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기현의 살림운동

어찌하여 두려워하며 의심이 일어나느냐?(눅 24:36~43) 본문

예수님의 질문

어찌하여 두려워하며 의심이 일어나느냐?(눅 24:36~43)

유앙겔리온 2020. 6. 30. 08:14

어찌하여 두려워하며 의심이 일어나느냐?
눅 24:36~43

눅24:36 이 말을 할 때에 예수께서 친히 그들 가운데 서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하시니
눅24:37 그들이 놀라고 무서워하여 그 보는 것을 영으로 생각하는지라
눅24:38 예수께서 이르시되 어찌하여 두려워하며 어찌하여 마음에 의심이 일어나느냐
눅24:39 내 손과 발을 보고 나인 줄 알라 또 나를 만져 보라 영은 살과 뼈가 없으되 너희 보는 바와 같이 나는 있느니라
눅24:40 이 말씀을 하시고 손과 발을 보이시나
눅24:41 그들이 너무 기쁘므로 아직도 믿지 못하고 놀랍게 여길 때에 이르시되 여기 무슨 먹을 것이 있느냐 하시니
눅24:42 이에 구운 생선 한 토막을 드리니
눅24:43 받으사 그 앞에서 잡수시더라

  부활하신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여러 번 나타나신 걸로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도 그중에 하나입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제자들이 모여 있던 곳에 친히 나타나셔서 그들 가운데 서서 말씀하셨습니다.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그런데 그때 제자들은 그들에게 말씀하신 예수님을 영으로 생각하여 "놀라고 무서워하였다"라고 했습니다.
 
  보통 사람이라면 이러한 상황에서 그럴 수 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제자들이라고 해서 특별난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그들도 보통 사람에 불과한 자들이었습니다. 그러니 얼마나 놀랐겠습니까? 죽은 자가 눈앞에 딱하고 나타났으니, 뭐라고 생각했겠습니까? 제자들은 자신들이 보고 있는 것을 유령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아마 우리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아무리 믿음으로 그것을 바라보고 살았다고 할지라도 죽었던 자가 직접 눈앞에 나타나면 반가움보다는 놀람이 먼저일 것입니다. 제자들의 마음에 의심과 의혹이 작동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두려움과 의심의 마음이 그들을 사로잡았습니다.

  며칠 전에 우리나라 병원에서 의사가 사망 진단을 하고 영안실로 내려 보냈는데 영안실 직원이 죽은자의 얼굴에 덮어놓은 천을 벗기자 숨을 쉬고 있는 것이 아니었겠습니까? 그래서 병원이 발칵 뒤집힌 적이 있었습니다. 유족들은 병원에 항의 하고 의사와 병원은 사망을 진단할 때는 분명히 죽었는데 기적적으로 살아난 것을 우린 들 어떻게 하겠느냐? 이것은 기적이다. 이렇게 넘어간 줄로 압니다.

  멀쩡히 산 자를 의사나 병원이 죽였으면 큰 문제가 될 것이나 죽은 자가 기적적으로 살아났다는 것을 어쩌겠습니까?
  세상에는 우리가 다 이해하지 못할 일들이 참 많습니다. 다 이해하려고 하면 안됩니다. 믿고 받아들여야 할 것은 믿고 받아들여야 합니다.
어떻든 예수님께서 죽은자 가운데서 살아나셔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시자 제자들은 두려워하고 마음에 의심이 가득한 눈으로 바라보았습니다.  
  이 때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속 마음을 들여야 보시고 제자들을 향하여 "어찌하여 두려워하며 어찌하여 마음에 의심하느냐?"하고 물으셨던 것입니다.

  인간의 "두려움과 의심"은 마음의 영적 상태가 불안정하고 불편스러울 때 나타나는 정서적인 현상입니다. 두려움과 의심은 인간의 마음에서 일어나는 것입니다.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 현대인들 가운데도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두려움과 의심의 노예로 살아가는지 모릅니다. 옛날에 비하면 얼마나 살기 좋아졌습니까? 그러나 오히려 더욱 두려움과 의심에 쌓여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마음의 평안이 물질문명과 주어진 생태환경으로 해결될 문제가 아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마음에서부터 시작된 두려움과 불안으로 인간의 마음에 평안을 잃을 때, 우리의 마음의 상태가, 영적 상태가 불안정하고 불편하고 흔들리기 때문에 두려움과 의심의 노예가 되는 것입니다.

  두려움과 의심을 멈출 수 있는 것은 세상이 주는 평안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시는 평강입니다.
세상에서의 죽음은 되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넌 것입니다. 그것도 보통 죽음이 아니라 십자가에서의 죽음은 그것은 보통의 죽음이 아니라 숨통을 완전히 끊어놓은 타살의 죽음입니다. 사형을 집행하는 것입니다. 자연사가 아닙니다. 자연사야 죽었다가 기적적으로 살아나는 일도 간혹 있겠지만 예수님의 죽음은 사형을 집행하고 죽음을 확인하고 무덤에 장사해놓은지 사흘이 지난 죽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살아나셔서 제자들 앞에 나타났습니다.

  그러니 놀랍고, 두렵고, 의심스러울 뿐이었습니다. 이런 제자들의 마음을 예수님은 알고 계셨습니다. 그렇다면 왜 예수님이 제자들을 찾아 오셨을까요?

