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기현의 살림운동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행 9:1~9) 본문

예수님의 질문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행 9:1~9)

유앙겔리온 2020. 8. 29. 17:23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행 9:1~9

9:1 사울이 주의 제자들에 대하여 여전히 위협과 살기가 등등하여 대제사장에게 가서
9:2 다메섹 여러 회당에 가져갈 공문을 청하니 이는 만일 그 도를 따르는 사람을 만나면 남녀를 막론하고 결박하여 예루살렘으로 잡아오려 함이라
9:3 사울이 길을 가다가 다메섹에 가까이 이르더니 홀연히 하늘로부터 빛이 그를 둘러 비추는지라
9:4 땅에 엎드러져 들으매 소리가 있어 이르시되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하시거늘
9:5 대답하되 주여 누구시니이까 이르시되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
9:6 너는 일어나 시내로 들어가라 네가 행할 것을 네게 이를 자가 있느니라 하시니
9:7 같이 가던 사람들은 소리만 듣고 아무도 보지 못하여 말을 못하고 서 있더라
9:8 사울이 땅에서 일어나 눈은 떴으나 아무 것도 보지 못하고 사람의 손에 끌려 다메섹으로 들어가서
9:9 사흘 동안 보지 못하고 먹지도 마시지도 아니하니라

  오늘 본문 말씀은 사울이라는 사람이 바울로 변하는 사건을 다루고 있습니다.
"사울"은 "큰 자"란 뜻을 가진 이름입니다. 그는 그 부모로부터 큰 자가 되어라는 의미의 이름을 받았고  큰 자가 되기를 소원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작은 자"란 뜻입니다. 바울에게 있어서 인생의 전환점이 되었던 이 사건을 우리는 "다메섹 사건"이라고 정의합니다.
 
  다메섹 사건은 자신의 생각이나 시대적인 흐름에 사로잡혀서 열심과 열정을 쏟아붙는 일도 하나님의 시각으로보면 크게 잘못될 수도 있는 일일 수 있음을 보여주는 그런 대표적인 사건입니다.

  오늘 본문 1,2절에 "사울이 주의 제자들에 대하여 여전히 위협과 살기가 등등하여 대제사장에게 가서 다메섹 여러 회당에 가져갈 공문을 청하니 이는 만일 그 도를 따르는 사람을 만나면 남녀를 막론하고 결박하여 예루살렘으로 잡아오려 함이라"고 했습니다. 사울은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는 십자가의 잔도 마다하지 않고 순종하셔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그리스와 그를 따르는 제자들과 그를 믿는 교회를 박해하기 위해서 "여전히 위협과 살기가 등등한"사람이었습니다.

  이전에 스데반이 죽을 때도 "증인들의 옷을 벗어 사울이라는 청년의 발 앞에 두었으며(7:58), 사울은 스데반의 죽음을 마땅히 여겼고(8:1), 그러고 나서 가가호호 그리스도인을 찾아 수색하여 남녀를 끌어내어 감옥에 보내면서 사울은 교회를 파멸시키시작했습니다(8:3). 그러자 그의 핍박의 손아귀를 피하여 마메섹으로 몇몇 그리스도인들이 도망하므로 이 탈주자들을 외국의 도시인 다메섹까지 잡으려 가기로 결심을 하고서 그들을 일소할 음모를 꾸미고는 대제사장에게 그것을 제가해 달라고 해서 쫓아간 것입니다.

  그는 굶주린 사나운 짐승같았습니다.
  사울은 이것이 열심히 사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나님 앞에 충성을 다하는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예수를 대적하고 살아가는 것이 바르게 사는 것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러나 잠언 14:2에서 보는 것처럼 "어떤 길은 사람의 보기에는 바르나 필경은 사망의 길이니라"하셨습니다. 내가 생각하기에는 옳은 길을 걷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대단히 잘못된 망상의 길이고 자기 파멸의 길이고 지옥의 길일 수 있습니다.

  주님은 사울의 본심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가 정말 하나님을 위해서 열심인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러나 그 길과 방향이 잘못되었음을 깨달아야 한다는 것을 알게 해주시고 싶으셨을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이미 죄인이지만 더 무서운 죄를 짓기 위해서 달려가는 그를 마메섹 도상에서 그 길을 막으시고 만나주신 것입니다. 
 
