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기현의 살림운동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창 4:8~12) 본문

하나님의 질문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창 4:8~12)

유앙겔리온 2021. 1. 7. 20:51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창세기 4:8~12

창4:8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에게 말하고 그들이 들에 있을 때에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을 쳐죽이니라
창4:9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그가 이르되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
창4:10 이르시되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네 아우의 핏소리가 땅에서부터 내게 호소하느니라
창4:11 땅이 그 입을 벌려 네 손에서부터 네 아우의 피를 받았은즉 네가 땅에서 저주를 받으리니
창4:12 네가 밭을 갈아도 땅이 다시는 그 효력을 네게 주지 아니할 것이요 너는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되리라

  하나님께서 가인이 분을 품고 안색까지 변하여 있던 때에 그를 찾아 오셔서 상한 감정의 위험성을 알려주시고 그렇게 진행되는 것을 만류하셨습니다. 분을 품었지만 죄로 연결되지 않도록 하라고 경고해주신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인은 하나님의 이 엄중한 말씀에 순종하지 않고 자기 힘을 의지하고 살겠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버리고 맙니다. 그만큼 그는 분을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마침내 가인은 동생 아벨을 들로 불러내 자기 허리에 차고 있던 돌도끼로 쳐죽인 후에 그 흔적을 지워버리려고 했습니다. 

  오늘 본문에 가인이 그 동생을 들로 불러내서 죽였다는 것은 사람들이 안 보는데서 처치했다는 말인데 무엇을 말해줍니까? 가인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을 두려워했다는 말입니다. '사람 눈만 피하면 완전 범죄 일 것입니다.' 이렇게 믿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눈은 사람의 눈보다 더 정확하십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 그를 찾아오셔서 하신 질문이 오늘 제목으로 잡게 된 "네 동생 아벨이 어디 있느냐?"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가인을 찾아와 이렇게 물으신 것은 아벨의 행방을 몰라서 그렇게 물으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가인이 진실하게 아벨에게 행한 일에 대해서 고백하기를 바라셔서 그렇게 질문하셨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때라도 자신의 죄과를 깨닫고 회개하면서 "하나님 어떻게 해야 합니까?"하고 그 해답을 뒤늦게라도 찾아보려고 몸부림칠 것을 기대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가인의 대답은 하나님의 기대와는 전혀 다른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입니까?"라고 오히려 뻔뻔한 대답을 함으로써 하나님의 뜻을 외면했습니다.  

  가인은 장자였습니다. 그러므로 마땅히 나는 부모님을 대신해서 언제든지 동생을 지키는 목자의 역할을 해야 할 자임을 생각해야 했었습니다. 그러나 그에게는 장자의식이 별로 없었던 것 같습니다. 

  여기 '지키는 자'에 대해 가인이 사용한 히브리어는 사람들에게보다는 오히려 동물에 대해 사용되는 것입니다. 목자는 염소와 양, 그리고 여러 가지 종류의 가축들을 '지키는 자'입니다. 가인은 "내가 어떻게 압니까? 내가 내 동생을 지키는 목자라는 말입니까?"라고 하는 말입니다. 마펫의 번역에 보면 "내가 내 아우의 목자입니까?"라고 되어 있습니다. 가인은 목자처럼 동생 아벨을 지켜주기는 커녕 오히려 죽였습니다. 

  형제를 지켜야 할 책임을 저버리고 오히려 형제를 미워하며 살인한 가인은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라고 하나님께 항거하며 변명하고 속이려 했고, 속지 않는 하나님에 대해서 화를 냈습니다. 그러자 10절에서 하나님께서는 "이르시되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네 아우의 핏소리가 땅에서부터 내게 호소하느니라
"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호소하느니라'의 원어 적인 의미는 '날카로운 소리를 지른다'입니다. 즉 '사람 살려!' 애타게 울부짖는 비명소리를 표현한 것입니다. '아벨의 핏 소리가 하나님께 날카로운 소리를 질러서 호소한 것'을 하나님께서는 그냥 간과하지 아니하시고 귀 기울여 들으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죽으면 끝이라고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께서 날카롭게 하나님을 부르는 소리를 잊지 않으십니다. 그리고 그 값을 치르게 하십니다.  

  "네 아우가 어디 있느냐?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질문하신다면 우리는 뭐라고 대답합니까? 가인처럼 "내가 그걸 어떻게 압니까? 내가 아우를 지키는 자입니까?"라고 대답하지는 않습니까?

  우리가 가인처럼 대답하는 것을 하나님은 원하시지 않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죄를 고백하고 우리의 책임을 고백해야만 합니다. "하나님 나는 내 동생을 지키는 자인데 그렇게 하지 못했습니다. 지키는 자가 오히려 살해하는자가 되고 말았습니다."

  오늘도 하나님께서는 본문 말씀을 통해서 우리에게 이 질문을 하시고 계십니다. "네 아우가 어디 있느냐?, 네 남편은 어디 있느냐?, 네 아내는 어디 있느냐? 네 자식, 네 친구, 네 이웃은 어디 있느냐?"고 질문하고 계십니다. 

  내 저 깊은 양심속에서 울려나오는 대답은 무엇입니까? 내 입술에서 나오는 답변은 무엇입니까? 적어도 가인과 같은 대답이 아니기를 바랍니다.  

  지금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자신만을 지키는 자에서 , 내 주위 사람, 심지어는 오지의 이름 모를 사람일지라도 지키는 자가 필요합니다. 그런 생각을 하는 사람이 필요합니다. 무엇보다도 앞으로 이 세상을 지도해 나아갈 지도자들은 "나는 내 동생, 내 이웃, 내 동료"를 지키는 사람이라는 마음과 행동을 소유한 사람이어야 합니다. 우리는 지금 "나는 내 동생을 지키는 자이다"라는 마음을 가지고 감동적으로 우리 모두를 이끌 리더가 간절히 필요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지금 우리 모두에게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라고 묻고 계십니다. 나는 어떤 종류의 인간이 되기로 작정했습니까? 적어도 사회적 지도력을 가진 사람을 꿈꾸고, 영향력있는 사람으로 살고자 하는 꿈이 있다면 아주 어렷을적부터 "나는 다른 이를 지키는 자가 되겠습니다." 하는 의식으로 무장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러한 마음을 키워가야 합니다. 나는 목회자로서 우리 성도들이 이런 의식을 가질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렇지 않는 사람이 지도력을 꿈꾸는 것은 죄악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