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기현의 살림운동
소생하는 강물의 비유(에스겔 47:1~12) 본문
오늘 저녁에 함께 나눌 비유의 복음은 "소생하는 강물의 비유"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에스겔 선지자에게 하나님의 백성이 이방나라 바벨론에 포로로 종살이하며, 지치고 낙심할만한 처지에서 하나님의 백성이 다시 소생하고 번성하여 창성케 될 것을 깨닫게 해 주시려고 장래에 대한 환상을 주셨습니다. 그것은 성전문지방으로부터 흘러내리는 물줄기의 환상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꿈에 물줄기만 보아도 기분이 좋은 민족입니다. 왜그런지 아십니까?
예루살렘에서 가장 필요하고 귀중한 것의 중의 하나가 물이기 때문입니다. 예루살렘의 성안에는 시냇물이 없습니다. 그리고 예루살렘 부근에도 물을 공급해 줄만한 강이 없기 때문입니다. 다만 실로암 못이 있는 곳에 작은 시내가 하나 있을 정도 입니다. 그래서 성안에서는 언제나 물을 확보하기 위한 피나는 노력을 해야 했습니다. 항상 비가 오면 물을 받아쓸 수 있도록 항아리들을 준비하는 일들이나 물을 저축할 수 있는 그런 일들을 항상 해야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에스겔의 환상은 예루살렘에 풍부한 물이 공급되어 예루살렘의 동쪽에 있는 사막으로 된 골짜기 까지도 물을 흠뻑 공급할 수 있게 된 것을 본 것입니다. 그러니 얼마나 좋은 환상이었겠습니까?
꿈에도 이런 것을 보면 기분이 좋습니다. 그렇지 않겠습니까?
우리가 꿈을 꾸어도 왠지 찜찜한 꿈이 있고 기분이 날아갈 것같은 상쾌하고 기분 좋은 꿈이 있지 않습니까?
에스겔으 꿈은 바로 기분이 날아갈 것같은 그런 상쾌한 꿈이었습니다.
여러분, 이 강물은 눈에 보이는 어떤 실제적인 강물에 대한 언급이 아닙니다. 이 강물은 우리의 삶을 바꾸시는 하나님의 강력한 임재 속에서 나오는 성령의 능력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비유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풍성한 강줄기의 발원지가 어디었습니까?
바로 동쪽으로 향하고 있는 예루살렘의 성전이었습니다. 성전은 하나님의 처소입니다(시 11:4). 무소부재하시고 천지에 충만하신 하나님이 우리 인간에게 찾아와 만나주시고, 또한 인간이 하나님을 만날 수 있도록 하나님이 정한 곳이 바로 성전입니다. 이 집에 와서 기도하면 그 기도를 들으시며 이 성전을 바라보고 기도를 할지라도 들어지시겠다고 하신 성전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구약 성전을 통하여 그리스도를 계시하시고, 그리스도가 성전이심을 계시하셨습니다(요 2:19-21). 그렇기 때문에 또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받은 성도가 모이는 교회 역시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살아계신 하나님의 집이요 진리의 기둥과 터가 된 성전인 것입니다(고전 6:19; 고후 6:16; 딤전 3:15).
이스라엘 백성의 생명의 발원지가 바로 성전이었던 것입니다.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 복음적인 그리스도인들의 성전의식도 바로 이와 같아야 합니다. 그래서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 복음적인 그리스도인들도 성전은 생명의 줄기가 발원하는 곳임을 알아야 합니다.
성전문지방에서부터 풍성한 물줄기가 흘려들어간 곳은 어디였습니까?
죽음의 골짜기였습니다.
여기서부터 발원되고 있는 물줄기는 지금까지는 한번도 풍성한 물이 공급된 적이 없어서 죽음의 땅이며 죽음의 골짜기와 같은 곳으로 흘러간 것입니다. 이 물줄기는 수천년을 버려져 있었던 곳에 흘러 내려서 생명이 살 수 있는 곳으로 변화를 시켜 놓았던 것입니다.
이 죽음의 골짜기는 직접적인 이스라엘 한 지역의 골짜기의 상태를 말하여주기도하는 것이지만 또한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영적상태를 상징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영적 상태가 죽음의 골짜기와 같이 죽어 있는 상태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에스겔은 이 절망의 골짜기, 죽음의 골짜기에 소망이 생기고 생명이 나타나는 환상을 본 것입니다.
