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기현의 살림운동

어느 것이 옳으냐?(눅 6:6~10) 본문

예수님의 질문

어느 것이 옳으냐?(눅 6:6~10)

유앙겔리온 2018. 1. 11. 15:41

6:6 또 다른 안식일에 예수께서 회당에 들어가사 가르치실새 거기 오른손 마른 사람이 있는지라
6:7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예수를 고발할 증거를 찾으려 하여 안식일에 병을 고치시는가 엿보니
6:8 예수께서 그들의 생각을 아시고 손 마른 사람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한가운데 서라 하시니 그가 일어나 서거늘
6:9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너희에게 묻노니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 어느 것이 옳으냐 하시며
6:10 무리를 둘러보시고 그 사람에게 이르시되 네 손을 내밀라 하시니 그가 그리하매 그 손이 회복된지라

 

  밀밭 사이로 가던 예수님의 제자들이 밀이삭을 잘라 손으로 비벼 먹은 일로 인해서 안식일 시비가 일어났던 그 안식일과 시차를 두고  "또 다른 어떤 안식일"에 일어난 한 가지 사건을 누가는 그의 복음서 6장에서 다시 연속이고 반복적으로 소개해주고 있습니다. 그만큼 당시에 안식일 문제는 중대한 교리적이고 신앙적인 관심문제였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 가르치실 때 거기 오른손 마른 사람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예배당 밖도 아니고 예배당 안에서 안식일 문제가 제기된 것입니다. 
문제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예수를 고발할 증거를 찾으려 하여 안식일에 병을 고치시는가 하고 엿보았다는 사실입니다.
안식일에 고발할 증거를 찾으려고 엿보는 것이 죄가 된다는 사실을 알기나 한지 모르겠지만,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병을 고치는 증거를 남기기만을 눈빠지게 기다리고 있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을 오늘 본문에서 만나보게 됩니다.

 

  이 때에 그들의 생각을 아신 주님께서는 손 마른 사람에게 일어나 한 가운데 서라 하시고 손마른 자가 순종하여 섰을 때, 일체의 모든 것을 멈추시고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을 주목하시면서 그들에게 한 가지 질문을 하셨습니다. 묻노니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 어느 것이 옳으냐?" 질문하신 것입니다.
 
  그리고는 무리를 둘러 보시고 그 오른손 마른자에게 "네 손을 내밀라"하시고 그렇게 하매 그 손을 회복시켜주셨습니다. 질문을 하셨으나 대답이 오늘 본문에 기록되어져 있지 않습니다. 대답을 들을 필요도 없으셨던 것이지요. 그래서 대답을 기다리시지 않으시고 손 마른자를 고쳐주신 것입니다.

이러한 사건을 염두에 두고 오늘 저녁에 예수님께서 질문하신 "어느 것이 옳으냐?"하신 말씀을 함께 묵상하도록 하겠습니다.
 
  어느 것이 옳으냐? 질문하신 예수님의 질문은 단지 오늘 시비거리가 되는 안식일 준수의 문제에 국한 된 것이 아니라 우리들의 모든 삶을 규율하고 지배하는 원리에 관한 것입니다. 우리는 그른 것을 위한 삶이 아니라 옳은 것을 위한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그래서 끊임없이 어느 것이 오르냐에 관하여 분별해야 하고 선택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바른 가치관이 필요합니다.

 

  무엇을 옳다고 여기며, 그 옳은 것을 위하여 자신의 행동을 결정하는 것은 가치관에 달려 있습니다.
그래서 가치관이 대단히 중요합니다. 누구든지 꼭 가치관이란 말을 사용하지 않더라도 그리고 가치관이란 것을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그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가치관에 입각하여 살아가는 것입니다.

 

  가치관의 혼란이 있는 곳에는 우왕좌왕이 있을 수 밖에 없습니다. 
가치관이 다른 사람이 함꼐 모여 있으면 서로의 입장차만 벌어질 뿐입니다. 그리고 서로의 입장차로 인해서 다툼이 일어날 뿐이라는 것입니다.

 

  주님의 몸된 교회는 주를 그리스도로 고백하고 주와 복음을 위하겠다고 모인 무리들입니다. 교회에서는 적어도 무엇이 옳은지에 대한 가치관의 혼란이 있으면 안됩니다.

