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기현의 살림운동
어찌하여 내 이름을 묻느냐?(삿 13:17~18) 본문
어찌하여 내 이름을 묻느냐?
삿 13:17~18
삿13:17 마노아가 또 여호와의 사자에게 말하되 당신의 이름이 무엇이니이까 당신의 말씀이 이루어질 때에 우리가 당신을 존귀히 여기리이다 하니
삿13:18 여호와의 사자가 그에게 이르되 어찌하여 내 이름을 묻느냐 내 이름은 기묘자라 하니라
성경 여러 곳에서 이름을 묻고 답하는 장면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인간이 하나님의 이름을 묻는 경우도 있었고, 하나님께서 인간을 찾아와 이름을 묻기도 하셨습니다. 이렇게 이름을 묻고 답하는 일을 체험한 사람들은 예외없이 삶의 변화를 일으켰다는 사실입니다. 인간이 하나님의 이름을 물어알게 되었다면, 또한 하나님에 의해서 자신의 이름이 관심거리가 되고 그 이름이 불려지거나 이름에 개명을 주셨다면 이것은 기회이고 도전이고 터닝포인트가 분명한 것입니다.
사사시대에도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서 그 이름을 묻고 답하는 일이 있었습니다. 오늘은 이 사례를 중심으로 해서 "어찌하여 내 이름을 묻느냐?"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묵상하도록 하겠습니다.
사사기 시대의 역사적인 특징은 우리가 잘 알고 있는대로 하나의 정형화된 싸이클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첫번째단계로, 숨쉬고 살만하면 범죄한다는 것입니다. 먹고 살만하면, 평안해지면 하나님을 불순종하고 하나님을 잊어버립니다. 둘째 단계는 이렇게 범죄한 백성과 나라와 민족에게 하나님의 징계가 따라옵니다. 세째단계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고통 가운데서 부르짖는 것입니다. 건저달라고 간청합니다. 한번만, 이번한번만 하면서 살려달라고 간구합니다. 네번째 단계는 하나님의 구원하심입니다. 사사기 전체에 이러한 싸이클이 계속해서 반복됩니다. 불순종하고 죄지으면 깨지고 깨지면 부르짖고 부르짖으면 하나님이 역사 가운데 개입하셔서 사사를 세워 구원해주시는 일들이 계속해서 톱니바퀴처럼 물고 돌아갑니다. 이것이 사사시대의 정형화되고 공식화된 삶의 패턴이었습니다.
사사시대의 이러한 패턴을 통하여, 사사기를 상고하는 사람들로 하여금 이 패턴의 사슬을 끊어버리고 고통 가운데 있을 때뿐 아니라 숨쉬고, 먹고 살만할 때도, 평안하고 형통할 때도 하나님을 멀리하지 않고 하나님을 섬기며 사는 자들이 되기를 바라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삿 13:1절 말씀에 보면, 이 패턴조차도 무너집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다시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으므로 그들을 사십년 동안 블레셋 사람의 손에 넘겨 주시니라"했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바로 2절 "소라 땅에 단 지파의 가족 중에 마노아라 이름하는 자가 있더라 그의 아내가 임신하지 못하므로 출산하지 못하더니" 이렇게 연결되고 있습니다. 무엇이 빠진 것입니까?
여호와의 목전에서 악을 행한 하나님의 백성들, 이어지는 하나님의 징계로 불레셋에게 압제받음, 그리고 나와야 할 것은 바로 이스라엘 백성들의 하나님께 부르짖음입니다. 그런데 오늘 성경에 보면 눈을 씻고 보아도 이스라엘백성들의 부르짖음이 없습니다. 블레셋에게 40년 동안 압제를 당했는데도 부르짖었다는 말이 없습니다.
기도도 나오지 않는, 기도하는 것조차 잊어버린 시대가 바로 이 시대였던 것입니다. 영적으로 완전히 사망의 상태요, 완전히 죽은 상태인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행하시는 하나님의 열심을 보게 됩니다. 40년 동안 고통속에 있어도 부르짖지도 않는 백성, 하나님을 찾지도 않는 백성, 완전히 영적으로 죽어서 회생 가능성도 없는 백성들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 백성들을 어떻게 하셨습니까? 그냥 버리셨습니까? 그러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부르짖지도 않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친히 찾아 구원하시고자 역사에 개입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열심은 숨은 자도 찾으시며 부르짖지 않는 민족도 구원하십니다. 그렇다고 하면 하나님 앞에 얼굴을 내밀고 하나님께 부르짖는 민족을 어찌 구원하시지 않겠습니까? 밤낮 부르짖는 하나님의 백성들의 원한을 풀어주시지 않겠습니까?
