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기현의 살림운동
그 나무 열매를 네가 먹었느냐?(창 3:11) 본문
그 나무 열매를 네가 먹었느냐?
창 3:11
창3:11 이르시되 누가 너의 벗었음을 네게 알렸느냐 내가 네게 먹지 말라 명한 그 나무 열매를 네가 먹었느냐
아담은 그 누구 보다도 하나님과 친밀함을 누릴 수 있었습니다. 즐거이 하나님과 함께 동산을 거릴면서 하나님의 사랑을 독차지할 수 있는 입장이었습니다. 그러나 따먹지 말라는 선악과를 따먹고서는 스스로 하나님의 낯을 피해 숨을 수밖에 없는 존재가 되었고, 타락한 영적 위치에 놓여 있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과의 친밀함은 사라졌습니다. 추격하는 이가 없었으나 도망하는 자가 되어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숨어 있는 아담을 친히 찾아오셔서 "네가 어디 있느냐?"고 질문하심으로써 아담으로 하여금 지금 자신이 서 있는 위치와 모습을 보게 해주셨습니다. 그리고 아담이 어디에 서 있어야 하는 것인가를 깨닫게 해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담을 향한 질문은 다시 폭풍처럼 이어집니다. "내가 네게 먹지 말라 명한 그 나무 열매를 네가 먹었느냐?고 물으셨습니다. 아담은 이 질문에 대답해야 했습니다. 하나님은 아담으로부터 어떤 대답을 듣고자 하셨을까요? 아담은 과연 어떤 대답을 내놓았습니까?
오늘은 이 질문을 제목으로 해서 사순절 첫번째 주일에 주시는 말씀으로 함께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왜 아담에게 이 질문을 하셨습니까?
몰라서 그러셨겠습니까? 아닙니다. 하나님은 아담이 한 일을 낱낱이 다 알고 계시는 전지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아담이 선악과를 따먹은 것도 알고 계셨고, 그것 때문에 부끄럽고 두려워서 숨은 것도 아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질문을 하신 것은 이 질문을 통해서 아담에게 하나님께서 원하셨던 것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아담이 하나님을 대면하고서도 하나님 앞에 자신의 죄를 고백하지 않고 있기 때문에 직접적으로 하나님께서는 아담에게 "그 나무 열매를 네가 먹었느냐?" 질문을 던지신 것입니다.
아담은 "네가 어디 있느냐?고 질문하신 하나님의 질문을 받고서는 "벗었음으로 수치스러워서 숨었다"고 했지, 자신이 죄를 범했다고 정직하게 고백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래서 "그 나무의 열매를 네가 먹었느냐?" 다시 질문을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물으신 것은 아담이 범죄한 사실에 대해서 정직한 인정, 깨끗한 인정을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미끄러져 넘어진 자들은 자신이 미끄러져 넘어진 것을 인정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물론 후회가 되기도 하고, 하필이면 자신에게 죄를 지을 수 있는 조건들이 주어진 것이 원망스럽기도 했을 것입니다. 자신이 부주의했던 것이 아쉽기도 했을 것입니다. 다 좋습니다. 왜 탓하고 싶은 마음, 변명하고 싶은 마음, 이런 이유 저런 이유와 핑계 대고 싶은 마음이 없겠습니까? 만약의 경우 불신자라면 그렇게 하고 넘길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분명하다면, 더욱이 전지하신 하나님이 친히 찾아오셔서 죄를 인정할 것을 요구하고 계신다면, 자신의 죄에 직면하고 그것을 정직하게 인정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아담과 하와는 죄를 고백하기는 커녕 비열한 변명을 일삼았습니다. 그리고 우물 쭈물하다가 마지 못해서 나중에서야 얼버무리면서 겨우겨우 인정했습니다.