 

  그런데 오늘날이 가치관의 혼란이 가장 심한 때입니다.
서로의 입장차만 난무할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조그마한 일들도 수습이 안되고 큰 사건으로 비화하고 큰 재난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이럴 때야 말로 판단의 기준이 분명하고 확실하게 있어야 합니다. 바르게 분별해서 생각하고 행동할 수 있는 역량을 키워야 할 것입니다.  

 

  판단의 기준이 자기에게 있을 때에는 서로의 입장차만 나무할 수 밖에 없습니다.
자기가 판단의 기준이 될 때, 자기와 판단기준이 다르면 무조건 틀린 것이고 나쁜 것이라고 생각하게 될 위험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판단기준은 문자적인 율법이었습니다.
안식일에는 일하지 않아야 한다는 문자가 기준이었습니다.
그러나 문자적으로 안식일에 일하지 않고 쉬는 것에만 포커스를 맞추면 왜 안식일이 제정되었는지를 모르는 것입니다. 그러니 뜻도 모르면서 문자에 매여 안식일에 무엇을 하는 가? 하지 않는가?를 감시하며 무엇을 했다하면 곧 안식일을 범한 범죄자로 정죄하는 것은 안식의 제정자이신 하나님의 본심을 이해하지 못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안식일을 사랑으로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의 정신을 잃어버리고서 안식일을 문자적으로 잘 지킨다고 잘 지킨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안식일에 회당에 갔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안식을 잘 지킨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면서도 고발할 범죄의 증거를 찾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회당에 들어간 것은 하나님께 기도하러 한 것도 에배하러 간 것도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거나 들으러 간 것도 아닙니다. 오직 예수님을 고발할 증거를 찾기 위해서 간 것입니다. 그렇다면 안식일을 가장 무섭게 범하는 사람들이 그들이었던 것입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판단기준은 자기들의 집단이기가 판단기준이었습니다.
당시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집단이기주의는 대단한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그들의 사회적 계급이었고, 빼앗겨서는 안될 권세였고, 권위였으며, 세력이었습니다.
하나님이라도, 그리고 하나님의 아들이라도 여기에 도전을 받게 되면 죽이겠다고 달라드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그들에 의해서 죽으심을 당하셨습니다.
이런 일은 예수님에게만 일어나는 일은 아닙니다.
이 시간도 어떤 곳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이기도 하는 것입니다.

 

  자기 기준에 의해서, 그리고 집단이기주의에 의해서, 정신보다는 문자에 의해서 판단이 될 때 오늘 본문에 나오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처럼 잘못된 판단을 하게 됩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판단에 또하나의 영향을 미친 것이 바로 감정이었습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에 대한 미움의 감정, 악 감정을 가지고 예수를 고발할 증거를 찾으려 덧을 놓고 기다리면서 엿보고있었습니다.
나쁜 것만을 찾습니다.
  만약의 경우 좋은 것이 99%이고 그렇지 않는 것이 1%라고 한다면 좋은 것 99%는 보려고도 하지 않고 오직 좋은 않는 것 1%을 찾아 눈을 시뻫것게 해서 망을 보고 찾아고 기다리는 것입니다.
 
  누구나 감정이 개입되면 법을 악용하고 이용하게 되어 있습니다. 나쁘게만 보려는 것에 말려들고 맙니다. 누구라도 그렇습니다. 일단 감정이 실리면, 그것도 나쁜 감정에 사로잡히면 거기서 벗어나기란 쉽지 않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겸손하게 인정해야 합니다. 그래서 감정적일 때, 격정적일 때는 무엇을 결정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그리고 상한 감정에 사로 잡혀 있을 때는 이 상한 감정을 제일 먼저 치유 받아야 합니다. 여러분의 감정이 상해있으면 좋은 것을 볼 수가 없습니다. 좋은 것은 보지 못하도록 하는 장애가 생기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 상한 감정은 반드시 치유되어야 할 병인 것입니다.
 
  그러니 감정이 개입되면 더욱 혼란은 가중되고 다툼은 강화되게 됩니다.

예수님은 오늘 주신 말씀에서 우리가 가져야 할 판단의 기준과 잣대를 말씀해주시고자 하신 것입니다.
선을 행하는 것과 생명을 살리는 것이야 말로 최고의 가치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러한 잣대가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예수님의 잣대는 "선을 행하는 것과 생명을 살리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옳은 것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 살아가면서 어떤 문제에 부딪칠때마다 "어느 것이 옳으냐?"질문하신 주님의 이 질문 앞에 겸손히 답하면서 그 답에 합당한 삶을 살고자 힘써야 하겠습니다.  옳은 것을 행하는 것이 믿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