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기현의 살림운동

네가 스스로 하는 말이냐?(요 18:33~38) 본문

예수님의 질문

네가 스스로 하는 말이냐?(요 18:33~38)

유앙겔리온 2020. 2. 17. 23:59

네가 스스로 하는 말이냐?

요 18:33~38


18:33 이에 빌라도가 다시 관정에 들어가 예수를 불러 이르되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18:34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는 네가 스스로 하는 말이냐 다른 사람들이 나에 대하여 네게 한 말이냐

18:35 빌라도가 대답하되 내가 유대인이냐 네 나라 사람과 대제사장들이 너를 내게 넘겼으니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18:36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 만일 내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한 것이었더라면 내 종들이 싸워 나로 유대인들에게 넘겨지지 않게 하였으리라 이제 내 나라는 여기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

18:37 빌라도가 이르되 그러면 네가 왕이 아니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네 말과 같이 내가 왕이니라 내가 이를 위하여 태어났으며 이를 위하여 세상에 왔나니 곧 진리에 대하여 증언하려 함이로라 무릇 진리에 속한 자는 내 소리를 듣느니라 하신대

18:38 빌라도가 이르되 진리가 무엇이냐 하더라 이 말을 하고 다시 유대인들에게 나가서 이르되 나는 그에게서 아무 죄도 찾지 못하였노라

18:39 유월절이면 내가 너희에게 한 사람을 놓아 주는 전례가 있으니 그러면 너희는 내가 유대인의 왕을 너희에게 놓아 주기를 원하느냐 하니

18:40 그들이 또 소리 질러 이르되 이 사람이 아니라 바라바라 하니 바라바는 강도였더라


    오늘 저녁은 예수님의 질문 중에서 본디오 빌라도에게 질문하신 "이는 네가가 스스로 하는 말이냐 다른 사람들이 나에 대하여 네게 한 말이냐?"하신 질문을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이 질문의 배경에 대해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본디오 빌라도라는 인물은 우리 믿음의 내용으로 고백하는 사도신경에서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십자가에 목막혀 죽으시고'란 부분의 장본인입니다. 왜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셨다고 기록했겠습니까? 어떻게 생각하면 빌라도보다 예수님을 잡아 부당한 재판을 진행하여 죽이려 했던 유대인들이야말로 이 불명예스런 기록의 진짜 주인공에 걸맞은 자들입니다. 그럼에도불구하고 그렇게 한것은 빌라도가 역사적으로 공증된 인물이기 때문에 사도신경에 삽입한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 말은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 사건이 역사라는 시간과 공간에서 일어난 분명한 사실임을 증명하기 위해 죄인 중 가장 '공신력과 역사성을 갖춘 죄인'으로서 사도신경에 빌라도의 이름을 내세웠던 것입니다.  죄인의 대표이자, 역사성을 가진 인물로서 사도신경에 기록된 것이지, 빌라도에게만 책임을 전부 뒤집어쓰게 하려는 의도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의 지도자들이 예수님을 체포했지만 그들이 원하는 것은 단순한 형벌이 아닌 사형언도였습니다. 그런데 당시 유대인들은 사형을 언도할 권한이 없었습니다. 오직 로마 총독의 권한이었습니다. 그래서 유대지도자들은 저녁내내 예수를 끌고다니면서 심문하고 괴롭히다가 새벽이 되어서야 예수님을 로마총독인 본디오 빌라도에게 끌고 간 것입니다.


  그리고 당시 로마에서 파송된 총독으로부터 사형언도를 받아낼 수 있는 죄목으로 고발을 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자신을 유대인의 왕"이라고 한다는 것입니다(눅 23:1~3).  다시 말해서 로마에 반역을 꾀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재판하게 된 총독 본디오 빌라도는 재판의 과정 속에서 제일 먼저 예수님께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하고 물었던 것입니다.


