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기현의 살림운동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눅 18:1~8) 본문

예수님의 질문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눅 18:1~8)

유앙겔리온 2019. 7. 11. 14:16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눅 18:1~8


18:1 예수께서 그들에게 항상 기도하고 낙망하지 말아야 할 것을 비유로 말씀하여

18:2 이르시되 어떤 도시에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을 무시하는 한 재판장이 있는데

18:3 그 도시에 한 과부가 있어 자주 그에게 가서 내 원수에 대한 나의 원한을 풀어 주소서 하되

18:4 그가 얼마 동안 듣지 아니하다가 후에 속으로 생각하되 내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을 무시하나

18:5 이 과부가 나를 번거롭게 하니 내가 그 원한을 풀어 주리라 그렇지 않으면 늘 와서 나를 괴롭게 하리라 하였느니라

18:6 주께서 또 이르시되 불의한 재판장이 말한 것을 들으라

18:7 하물며 하나님께서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 주지 아니하시겠느냐 그들에게 오래 참으시겠느냐

18:8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속히 그 원한을 풀어 주시리라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하시니라


    오늘 본문 말씀은 예수님께서 그 제자들과 믿는 자들에게 항상 기도하고 낙망치 말아야 될 것을 가르치기 위해서 주신 말씀입니다. 사람은 낙망하기 쉬운 존재입니다. 마귀가 사람에게 사용할 때 가장 좋은 무기는 낙망의 무기라고 합니다. 


  우리는 선한 일 하다가도 돌아오는 것이 비난이고, 누가 알아주지 않고, 지치면 무슨 생각부터 합니까? "그만 둘까"하는 생각입니다. 무슨 일을 시도했다가 속히 결말이 나지 않을 때도 우리는 포기하고 싶은 유혹에 빠집니다.

 

  기도하는 사람들도 그렇습니다. 기도하다가 즉시 응답이 없으면 기도를 포기하고 싶은 유혹에 빠지기도 하고 또한 더러는 쉽게 기도를 포기해버리고 맙니다. 이러한 사람들을 위하여서 예수님께서는 오늘 이 말씀을 주신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불의한 재판관은 공평하거나 객관적인 사람이 아니라는 것이 분명합니다. 원래 재판관은 사람들에게 정의를 행하는 착실한 사람일 것으로 기대되는 것이 보통 사람의 생각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비유에 나오는 이 재판관은 줄곧 사악한 사람이었습니다. 재판관이 되어서는 않될 사람이 재판관이 된 것입니다.


  예수님 시대나 지금 이 시대는 권력이 바로 서야 합니다. 그런데 권력이 타락하고 권력이 불의하고 권력이 오히려 범죄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어떤 권력보다도 재판관의 권력이 부패하면 안됩니다. 마지막 억울한 사람이 기댈 곳이 어디겠습니까? 재판입니다. 법입니다.

  공정한 판결을 해야 합니다.


  오늘 예수님의 비유에 등장하는 재판관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재판관이었기 때문에 불의하고 사악한 재판관입니다.

  이스라엘 나라에서는, 유대에서는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재판관이란 있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법은 곧 모세의 법이며 율법이며 하나님이 주신 법입니다. 그럼으로 하나님을 무시하고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재판을 한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가 없는 일입니다.


  이 재판관은 사람을 무시하는 재판관이었기 때문에 불의한 재판관입니다.

  법의 출발점은 만인이 법 앞에 평등하다는 생각입니다. 그런데 이 재판관은 사람을 무시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니 제대로된 판결이 나올 수가 없었습니다.

 

  간청하는 과부쪽을 한번 살펴보십시다. 이 과부가 사악하고 불의한 재판관을 상대한다는 것은 처음부터 무리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렇게 극과 극에 위치해 있는 두 사람을 대비시켜가면서 이 비유를 하신 것입니다.


  이 불쌍한 과부는 불의한 재판관이 요구한 것을 알았는지 너무 순진해서 모르고 있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이 불의한 재판은 하나님도 사람도 무시한 재판관이었기 때문에 오직 더 높은 권세와 재물에 정신이 팔린 사람이라고 밖에 생각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 과부는 그런 것을 충족해줄 수 있는 그 어떤 여력도 없었습니다.

