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기현의 살림운동
두 여인의 비유(갈 4:21-31) 본문
오늘 저녁에 우리가 함께 나눌 비유의 복음은 "두 여인의 비유" 되겠습니다.
지상에 세워진 지역 교회는 머리되신 예수님의 몸으로서의 교회라는 것은 동일합니다. 그렇지만 그 모양과 생김새, 인적구성요소 등등은 절대로 동일하지 않습니다. 다시 말하면 백이면 백, 천이면 천, 만이면 만 각각의 지역교회는 지역교회로서의 특징들을 지니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갈라디아교회는 그리스도 안에 온전하게 거하는 신자들과 그리스도 안에 있다고 하면서도 율법을 신뢰하는 유대교에 치우친 신자들이 함께 공존하고있었습니다. 바울 사도는 이 둘의 차이를 갈라디아교인들의 마음에 깊은 인상을 심겨 줄 방법을 통하여 소개하고 있는데 바로 그것이 두 여인 자식인 이스마엘과 이삭입니다. 사도 바울은 하갈과 사라, 그리고 이스마엘과 이삭의 경우를 비교함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그의 나이 일흔다섯에 고향을 떠나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받고 아내 사라와 조카 롯, 그리고 그외의 식솔들을 데리고 하란을 떠나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떠날 때 아무 자녀도 없는 아브라함에게 "네 자손을 통하여 큰민족을 이루게 하고 그로 인해서 네 이름이 창대하게 되리라"고 언약의 말씀을 주셨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약속이 있은지 벌써 25년이 더 지나가고 사라는 이미 생리적으로 아이를 생산하기에 불가능한 몸이 되어버렸습니다. 기나긴 세월이흘렀습니다.
이렇게 되자 조급해진 아브라함은 다른 방법으로 아들을 낳으라는 것인가보다하고서는 아내 사라의 동의하에 아내의 종인 하갈을 취하므로 아들을 얻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인간적인 방법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자꾸 인간적인 방법을 앞세웁니다.
믿음의 조상이라고 하는 아브라함도 한 때는 이런 함정에 빠지기도 했습니다.
누군가가 미혹을 했는지도 모릅니다.
사라는 이미 늙었고 잉태할 수 없는 몸이니 사라가 거느리고 있는 여종 중에 하갈이 젊고 미모도 있고 건강하니 그녀를 통해서 후사를 얻는 것이 좋을 것 같다고........
아브라함은 귀가 엷었고 결국 그런가 하여 그 길을 선택하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것이 아니라고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네 아내 사라가 정녕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을 이삭이라하라"고 하시면서 이름까지 지어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시간은 걸렸지만 하나님은 약속대로 죽은자와 방불한 여인인 사라의 몸에게서 아들을 얻게 하셨던 것입니다.
기다림이란 것은 사람을 지치게 합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포기하고 맙니다.
그러나 기다림을 채운사람들은 반드시 복을 받습니다. 이를 이루게 되어 있습니다.
이와 같이 아브라함의 가정에는 이렇게 두 여인이 등장합니다. 한 여인은 이스마엘을 낳은 하갈이며, 다른 한 여인은 이삭을 낳은 사라입니다.
두 여인 중에서 첫번째 생각할 여인은 하갈입니다.
하갈은 자유로운 신분의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녀는 신분상 종이었습니다.
처음부터 하갈은 하나님의 약속과는 무관한 그런 여인이었습니다. 아브라함과 사라가 인간적인 방법으로 하나님의 뜻을 이룰려고 끌어드린 여인입니다.
종인 하갈에게서 낳은 이스마엘은 처음부터 약속의 자녀가 아니었습니다. 이스마엘은 육신을 따라 낳은 아들입니다.
두 여인 중에서 두번째 생각을 여인은 사라입니다.
사라는 신분상 자유하는 아브라함의 아내였습니다.
하나님은 이 사라에게서 낳은 아들을 하나님의 약속으로 주신 것입니다.
약속의 자녀는 신분상 자유로운 여자였던 사라에게서 낳은 아들이 약속의 아들이었습니다.
문제는 육욕으로 인간의 생각으로 여종에게 낳은 아들인 이스마엘이 하나님이 언약으로 주신 아들인 이삭보다 14살이나 더 많다보니, 어린 이삭을 핍박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때때로 육신적인 것이 더욱 강해서 신령한 것을 핍박하기도 합니다. 때때로 율법주의가 더 강해서 은혜주의를 핍박하는 경우도 없지 않습니다.
"육신으로 낳은 아들인 종의 아들이 약속의 아들인 자유자의 아들을 핍박한 것같이 이제도 그러하니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을 깊이 마음에 담아두어야 합니다.
인간적인 생각이 영적생각보다 앞설때가 많습니다.
인간적인 생각이 영적생각을 사정없이 몰아붙이고, 핍박을 하고, 위협을 하고, 협박을 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30절 "그러나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냐 여종과 그 아들을 내쫓으라 여종의 아들이 자유 있는 여자의 아들과 더불어 유업을 얻지 못하리라 하였느니라"하셨습니다.
여종의 아들과 자유 있는 여자의 아들이 유업을 같이 나누지 못하며 얻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근본이 다릅니다. 출발이 다르고 약속이 다릅니다.
그러므로 "계집종과 그 아들을 내어 쫓으라"하신 것입니다.
율법주의를 내어 쫓으라는 것입니다. 형식주의, 인간주의, 자기중심주의를 내어 쫓으라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본문에서 "형제들아 너희는 이삭과 같이 약속의 자녀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어떠한 경우라도 하나님의 약속을 따라 살아야 하며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잠깐 동안 하나님의 약속에 바로 서 있지 못했음으로 인하여 취한 하갈과 이스마엘은 결국은 그 가정에 말할 수 없는 분란거리가 되고야 말았으며 지금도 그의 후손들에 의해서 이스라엘이 곤란을 겪고 있는 것입니다.
손쉬운 아주 손쉬운 인간적인 방편의 대표가 바로 하갈이며, 이스마엘입니다.
문제는 다음이 문제입니다. 이게 골치거리가 되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이것은 우리에게 끊임없이 찾아올 유혹입니다. 손쉬운 인간적인 방법으로 문제를 해결하라는 속삭임입니다. 그러나 이 속삭임에 넘어가지 않기를 바랍니다.
넘어가는 날에는 반드시 그만한 댓가를 치루어야 합고 값을 지불해야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바로 죄에 빠지고 범죄자가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는 여종의 자녀가 아니요 자유 있는 여자의 자녀니라"했습니다. 그러므로 육체를 따라 난 자처럼 인간적인 방법과 수단을 멀리하고 성령을 따라 난 자와 같이 하나님의 언약,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응답 가운데서 살아가는 성도들이 되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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