  "그 길로 게속해서 달려가는 것은 죄를 더 짓는 길이며 결코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사단을 이롭게 하는 일이다"는 것을 알려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에게 질문하신 질문이 오늘 본문에 소개되고 있습니다.
  3~4절 "사울이 길을 가다가 다메섹에 가까이 이르더니 홀연히 하늘로부터 빛이 그를 둘러 비추는지라 땅에 엎드러져 들으매 소리가 있어 이르시되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하시거늘"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라고 물으신 것입니다. 

  사울이란 사람이 바로 하나님을 위해서 열심을 내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그 열심이 잘못된 열심이었음을 보여준 그런 대표적인 사람이었습니다. 
  사울은 지금 자기 식대로 하는 것이 정말로 하나님을 위하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일로 생각했슴을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그런 사울이 안타까워서 그를 찾아와 만나주셨던 것입니다. 

  "네가 왜 그렇게 어리석은 짓을 하느냐, 네가 왜 그렇게 무지한 일을 하고 있느냐? 너 같이 똑똑한 사람이, 너 같이 열성적인 사람이, 어찌해서 그렇게 무지 가운데서 나오지 못하고 있느냐? 네 말대로 너는 율법에 정통한 사람이 아니냐, 네 말대로 충성스럽게 하나님을 섬기려고 하는 사람이 아니냐?

  그런데 너는 율법을 그렇게 공부했다고 하면서 어찌 그 말씀속에서 증거되었던 나를 알아보지 못하느냐? 어떻게 율법의 의로 흠이 없다고 하는 네가 정녕 그 율법의 참된 의미는 깨닫지 못하느냐? 이제 그만하거라. 그만하고 나를 따라오너라. 그러면 이제 너는 나의 큰 일꾼이 될 것이다"라는 의미에서 사울을 정감어린 소리로 부르시고 네가 하는 일을 나를 위하는 것이 아니라 나를 박해하는 일이다고 일깨워주신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우리 주님의 자비와 사랑을 다시한번 느끼게 됩니다. 흉악한 죄인 괴수라도 주님은 멸망의 길로 가기를 원치 않으십니다. 한 사람이라도 더 주님의 은총을 알고 주님의 생명의 은혜를 누리기를 원하십니다.

  더욱이 열심있는 사람의 그 열심이 그릇된 열심으로 잘못 쓰여지기를 원치 아니하시는 주님이심을 발견하게 됩니다. 하나님이 주신 그 좋은 열심, 그 능력, 그 특별함을 하나님을 위해서 정말 잘 쓰여질 수 있도록 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사울은 영리한 사람이었고 합리적인 사람이었고, 은혜를 사모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이 그렇게 찾아와 말씀하시자 자신의 모습을 들여다 볼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사실 이런 죄인이 세상에 어디 있겠습니까? 자신만 안 믿는 것이 아니라 남까지 못믿게 만들고 그냥 못믿게 방해하는 것만 아니라 더 나아가서 예수 믿는 사람들은 잡아 죽이려고 했던 가장 흉악한 죄인이 아닙니까? 그런데도 예수님을 그를 찾아가셔서 부르셨고 결국 그는 깨져서 그의 남은 모든 평생을 주님께 드리게 되었던 것입니다. 
  성도와 교회는 교회의 머리되신 주님의 지체와 몸이기에 성도와 교회의 박해에 대해서 성도와 교회를 왜 박해하느냐하시지 않고 "어찌하여 네가 나를 박해하느냐?고 하신 것입니다.
 
  사울은 말합니다. "당신은 누구십니까?" 이 말은 "몰라서 그랬습니다,"라는 뜻입니다.
 만약에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오신다면, 어떤 질문을 하실까요? 그리고 우리는 어떤 답을 하까요? 지금까지 어떻게 살았는가는 예수님께 그리 중요하지 않습니다. 앞으로 어떻게 살 것인가가  훨씬 더 중요합니다. 

 우리는 이렇게 고백할 수 있습니다. "제가 예수님을 잘 몰라서 그렇게 살아 왔습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아갈 방도를 우리에게 알려 주실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사울에게 6절 "너는 일어나 시내로 들어가라 네가 행할 것을 네게 이를 자가 있느니라 하시니"했습니다. 

  오늘 우리가 열심으로 하는 일이 그리스도를 위한 것입니까? 아니면 뜻하지 않았던 그리스도를 박해하는 일입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