  두려움과 의심의 문제를 해결해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더 이상 두려움과 의심이 제자들의 사고를 점령하지 못하도록 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 의심과 절망의 마음을 신뢰와 담대함의 마음으로 바꾸어 제자들을 다시 세우려 하셨던 것입니다. 의심의 마음은 두려움을 가져옵니다. 믿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믿고 신뢰해야만 진정으로 부활의 능력을 경험할 수 있음을 가르쳐주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두려움과 의심을 이겨야 앞으로 부활의 증인으로서 교회를 세워갈 것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두려움으로 흔들리는 제자들을 향해서 제일 먼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 손과 발을 보고 나인 줄 알라 또 나를 만져 보라 영은 살과 뼈가 없으되 너희 보는 바와 같이 나는 있느니라"
그러시고는 "손과 발"을 보여주셨습니다.

  기독교 신앙은 상상이 아닌 체험입니다. 허상이 아니라 실상입니다. 지식이 아닌 경험입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셔서 두려움과 의심에 빠져 있는 제자들에게 보여주신 것은, 바로 못 자국이 선명히 남아있는 당신의 손과 발이었습니다.
기독교 신앙은 학자들이 고민하고 연구하면서 책상 앞에서 만들어낸 이론이 아닙니다. 이 땅의 고통 받는고통받는 현장에서, 모든 것이 무너진 자리에서, 절망하고 낙심하는 삶의 고통 속에서 만들어진 것이 바로 기독교 신앙입니다. 예수님은 낮은 자, 고통받는 자, 외로운 자, 힘든 자의 자리에 직접 찾아가셔서 믿으라고 말씀하십니다. 친히 몸과 몸으로 마주하시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의 신앙이 어떻게 해야 성숙해질 수 있는지 아십니까?
주님의 이름으로 기도해서 응답을 받아봐야 합니다. 직접 기록된 성경을 펴서 주님의 말씀을 읽고 단순히 기록된 말씀이 아니라 이 말씀이 나를 위한 살아계신 하나님의 음성으로 들리는 경험을 해봐야 됩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예배드리고 뜨겁게 찬양해봐야 됩니다.

  우는 자와 함께 울고 웃는 자와 함께 울어보아야 합니다. 힘든 자의 자리에 들어가서 그 아픔을 예수님의 마음으로 품어보고 그들을 섬겨보아야 합니다. 그렇게 해보아야 '아, 하나님이 살아계시는구나. 예수님이 나 때문에 저 십자가 골고다 언덕을 가셨구나. 내 죄를 대신 지시고 고통스럽게 죽으셨구나. 예수님의 죽음은 하나님의 사랑의 사건이구나. 그 은혜로 내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구나.' 하는 신앙의 기쁨과 감격을 얻게 됩니다. 그때서야 가슴이 뜨거워지는 것입니다. 그렇게 신앙은 자라고 성숙해지는 것입니다.

  체험하지 않으면, 예수님과 마주치지 않으면, 다메섹 도상에서 바울사도가 했던 것처럼 부활의 주님과 만나지 않으면, 우리의 신앙은 아버지의 신앙, 어머니의 신앙으로 멈춰 섭니다. 아내의 신앙, 남편의 신앙으로 멈춰 서고 맙니다. 그것은 결코 내 신앙이 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이 원하시는 것은, 그런 누구의 신앙이나 유산으로서의 신앙이 아니라 바로 '나의 신앙'입니다. 그래서 "네 믿음으로 구하고, 네 믿음대로 되리라"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자신의 손과 발을 보여주시는 것은, 부활했음을 자랑하시려는 것이 아닙니다. 그 능력을 과시하시기 위함이 아니었습니다. 억압받고 압제받던 의심의 굴레에서 이제 그만 벗어나라는 것입니다. 실재하는 몸으로 위로를 전하시며, 이제는 신뢰의 사람으로 인생을 살라고 가르쳐 주시는 것입니다.

  두려움과 의심으로는 능력을 펼칠 수 없습니다. 두려움과 의심으로 평강의 역사를 만들어낼 수 없습니다. 두려움과 의심으로는 믿음의 역사를 만들어낼 수 없습니다. 두려움과 의심으로 소망의 사람이 될 수 없습니다. 신뢰가 사랑과 회복의 역사를 일으킵니다.

  이 시대의 철학과 학문은 두려워하도록 의심하도록 권장합니다. "두려워하는 것이 인간이다. 의심하는 인간이 과학적인간이다." 하지만, 의심은 결코 아무것도 해결할 수 없습니다. 의심하면 두려움이 생기고, 남에 대한 미움이 생깁니다. 원망이 생기고 불평이 생깁니다. 아무도 믿지 못하기에 심성이 사나워지기 시작하고, 분노에 빠지게 되고, 결국 자신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 깊은 상처를 주게 됩니다. 왜 이렇게 남을 조롱하고, 비아냥거리며 남을 무너뜨리고 싶어 합니까? 내 속에 평강이 없기 때문입니다. 의심의 정서가 만연되어있기 때문에 곳곳에서 다툼과 갈등이 끊어지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사회의 위기도, 교회의 위기도 의심의 정서를 미덕으로 삼는 데에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예수 믿는 우리들이 먼저 예수님의 부활의 은총을 경험하면서, 두려움과 의심의 상한 감정을 치료해야 합니다. 두려움과 의심 대신에 담대함과 신뢰의 감정으로 바꿔나가야 합니다. 바로 거기에 생명의 역사가 있습니다. 거기에 사랑과 회복의 역사가 있습니다. 이것이 나를 살리고 가정과 교회와 사회와 나라를 살리는 길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 그 못자국난 손과 발을 만지면서 무한한 긍정의 에너지, 신뢰의 에너지, 평강의 에너지를 만들어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