12절을 보세요. "아담이 이르되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있게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 열매를 내게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 했습니다.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있게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 열매를 내게 주무로 내가 먹었다는 번명을 했습니다. 저 여자가 권하여 마지 못해서 먹었다는것입니다. 그리고 저 여자는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있게한 자가 아닙니까? 그러니 일말의 책임이 하나님께도 있다는 식입니다. 하나님이 저 여자만 내게 주시지 않았다면 그리고 저 여자가 그 열매를 먹으라고 권하지만 않았다면 절대로 이런 일이 벌어질 일이 없었을 거라는 겁니다.
그리고 13절을 또 보면, "여호와 하나님이 여자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찌하여 이렇게 하였느냐 여자가 이르되 뱀이 나를 꾀므로 내가 먹었나이다"라고 했습니다. 하와는 "뱀"을 지목하며 그가 꾀었기 때문이지 그가 꾀지만 않았으면 절대로 이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을 것임을 밝히고자 했습니다.
"그 나무 열매를 네가 먹었느냐?"고 묻는 하나님께, 아담은 하나님과 하와에게 책임을 전가했고, 하와는 뱀에게 책임을 전가했습니다. 이들은 도무지 잘못을 인정하려 하지 않습니다. 인정하더라도 100% 내 책임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100% 내 책임이라고 인정하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그러니 원망이 있고 불평이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참된 회개가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 그리고 그들과 한 배를 타고 가는 사람들에게 형식적이고 외식적인 신앙을 말씀하셔서 그들을 돌이키고자 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도무지 인정하지 않고, 끝끝내 예수님에게 등을 돌려버렸던 것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그리고 바울사도가 초대 고린도교회 교인들을 향하여 고후 11:3절에, "뱀이 그 간계로 하와를 미혹한 것 같이 너희 마음이 그리스도를 향하는 진실함과 깨끗함에서 떠나 부패할까 두려워하노라"했던 것이 사실로 나타났습니다. 고린도교회 교인들 가운데 어떤 이들은 바울사도가 애쓰고 힘써서 다지고 닦아논 생명의 복음을 버리고 거짓교사들에게 의해서 전파된 달콤한 거짓 복음에 마음을 빼앗겨버렸습니다.
그러나 "그 나무 열매를 네가 먹었느냐?"고 질문을 던지면
패역한 사람들의 한 가지 동일한 특징은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잘못을 덮기 위해서 다른 사람을 끌어들이고 다른 사람에게 책임을 전가시는 것입니다. 최소한 자신의 책임이 100%는 아니라고 인정받고 싶어합니다.
모든 원인과 책임이 나에게, 옛사람이 나에게 100%있다고 인정하지 않으면 원망이 생기고 불평이 생기게 됩니다. 그리고 참된 회개를 이룰 수가 없으니 용서받을 수도 없습니다. 그래서 악순환이 일어나고 반복됨이 일어나게 됩니다.
인생을 살다보면 크고 작은 실패를 할 수도 있고, 실망을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 과정에서 자존감은 낮아지고 당당히 고백하는 것보다는 숨는 편을 선택하는 것이 쉬운 방법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어떻게 해서든지 책임회피를 하는 것이 최선의 방법이라고 생각하는 이들이 많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을 섬기는 이들이 선택해야 할 방법은 아닌 것입니다.
"그 나무 열매를 네가 먹었느냐?" 질문하시는 하나님 앞에 아담은 모든 더덕더덕 붙어 따라오는 변명과 책임전가와 가식과 가면과 얼렁뚱땅을 버리고 "예, 네가 먹었나이다. 저는 죄인입니다. 나를 용서하여주시옵소서"라고 했어야 했습니다.
주님의 질문에 정직한 대답이 우리의 살길이며 회복의 길이며 치유의 길인줄로 믿습니다.
우리는 주님이 질문하시면 변명을 하거나 핑계꺼리를 찾아서 책임회피를 할 것이 아니라 깨끗하고 정직하게 인정하고 주님의 용서를 구하는 법을 오늘 말씀을 통해서 배워야 하고 그렇게 실행하면서 살아가는 성도들이 되어야 할줄로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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