  이 질문은 로마의 입장에서는 재판을 하지 않을 수 없는 죄목입니다. 당시 유대나라는 로마에 의해서 지배를 받고 있었고 그 모든 지배는 총독을 통해서 이루어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유대에는 다른 왕이 있어서는 안됩니다. 그것은 로마에 반역을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반역죄는 사형일 수 밖에 없어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의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죽음으로 몰고하기 위해서 본디오 빌라도에게 예수님을 끌고가서 이 사람이 스스로 자신을 유대인의 왕이라고 했으니 재판을 해달라고 요구를 한 것입니다. 그러니 본디오 빌라도는 재판을 아니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재판을 열게 되었고 빌라도는 형식적으로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라고 질문한 것입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심문에 대해서 침묵하셔서 신문하던 이들이 이상히 여기기까지 했던 예수님께서 본디오 빌라도의 이 질문에 대해서 반응을 보이시고 그에게 뜻밖의 질문을 하신 것입니다. 심문을 했던 빌라도가 졸지에 예수님의 질문에 답을 해야 할 처지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는 네가 스스로 하는 말이냐 다른 사람들이 나에 대하여 네게 한 말이냐"  주님께서 이렇게 질문하신 것은 본디오 빌라도가 재판관이지만 예수님을 바로 알기를 바래서였습니다.


  만약의 경우 빌라도 여기서 주님의 의도를 깨닫고 하나님의 아들이신 주님을 왕으로서 만난다면 그는 틀림없이 구원을 받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빌라도는 주님의 마음을 모르는 채 예수님을 죄없다고 하면서도 결국은 자신의 왕으로 받아들이거나 지켜내지 못하고 사형판결을 하고 맙니다. 빌라도 개인의 입장에서는 자신에게 주어진 좋은 기회를 놓쳤던 것입니다. 

  

  지금도 주님은 본디오 빌라도에게 질문한 동일한 질문을 오늘 우리 각자에게 하신다는 사실을 알았으면 좋겠습니다. 

"네가 스스로 하는 말이냐 다른 사람들이 나에 대하여 네게 한 말이냐?"


  주님은 이 질문 앞에서 우리가 스스로 하는 말로 "당신은 우리의 왕"이십니다. "주님이십니다." 하고 말하기를 바라십니다. 그리고 그렇게 믿고 알았다면 빌라도처럼 기회를 놓치지 않고 주님을 영접하고 주님을 위해서 살기를 바라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인격적으로 주님을 만나면 우리 인생은 변합니다. 바뀝니다.


  우리가 예수님은 우리의 왕으로 스스로 말할 수 있을 때, 우리는 주를 위해 나의 삶을 드리는 것이 그렇게 어렵지 않다는 것을 깨닫게 될 줄로 믿습니다. 주님은 이시간도 단지 우리가 남이 전달해주어 아는 지식으로 주님을 알기를 원치 아니하십니다. 내가 체험해서 스스로 알기를 원하십니다. 지식적으로만 알면 우리는 종교인이 됩니다. 종교인은 변화가 없습니다. 우리는 종교인이 아니라 신앙인이 되어야 합니다. 믿음의 백성들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 스스로를 돌아보십시다. 내가 지금까지 알고 있는 주님에 관한 지식들이 단순히 남에게 들어서 안 것인지, 내가 주님을 체험적으로 알고 있는 것인지 돌아보시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욥을 잘 압니다. 욥도 고난 이전에는 하나님에 대해서 "귀로만 듣던 주"를 고난을 겪으면서 "주를 눈으로 직접 목도하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눈으로 목도하게 되었을 때 그의 믿음은 "정금같이 되어 나오게 되었다"고 고백했습니다. 


  성도 여러분, 

주님을 소문으로 알았습니까? 들어서 알았습니까? 배워서 알았습니까? 아니면 직접 체험해서 알았습니까? 하루 하루 신앙생활하면서 우리는 다져져야 합니다. 삶 속에서 체험해야 합니다. 성경에 기록된 성삼위 일체에 대한 수 많은 지식들을 우리가 믿고 기도하고 구하고 받아서 우리의 삶 속에서 경험해야 내 것이 됩니다. 그래서 호세아 선지자는 호 6:3절에서 "우리가 힘써 여호와를 알자 힘써 알자"라고 한 것입니다. 


  주님은 오늘도 우리에게 본디오 빌라도에게 주신 동일한 질문을 던지고 계신 것입니다.

  "네가 스스로 하는 말이냐 다른 사람들이 나에 대하여 네게 한 말이냐?"


  본디오 빌라도가 예수님에 대해서 "유대인의 왕이냐?"한 말이 스스로 한 말인지, 아니면 다른 사람들이 하는 말인지를 궁금해하셨던 것처럼 우리가 고백하는 것들이 스스로 한 것인지 아니면 단순히 남의 말 듣고 한 것인지 궁금해하십니다. 그리고 주님은 우리의 고백이 남의 말 듣고 흉내내는 고백이 아니라 우리가 스스로 고백하는 고백을 하기까지 주님을 알고 믿기를 바라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