이러한 변화는 다른 것으로는 불가능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세상에서는 도저히 불가능한 것을 하나님의 능력으로 변화시키는 큰 은사를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의 힘으로 능으로 아니된 것도 하나님의 신으로 되는 줄로 믿습니다.
처음 성전 문지방에서 흘러 내리기 시작한 물은 그 깊이가 겨우 사람의 발바닥을 적실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점점 흘러가면서 발목까지, 그리고 허리까지, 나중에는 물이 너무 깊어서 발로 건널 수 없고 몸을 던져 헤엄을 쳐 건널 수 밖에 없는 강이 되었습니다. 척량하는 사람이 1천규빗을 젤 때마다 그 깊이는 점점 깊어만 갔습니다.
성전문지방에서 흘러나오는 물이 비록 스미어 나오는 아주 작은 분량이었지만 중단되지 않고 계속 흘러나오니까 골짜기를 타고 흘러가면서 점점 더 굵고 넓고 깊은 물줄기가 되었습니다. 우리의 영적 상태가 이렇게 되어야 합니다. 성전에서는 작은 은혜를 받았을지라도 자신의 영적 생활을 통하여 점점 그 물줄기가 굵어지고 깊어지고 넓어지도록 해야하는 것입니다.
성전에서 흘러 내린 작은 물줄기가 성도들을 통하여 세상으로 흘러가면서 큰 물줄기가 되어야 합니다. 깊은 물줄기가 되어야 합니다.
성도들이 성전에서 은혜를 받고 사회로 돌아가서 사회생활을 통하여 그 은혜의 물기가 흘러가도록 해야 합니다.
오히려 은혜의 강줄기을 막아버리거나 말라버리도록 하는 그런 성도가 되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을 통하여 은혜의 물줄기가 점점 굵어지고 점점 넓어지고 깊어지는 역사가 일어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여러분, 우리가 어떻게 이러한 성령의 능력을 경험하며 살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성령의 전인 것을 아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령의 능력으로 충만해지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바와 같이 위로부터 임하는 성령의 능력을 입히움 받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성령의 통로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통로 삼아 다시금 죽어가는 이 땅에 소망을 주고 이 땅을 회복하고 치유하기를 원하십니다. 이 땅을 다시금 소성시키시고, 이 땅에 진정한 부흥의 역사를 주시기를 원하시는 줄로 믿습니다.
그러데 이 강물이 흘러가는 곳마다 어떤 역사가 일어났습니까?
죽음의 역사가 일어났습니까? 아니었습니다. 요즈음 오염된 물을 흘려보내서 물고기를 떼죽임 시키는 그런 경우도 없지 않습니다. 그러나 성전에서부터 흘러내려가는 그 물줄기는 생명의 역사을 일으켜 놓았습니다. 땅은 회복되고 물줄기 양 옆으로는 수목이 무성하게 자랐으며 강물 속에는 각종 물고기들이 자랐으며 온갖 짐승들이 강으로 내려와서 그 물을 마시면서 목을 축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죽음의 강으로 이 물이 흘러들어가자 그 강도 곧 다시 생명이 있는 강으로 변화가 되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절대로 죽음의 강과 같은 절망을 주거나 낙심을 주거나 실패와 낙망을 주지시 않습니다.
"낭패와 실망 당한 뒤에 예수께로 나옵니다. 십자가 은혜 받으려고 주께로 옵니다. 슬프던 마음 위로 받고 이생에 풍파 잔잔하며 영광의 찬송부르려고 주께로 옵니다."(330장 2절)
성전 문지방에서부터 흘러내린 은혜의 물줄기는 매마른 땅을 적셨습니다. 사망의 땅, 죽음의 황량한 벌판과 골짜기를 다시 살려 놓았습니다.
우리의 주님은 이 소생하는 물줄기의 원천인 것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우리의 구원의 원천입니다. 여기서부터 흘러내리는 물줄기에 닿는 순간 구원을 받습니다. 소생함을 얻습니다.
주께로부터 흘러내린 은혜의 강줄기는 우리의 삶이 아무리 힘들고 어렵울지라도, 풍파가 많고 낭패와 실망을 당할지라도 풍파를 잔잔케 하시며 영광의 찬송을 부르게 하시며 자유와 기쁨을 주실 것으로 믿습니다.
죽은 땅과 같은 우리의 심령과 인생 속에서 생명의 역사가 일어나게 될 줄로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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