 네게 무엇을 줄꼬?"하고 물으신 것은 무슨 뜻입니까? 백지수표처럼 솔로몬에게 아무거나 구하면 주시겠다는 그런 의미였을까요?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가장 우선적인것, 가장 필요한 것, 그리고 구체적인 것, 네게 확정되고 확정된 것을 구하라는 의미는 아닐까요? 일천번제라는 어마어마한 제사를 드리면서까지 하나님을 찾고 구하는 것, 그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이냐?하고 물으신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여러분에게 하나님께서 찾아오셔서 이런 똑같은 질문을 하신다면 망서리지 않고 대답할 수 있는 뚜렷하고 분명한 꿈이 있습니까? 그런 소원과 소망이 있습니까? 기도의 제목이 있으십니까? 잘못 대답하고서는 다시 또한 번 더 찾아오셔서 물어주신다면 그 때는 잘 대답할 수 있을텐데 하면서 후회하지않을 자신이 있으십니까?
미리서 이 시간을 통해서 그 대답을 준비해보면 어떨까요? 아니 우리는 매 순간에 주께서 우리에게 "내가 네게 무엇을 줄꼬? 물으시는 그 물음에 응답하며 살아야 합니다.
솔로몬은 망서림이 없었습니다. 흥분되어서 말을 더듬지도 아니하였습니다. 그에 마음에는 오랜 꿈처럼 자리잡고 있었던 것이 있었습니다. "종은 작은 아이라, 그러나 내가 왕이 되어 재판할 백성들은 큰 백성들입니다. 종에게 듣는 마음을 주사 주의 백성을 재판하여 선악을 분별하게 하옵소서"라고 대답했습니다.
솔로몬은 “듣는 마음”을 구했습니다. 우리가 가진 성경의 구버전인 개역성경에는 오늘 이 "듣는 마음"이라 말을 "지혜"로 번역했습니다. 그래서 우리 가운데는 솔로몬이 지혜를 구했다고 기억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틀리지 않습니다. 듣는 마음이 지혜이고, 지혜로움은 듣는 마음에서 오는 것입니다.
솔로몬이 하나님께 구한 듣는 마음은 무엇이었겠습니까? 하나님의 마음을 듣는 마음, 하나님을 두려워할줄 아는 마음,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겸손히 귀를 기울이는 마음, 하나님께 경배드리는 마음이었습니다. 그것은 동시에 주께서 맡겨주신 백성들의 소리를 듣는 마음이었습니다. 지금 솔로몬은 드는 마음을 달라고 하나님 앞에 간구한 것입니다.
많은 인생의 문제가 "듣는 마음"에서 비롯됩니다. 솔로몬이 왕권 초기에 듣는 마음에서 시작한 그의 통치는 후반으로 가면서 점점 듣는 마음을 잃어버리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 하나님에게서 멀어졌고 백성에게서도 멀어졌습니다. 그가 끝까지 듣는 마음을 유지했더라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을 지울수가 없습니다.
솔로몬이 이처럼 “듣는 마음”을 구했던 것에 반해서 그의 아들 르호보암은 어리석게도 솔로몬 사후에 거꾸로 “듣는 마음”을 무시하고 부왕과 함께 통치에 관여했던 연륜을 가진 지혜 자들을 무시하고 인생 연륜도 없는 자기 동년배들의 말을 따라감으로 백성들의 소리에 듣는 마음을 닫았고 이 일로 연유해서 아버지 솔로몬이 이루어놓은 나라를 온전하게 지키지 못하고 반 토막으로 만들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듣는 마음이 부족합니다.” 들어도 잘못 듣고, 잘못된 것을 듣습니다. 그래서 후회할 일들을 만듭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충분히 들으십니까?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말씀을 날마다 궁구하고, 상고하며 들어야 합니다. 사람들은 앞부분 말만 듣고 끝까지 귀기울여 듣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해가 부족합니다. 그래서 다툼과 싸움이 많아집니다.
우리는 지금 정보의 홍수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자기가 듣고 싶은 정보만 듣는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듣기 싫은 것도 들어야 하고 반대하는 목소리도 들어야 합니다. 듣지 아니하면 목이 뻣뻣해지고 마음이 둔하여집니다. 사람은 듣기를 거부하는 순간 미련한 사람이 됩니다. 듣기를 망각하는 순간 독선에 빠지고 고집불통이 됩니다.
그런데 솔로몬이 하나님께서 "네게 무엇을 줄꼬?" 기회를 주시면서 물으셨을 때, 다른 어떤 것도 아닌 "듣는 마음"을 구했다는 것입니다.
10절에 "솔로몬이 이것을 구하매 그 말씀이 주의 마음에 든지라"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솔로몬이 듣는 마음을 구한 것, 그것이 마음에 드셨다고 했습니다. 질문에는 많은 답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질문자가 기대하는 답을 할 수 있으면 마음에 든자가 될 것입니다.
주께서 오늘 이 시간 말씀의 시간을 통해서 우리에게 오셔서 "내가 네게 무엇을 줄꼬?" 말씀하고 계십니다. 우리는 이 질문에 응답해야 합니다. 우리의 대답한 것을 들으시고 주의 마음에 든 성도들이 될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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