 

  이 여인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눈치코치도 없이 "자주 가서 내 원수에 대한 나의 원한을 풀어주소서" 간청하는 것 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불의한 재판관은 처음부터 들어줄 생각이 전혀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과부가 자주와서 간청을 하므로 귀찮고 번거로우니 들어주기로 한 것입니다.


  얼마나 자주였느냐하면 "반거로울만큼" "나를 괴롭게 하리라"할 만큼 자주였습니다. 이 여인은 그 권세가인 재판관 앞에서 달리 할 수 있는 방법이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불의한 재판관과는 비교할 수 없는 자비가 풍성하시고, 사랑이 풍성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하물며 그 좋으신 하나님께서 그 택하신 백성의 밤낮 부르짖는 기도를 들으시고 원한을 풀어주 시지 않겠느냐? 반문을 하시면서 속히 그 원한을 풀어주시는 하나님이심을 말씀하고 있습니다(8).


  주님은 이 비유를 통해서 어떠한 경우라도 기도를 쉬지 않기를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기도하기를 권면하고 있는 것입니다. 계란으로 바위치기 같은 경우가 오늘 불의한 재판관과 간청하는 과부의 관계입니다. 재판관하면 가장 권세 있는 자요 과부하면 이는 아주 약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이 불의한 재판관도 과부의 원한을 풀어주겠다는 결심을 하게 되었습니다.


  어떻게 이 불의한 재판관하고 하나님을 감히 비교할 수 있겠습니까? 이것은 아주 극단적인 비유이고 최악의 비유입니다.

 

  그리고 이런 사람의 기도를 이런 동기에서라도 들어주는데 왜 하나님께서 들어주시지 않겠느냐 그러므로 낙심하지 말고 항상 기도하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비유의 말씀을 마치고 "하물며 하나님께서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 주지 아니하시겠느냐 저희에게 오래 참으시겠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속히 그 원한을 풀어주시지 않겠느냐" 하셨습니다.

  

  또 마태복음 7장 11절에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죄를 대속하기 위해 독생자도 아끼지 않고 내준 분입니다. 때문에 그의 사랑하는 자녀의 기도에 신속히 응답하기 원하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기도한 것에 대해서 응답받지 못한다면 반드시 그만한 이유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죄로 인해 막힌 담이 있어서 하나님께서 응답하실 수 없거나, 기도의 양이 부족하거나, 또는 아직 때가 되지 않아서거나 더 좋은 것을 주시려는 것이나. 아뭍은 뭔가 내가 이해하지 못한 하나님의 또다른 계획이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결론적으로 말씀을 드리자면 이렇게 불의한 재판관도 끈질긴 찾아와서 원한을 풀어달라고 간청했을 때 과부의 청원을 들어줄 의사가 전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들어주었는데 하물며 "구하라" 주실 것이라고 약속하시고 또한 주시기를 즐겨하시는 하나님 아버지께서 왜 끈질기게 기도하면 주시지 않겠느냐?는 것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속히 그 원한을 풀어 주시리라'고 약속하시면서 주님이 묻고 계신 것이 있습니다.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하신 것입니다. 즉, 여기서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믿음은, 해결해 주실 때까지 계속해서 하나님께 기도로 나아가서 귀찮게 요구하는 믿음입니다. 우리가 어떤 문제나 소원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갈 때, 우리는 얼마나 오래 인내하고 기도를 계속합니까? 얼마간 기도하다가 하나님께서 더 이상 듣지 않으신다고 생각하고 낙심하여 기도를 멈추지 않습니까?


  주님께서 오실 때에, 우리는 결코 낙심하지 않고 들어주실 때까지 하나님께 끈질기게 나아가서 기도하는 그런 믿음을 가지고 있야 합니다. 우리 눈에 현재 어떻게 보이던지간에 끈질지게 하나님께 밤낮 부르짖는 그런 믿음을 가지고 있어야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