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기현의 살림운동

그 손님으로 금식하게 할 수 있느냐?(눅 5:33~35) 본문

예수님의 질문

그 손님으로 금식하게 할 수 있느냐?(눅 5:33~35)

유앙겔리온 2018. 1. 11. 15:34

5:33 그들이 예수께 말하되 요한의 제자는 자주 금식하며 기도하고 바리새인의 제자들도 또한 그리하되 당신의 제자들은 먹고 마시나이다
5:34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혼인 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때에 너희가 그 손님으로 금식하게 할 수 있느냐
5:35 그러나 그 날에 이르러 그들이 신랑을 빼앗기리니 그 날에는 금식할 것이니라

 

  바리새인들이 예수님 일행에 대해서 금식문제로 시비를 걸어왔습니다. 33절 "요한의 제자는 자주 금식하며 기도하고 바리새인들도 또한 그리하되 당신의 제자들은 먹고 마시나이다"라고 했습니다.
세례요한과 그 제자들, 그리고 바리새인들과 그 제자들은 금식하고 기도하는 일을 의무적으로 수행하고 있었으며 그것을 자랑스럽게 여겼고 그것을 긍지로 삼았습니다.
 
  그렇게 금욕적으로 금식하며 기도하고 살아가가는 그들의 눈에 비친 예수 공동체는 "먹고 마시기를 즐기는 사람들", 즉 정욕적인 사람들로 비쳤던 것입니다. 그래서 비난을 하고 시비를 한 것입니다.


  금식하고 기도하는 것은 신앙인으로서 할 수만 있으면 안 하는 것보다는 하는 것이 좋은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는데 너희는 왜 안해"하는 식으로 그것이 남을 정죄하고 판단하는데 사용되어서는 안됩니다.

 

  그래서 편견이란게 무섭습니다. 사람들은 악의적인 소문이나 무작정 좋은 것이라는 근거 없는 편견의 늪에 빠져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편견은 정확한 실체를 보기 전에 미리 판별함으로써 자신의 성장을 저해하는 것입니다.
  편견은 자신이 성장하는데 있어서 가장 방해가 되는 요소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예수님과 그 공동체에 대한 편견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금식하며 기도하는 것을 즐기는 데 당신들은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먹고마시기를 즐기는 사람들"이라는 편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니 비난부터 하게 된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예수님께서는 "혼인 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때에 너희가 그 손님으로 금식하게 할 수 있느냐?"고 질문하셨던 것입니다.

 

  이 사건의 발단이 된 곳은 세리 레위의 집에서 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중풍병자를 고쳐주신 후에 레위가 앉아 있는 세관을 지나가시다가 세리인 레위를 주목하고 보셨습니다. 그리고 그가 구원얻기에 합당한 사람인줄 아시고 그를 세관에서 부르셨습니다. 레위는 예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여 모든 것을 내려놓고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레위는 이것을 기념해서 자기의 집에 잔치를 배풀고 예수님과 제자들 그리고 자신과 지금까지 친분을 가진 이웃들과 가족들에게 대접을 한 것입니다. 이것은 자신이 이제 세리가 아니라 주님의 제자라는 것을 선포하는 자리였습니다.
 
  이 잔치와 대접은 그래서 그냥 보통 때의 잔치가 아니었던 것입니다.
특별한 잔치입니다. 일생일대에 한 번 있을까 말까한 그런 귀한 잔치자리였습니다. 

예수님은 이 자리를 "혼인집"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혼인집에 신랑이 기쁨으로 잔치를 준비해서 손님들에게 대접하는 자리입니다.

  당시 유대인의 결혼 풍습은 요즘처럼 결혼을 마치면 신혼여행을 가는 것이 아니라 일주일 동안 집에서 손님들과 먹고 마시며 즐거운 혼인잔치를 벌였습니다. 이 때 신랑은 제일 좋은 옷을 입고 자기 일생에 단 한번 누릴 수 있는 그 잔치를 즐겼고 모든 손님들도 신랑과 함께 기쁨으로 혼인잔치를 즐겼습니다. 이 자리에는 음식을 아끼지 않습니다. 그리고 누구도 금욕을 강요하지 않습니다. 신랑과 함께 즐거워하며 먹고 마시고 기뻐하면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세리 레위가 자기 집에서 벌린 잔치 자리는
이 자리는 탕자가 "내가 왜 여기서 이런 삶을 살고 있는가? 내 아버지집에서는 종들도 이런 삶을 살지 않는데..... " 그래서 그는 아버지집으로 돌아오게 된 것입니다. 아버지는 그것을 기념하여 큰 잔치를 벌렸습니다. 이 아들은 잃었다가 찾았고, 죽었다가 살아난 아들이다.
그래서 벌린 잔치자리입니다. 여기서 금식을 해야 할 이유가 없습니다. 함께 잔치를 즐겨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진치집에 초칠일이 없다면 손님으로 와 있은 사람들에게 금식을 권할 이유가 없습니다. 잔치 집에 온 손님들이 해야 할 일은 마련하여 대접하는 음식을 맛있게 먹어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손님으로 와 있는 이들에게 "금식하게 할 수 있느냐?"질문하신 것입니다.
당연히 예수님의 이 질문에 대한 답변은 자명한 것입니다. "그럴 수 없다"는 대답을 누구나 할 수 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누가 들어도 잔치 집에 온 손님들을 금식시킨다는 것은 말도 되지 않는 그릇된 처사라는 것입니다.

아무리 하나님이서도 이런자리에서까지 금식을 강요하시지는 않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금식할 때가 있는데 그 때를 35절에서 "그러나 그 날에 이르러 그들이 신랑을 빼앗기리니 그 날에는 금식할 것이니라" 
예수님은 금식의 필요성을 부정하지 않았습니다. 금식해야 할 때가 있다는 것을 인정하십니다. 의당히 금식해야 할 때가 있지만 지금과 같은 잔치 자리가 아니라 잔치집이 변하여 재앙의 집이 되었을 때 당연히 금식하며 기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단은 우리를 속입니다. 기뻐해야 할 때에 울게 만들고 정말 통회하고 금식하고 나아가야 할 때 웃게 만듭니다. 절대 속지말아야 합니다. 기뻐할 때 기뻐해야 합니다. 즐거워해야 할 때 즐거워 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주님이 주신 놀라운 잔치의 삶을 놓치게 됩니다.

그러나 죄를 지었을 때, 환난의 때에는 묻지 말고 금식하며 기도해야 합니다. 그래야 살게 됩니다.
때에 맞는 금식은 문제를 해결하는데 효과적인 방법이 됩니다. 그러나 때에 맞지 않는 금식은 주님이 주신 잔치를 망치는 일을 하는 것이 되고 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