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기현의 살림운동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요 21:15~25) 본문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요한복음 21:15~25
부활하셔서 갈릴리 바닷가로 찾아오신 예수님께서는 시몬 베드로에게 3번 질문하셨습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원문상으로 보면 그 묻는 의미가 약간씩 다릅니다.
첫번째 질문은 "네가 다른 사람들과 비교해서 보다 더 희생적으로 나를 더 사랑하느냐?"를 묻는 것이고, 두번쩨 질문은 "다른 사람과 비교가 아니라 네 자신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고 묻는 것입니다. 그리고 세번째 질문은 "네가 나를 친구같이 사랑하느냐?"고 묻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세번씩이나 같은 질문을 하시자 "근심하여 이르되 주님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처럼 베드로에게 근심할 때까지 사랑을 확인하신 이유는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사랑하고야 일할 수 있고 사랑하고서야 사명도 생기고 소명감도 생기고 사랑하고서야 죽도록 충성도 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마지 못해서 하는 일과 사랑해서 하는 일 중에 어떤 일이 더 효과적인 결과를 가져오겠습니까? 그것은 지극히 상식적인 것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은 자신이 하는 일을 사랑하기 때문에 하는 사람입니다.
사랑하면 보입니다. 사랑하는 만큼 보입니다. 사랑은 상대나 대상에 대한 관심이자 배려에서 출발해, 느끼고 공부하고 이해하고 공유하면서 완성되어 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탁구를 사랑하면 탁구장에 자주 가게 되고, 탁구의 룰과 수많은 기술을 터득하듯이. 오랜 세월 한 우물을 파면 사랑하는 상대와 대상의 전문가가 됩니다. 그리고 사랑하는 만큼 보고자 합니다. 사랑을 할 때는 어떤 환경 가운데서도 보고자 합니다. 보지 못할 때는 애가탑니다. 그러나 사랑이 식어지면 보고자 하는 마음이 식어지고 보지 않아도 애가타지 않게 됩니다.
그러기에 예수님께서는 그 어떤 것보다 베드로에게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으신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사랑을 확인하신 후에 "네 양을 먹이라"는 사명을 주셨습니다.
주님을 최고로 사랑하는 것이야 말로 다른 무엇을 사랑하기 위한 유일한 길입니다. 주님을 사랑하지 아니하고서도 나는 무엇을, 누구를 진실로 사랑한다는 하는 것은 참된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참으로 사랑하는 사람만이 예수님이 죽으시기까지 사랑하신 그의 양 때들을 책임질 수가 있으며 그의 양들을 사랑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항상 잊지 않아야 할 한 가지가 있다면 그것은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지 못했을 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우상숭배에 빠졌습니다. 부부간에도 사랑이 결핍되면 문제가 발생하게 되는 것입니다.
주님을 진실로 사랑하지 못하는 사람은 진실되게 그분을 섬길 수가 없고 그분을 위해서 일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것을 예수님은 아시고 베들에게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여러가지 측명에서 확인하셨던 것입니다.
1920년대 후반에 미국 메사추세츠주의 법정에서 흥미 진진한 사건을 다룬 적이 있었습니다. 어느날 부닷가를 거닐던 한 사람이 로프에 걸려 그만 차갑고 깊은 바다 속으로 빠지게 되었습니다. 원래 수영을 할 줄 모르던 사람인데다가 갑자기 차운가운 물속에 빠지는 바람에 다리에 쥐까지 나서 그는 물위에 떠 있을 수 없었습니다.
"사람살려요!"
그는 잠시 동안 허우적대며 도와 달라고 소리치디가 그만 물 속으로 깊이 빠져 버리고 말았습니다. 잠시후 그의 친구들이 달려와 구하려고 있을 때는 너무 늦어 이미 그의 생명은 끊어진 뒤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물에 빠진 사람으로부터 불과 몇 미터도 못되는 거리에 젊은이 한 사람이 의자에 기대어 앉아서 한가롭게 일광욕을 즐기고 있었다는 점입니다.
그는 분명히 물에 빠진 사람이 "사람 살려줘요"라고 애원하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또한 수영에도 능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무심하게도 그 사람이 죽어가는 것을 바라만 보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을 알게 된 익사자 가족은 그 사람의 이러한 행동에 분개해서 소송을 제기했던 것입니다.
"사람의 탈을 쓰고 도저히 이럴 수는 없습니다. 사람이 죽어가는 것을 그냥 보고만 있다니요! 그것도 수영을 할 수 있는 사람이 말입니다."
그러나 결과는 익사자의 가족이 패소한 것입니다. 법정의 판결은 부둣가에 앉아 있던 사람이 물에 빠진 사람을 구해야 할 법적인 책임이 없다는 이유에서 였습니다.
그렇습니다. 법적인 책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이 만약의 경우 서로 사랑하는 사람이었었다면 과연 그런 행동을 했겠습니까? 사랑이 없으니 무관심한 것입니다 사랑이 없으니 건질 생각도 안든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베드로에게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이 날 사랑하느냐고 물으셨던 것입니다.
그 리고 사명을 맡기신 후에 다음과 같은 말씀을 하셨습니다. "젊어서는 네가 스스로 띠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팡릉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띠우고 원치 않는 곳으로 데려가리라(요 21:18)
베드로는 젊어서는 스스로 띠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자신이 원하지 않을지라도 주님이 원하시는 곳으로 성령이 이끄시는 대로 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주님이 이 말씀을 하신 의미는 베드로에게 주어진 양을 먹이는 이 사명은 이제 거역할 수 없다는 강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요한은 24~25절에서 결론적인 말씀을 첨가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자신의 증거가 참이라는 것입니다. 요한은 요일 1장에서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바요, 주목하고 손으로 만진 바"라고 했습니다. 두번째는 예수님의 행하신 일을 다 기록한다면 이 세상이라도 이 기록된 책을 두기에 부족할 것이라는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자신이 아무리 들은 바고 눈으로 본바고 주목하고 손으로 만진바 된 에수님이지만 그것을 다 기록한다는 것은 자신의 능력으로는 부족했음을 속직히 시인하고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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