이스라엘의 40년 해목은 문제를 해결해주시기 위해서 한 이름도 없는 마노아의 아내를 찾아오셔서 삼손의 출생을 예고해주신 것입니다. 마노아의 아내는 사라, 한나, 리브가처럼 그녀 자신에게는 잉태하는 능력이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사자는 이 가난하고 이름없는 스스로 어찌할 수 없는 연약한 여인에게 찾아오셔서 메세지를 주신 것입니다. 그 매세지가 전달된 것은 심지어 그 남편 마노아도 아니었고 그녀에게 였습니다.
마노아의 아내는 이 사실을 그에 남편에게 알렸고, 그 남편은 아내의 말을 진지하게 들었습니다. 보통 부부들은 이럴때 어떻게 반응하겠습니까? 이놈의 여편네가 아이을 낳지 못하고 늙어가더니 실성을 했는가?하면서 무시했을 수도 있었을 터인데 마노아는 부인의 말을 경청했고, 그와 같은 중요한 일이라고 하면 자기도 직접확인하고 싶어했습니다. 마노아의 신앙은 그 아내의 신앙에 미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런 마노에게도 그 아내와 똑같이 만나주셨고 두 사람 사이에서 출생한 아이로 통해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실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자 마노아는 하나님의 사자를 대접하고자 했습니다. 그래서 염소새끼를 한마리를 잡아돌아오기까지 기다려 달라 한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마노아가 하나님의 자에게 음식을 대접하려고 한 것은 이 사자가 누구인지 몰랐기 때문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람의 생각으로 음식을 대접하려고 하는데 "나는 내게 생각하는 것과 같은 사람이 아니라 신적인 영광을 가진 하나님이며 네가 번제를 드려야 할 대상이라는 것입니다.
이 떄 하나님의 사자를 향하여 마노아는 의심하여 "당신의 이름이 무엇이니이까?"하고 그 이름을 물었던 것입니다. 그러자 하나님의 사자가 자신의 이름을 묻는 마노아를 책망하셨습니다. "어찌하여 내 이름을 묻느냐?" 하나님의 사자는 책망을 하면서도 "내 이름은 기묘자라"하셨습다. 기묘자란 말이 무슨 뜻입니까? '기묘'(히, 필리)는 '비밀', '신비'라는 뜻으로, 그저 이해하기 어려워..., 알거 없어라는 뜻입니다. 여기에 자를 붙여 '기묘자'한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의 이해를 넘어선 자'라는 의미가 된 것입니다.
기묘자는 인간의 이해를 초월하여 놀랍고 오묘하신 일을 행하시는 하나님의 속성을 나타내는 이름입니다. 즉 나의 정체는 인간의 머리로는 이해할 수 없다고 말씀한 것입니다. 마노아의 머리나 생각으로는 도저히 알 수 없다는 뜻입니다. 우리 머리로는 여호와의 존재를 이해할 수 없습니다. 우리의 삶을 왜 이렇게 인도하시는지 도무지 알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일하심은 우리의 생각과 상상을 뛰어넘습니다. 우리 상식으로는 예수님의 구원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냥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머리와 상식으로는 상상할 수 없는 방법으로 우리를 인도하시고 구원하십니다. 하나님의 지혜와 권능은 감히 상상할 수 없는 비밀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이해를 넘어서 있는 분이십니다. 이 세상에 수없이 많은 인간의 이해를 넘어선 일들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앞으로는 더 빨리, 더 많이 인간의 이해를 넘어선 일들이 일어날 것입니다. 막연한 두려움이 나를 사로잡지 못하도록 해야 합니다. 이럴 때야에 말로 우리의 이해와 이성과 모든 계획을 뛰어넘는 기묘자 하나님께 더욱 나아가 간구해야 할 때임을 깨닫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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