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기현의 살림운동
네가 어디 있느냐? (창 3:9) 본문
네가 어디 있느냐?
창 3:9
창3:9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부르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디 있느냐
인간이 하나님으로 부터 맨 처음 받은 질문은 "네가 어디 있느냐?"였습니다. 아담은 히브리어로 "아다마"인데 인간, 인류란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인생들에게 인류에게 왜 이런 첫 질문을 던지셨겠습니까?
하나님이 지으신 모든 존재는 서야할 자리, 앉아야 할 자리, 가야할 자리, 또 앉아서는 안될 자리, 가서는 안 될 자리가 있기때문입니다. 돌맹이 하나라도 있어야 할 자리에 있어야 아름답습니다. 반대로 놓어야 할 자리에 놓이지 않으면 추하고 거추장스럽고 눈에 거슬립니다.
부모와 자식의 자리, 교사와 학생의 자리, 경영자와 노동자의 자리, 성직자와 신자의 자리, 상인과 소비자의 자리, 작가와 독자의 자리, 모두가 다 그러합니다. 자리의 높고 낮음이 있을지라도, 있어야 할 자리에 있으면 그 자리는 존귀하고 아름다운 자리입니다. 그러나 편하고 좋은 자리만을 고집하면서 자기자리를 떠나버리고 지키지 못하면 불편해지고 복잡해지고 문제가 발생하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인류에게 첫번째 질문을 던지시면서 "네가 어디 있느냐?" 하는 이 질문을 던지지 않았셨을까 생각됩니다. 세상의 많은 문제들이 '네가 어디 있느냐'라는 질문에 대답 할 수 없을 때 생깁니다. 사실 이런 질문은 우리의 삶 속에서 계속되어야 할 질문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중심해서 아담과 하와에게 주어진 "네가 어디 있느냐?"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1. 하나님은 "네가 어디 있느냐?"는 질문을 하시기 위해서 친히 아담과 하와를 찾아와 주셨습니다.
동산 중앙에 있는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그 문제의 선악과를 따 먹은 아담은 하나님을 뵐 낯이 없었기에 그 아내와 함께 나무 그늘 밑에 숨어버리고 말았습니다. 본문 8절에 보면, "그들이 그 날 바람이 불 때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아담과 그의 아내가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은지라"했습니다. 우리를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게 하는 것은 그 어떤 것도 선악과입니다.
아담과 하와는 동산을 거닐면서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나는 죄인입니다. 주님은 어디 계십니까?"하고 불렀어야 합니다. 그러나 아담과 하와는 도리어 하나님을 멀리하였고 피하였고 숨었습니다.
아담은 하나님을 멀리하고 피하고 숨었지만 하나님이 친히 찾아와 주셨습니다. 하나님이 친히 찾아오셔서 아담을 부르시면서 물으셨습니다.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아담은 하나님을 찾지 않았으나 하나님은 아담을 찾오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아담이 지금 '서 있는 그 곳'이 어디인지를 물으셨습니다. 과연 하나님은 왜 이런 질문을 하셨겠습니까? 하나님은 아담이 어디 있는지 몰라서 혹은 그가 범죄한 사실을 알지 못하고 혹은 어디에 숨었는지 몰라서 아담에게 네가 지금 있는 곳이 어디냐고 물으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 먼저 아담과 하와에게 찾아와주셔서 "네가 어디 있느냐"고 물어주신 것 자체가 은총이요 축복입니다.
2. 하나님께서 "네가 어디 있느냐?"고 질문하셨을 때 아담이 "서 있는 곳 그 곳"은 어디었습니까?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숲에 숨어 있었습니다." 그곳은 아담이 서 있어야 할 곳이 아니었습니다. 서 있어야 할 곳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여호와의 낯을 피하여 숨어 있는 자가 되어 그 곳에 서 있는 아담에게, "왜 네가 그곳에 서 있느냐?"고 질문하신 것입니다. 다른 말로 표현한다면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는 뜻입니다.
인간의 사명을 물으신 물음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시면서 그들이 해야 할 숭고한 사명을 주셨습니다. 그런데 아담과 하와는 하라는 사명은 수행하지 않고, 하지 말라는 것만 해서 여호와의 낯을 피하여 지금 동산 나무 숲에 숨어 있는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나무 숲에 숨지 않고, 오히려 나무 숲 아래서 기도했다거나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했다면 상황은 달라졌을 것입니다.
빌립이 나다나엘을 데리고 예수님께로 왔을 때, 예수께서 나다나엘이 자기에게 오는 것을 보시고 그를 가리켜 이는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요 1:47)"라고 하셨습니다. 그런자 나다나엘이 "어떻게 나를 아시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셨습니다. 빌립이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을 때에 보았노라"(요 1:48).
우리가 살아가면서 잘잘못을 하면서 살지만 하나님이 찾으실 때, 불신앙의 자리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원하시고 기뻐하시는 있어야 할 자리에 있는 성도들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3. 하나님께서 "네가 어디 있느냐?"고 질문 하셨을 때 왜 그곳에 서 있었던 것입니까?
두려움에 사로잡혔기 때문입니다. 평상시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이 동산에서 거니시는 소리를 들었다면 당연히 기쁨으로 달려가 맞이해야 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함께 동행하는 즐거움을 누렸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두려움에 떨며 숨는 가련한 존재가 되었습니다. 죄를 범하고서는 누구라도 당당할 수 없습니다. 간혹 당당한 사람인듯 보이는 이들도 있겠지만 실은 그런 사람들이 더 겁이 많고 속에서는 두려움에 떨고 있는 사람들이라고 심리적인 전문가들은 말하고 있습니다.
나무 숲은 하나님이 주신 축복의 장소입니다. 나무 숲에는 쉼과 숨이 있는 곳이며 회복이 있는 축복된 곳인데 아담과 하와는 그곳에 있으면서도 무서워하고 두려워했습니다. 하나님의 간섭없이도 살만큼, 하나님 없이도 살 수 있을 만큼, 더 이상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계획같은 것은 필요없는 인생으로 살 수 있을것 같았는데 그런데 아니었습니다.
아담이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고 범죄한 후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숲 속에 숨었때, 하나님께서는 아담을 향해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하고 물으셨습니다. 오늘날도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간이 현재 어디에 있는지 깨닫기를 원하십니다.
우리 복음적인 그리스도인들은 항상 "자기가 지금 서 있는 그곳이 어딘인가?"를 살펴야 합니다. 하나님이 친히 찾아와 아담에게 주셨던 그 질문 "네가 어디 있느냐?"라는 질문을 받으면서 살아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네가 어디에 있느냐?'라고 각자 우리에게 물으실 때 '제가 여기 있습니다'라며, 우리가 마땅히 있어야 할 자리를 굳게 지키는 자로 있으면 우리 주님께서는 "내가 너와 함께 하리라"하시며 우리와 함께 해 주실줄로 믿습니다.
세상을 살아가면서 누가 우리에게 "네가 어디 있느냐?"라는 질문을 했을 때에 당당히 대답 할 수 있는 자리에 늘 서 있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행여라도 누가 우리에게 "네가 어디 있느냐?"라고 질문을 했을 때 그 때 떳떳한 자리가 아닌 곳에 있다면 그 순간이 자리를 고쳐 서는 기회로 삼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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