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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그릇의 비유(고후 4:7-11) 본문

비유의 복음

질그릇의 비유(고후 4:7-11)

유앙겔리온 2016. 10. 25. 12:10

  오늘 저녁에 우리가 함께 나눌 비유의 복음은 "질그릇의 비유"입니다. 이 비유의 말씀을 통하여 우리는 바울의 인생론을 살펴 볼 수 있습니다.
바울은 이 비유를 통하여 인간이란 무엇이냐?하는 질문에 답을 주고 있습니다.  


  이 '질그릇 비유'는 그리스도인이 하나님 앞에서 어떤 존재인가를 알려 주는 소중한 비유입니다. 유명한 신학자 라인홀드 니버는 "예수를 믿는 다는 것은 여러 가지로 말할 수 있으나 그 중 가장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안에서 자기 생의 의미를 깨닫는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내가 누구인지', '내가 어떤 존재인지'를 아는 것은 사람이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을 때만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자신이 인간이면서 인간이 무엇인지 모르고 산다면 불행한 일입니다. 오늘 이 비유의 말씀을 통해서 인간이란 무엇인가를 바르게 알고 인간됨의 도리를 따라 잘 살 수 있기를 바랍니다.

 

  바울은 인간이란 질그릇이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흙덩어리를 뭉쳐만든 작품이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육체는 흙덩어리입니다.
  인간은 그 출발이 흙이었습니다. 흙에서 나서 흙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인간은 흙으로 돌아가지 않을 려고 애를 쓰고 힘을 썼습니다만 결코 그것을 거스릴 수는 없었습니다. 

  창세기 2:7절에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하셨고, 이사야 64:8절에도 보면 『여호와여 주는 우리 아버지시니이다 우리는 진흙이요 주는 토기장이시니 우리는 다 주의 손으로 지으신 것이라』라고 말씀하십니다. 너는 흙이다. 잊지 말라는 것입니다. 했습니다.

 

  흙으로 만들어 놓은 질그릇은 그 특성상

  1. 상처가 나기 쉽고 깨어지기 쉽습니다.
  질그릇은 금그릇이나 은그릇이나 동그릇이나 스덴레스 그릇에 비하여 그 재질이 약한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타난 '질그릇'은 '유약을 발라 광택이 나는 상태가 아닌 초벌구이의 질그릇'입니다. 질그릇이란 값이 쌀뿐 아니라 깨어지기 쉬운 것입니다.
그래서 질그릇은 조금만 부딪쳐도 턱이 나가고 금이가고 못쓸 그릇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질그릇을 함부로 다루는 집은 질그릇조각이 널려 있을 수 밖에 없습니다.
  인간 존재가 그렇습니다. 모든 사람은 흙에서 취함을 입었으며 언젠가는 깨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또한 인격적으로도 완전하지 못한데다가 죄 아래 있어서 쉽게 다치고 상처를 받습니다. 
 사람은 상처를 쉽게 받고 그리고 쉽게 생명의 손상을 받습니다. 그리고 인생이 허물어져 깨어질 때는 여간 허망한 것이 아닌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늘 우리의 육체나 마음이나 감정이 연약한 질그릇과 같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않될 것입니다. 우리 육체는 쉽게 병들고 쉽게 다치고 쉽게 고장이 납니다. 우리의 육체는 무쇠덩어리가 아닌 것입니다. 그러므로 언제나 건강에 유의를 해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마음이나 감정도 그렇습니다. 쉽게 상처를 받습니다. 그리고 깨어지게 됩니다. 그러므로 감정이나 마음을 늘 상처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내 마음뿐 아니라 다른 사람의 마음도 마찬가지입니다. 특별히 교회에서 더욱 그렇습니다.
  세상에서 상처받는 것도 억울한데 교회까지 와서 상처를 받으면 얼마나 가슴이 아프겠습니까?
  그러므로 교회에서는 말 한마디라도 더 생각하고 하고 남 배려하는 것이 생활하되어야 합니다. 옳고 그름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화목하고 화평을 이루는 것이며 인내하고 하나님의 뜻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내가 결판을 내려고하지 말고 하나님께 맡겨드리는 인내와 기다림이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모든 성도들이 서로를 바라볼 때 "깨어지기 쉬우니 취급주의!"라고 표딱지가 붙어 있는 것을 영적으로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깨어지기 쉬운 질그릇이라는 기막힌 사실을 우리는 인정해야만 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잘 가꾸고 지키고 애지중지 할지라도 결국은 언젠가는 깨어져서 흙으로 돌아가야 할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언제 떠날지 모르는 인생이기에 준비하고 있다가 때가 되면 좋은 마음으로 "때가 되어서 갑니다"라고 떠날 수 있었으면 합니다.

 

  2. 그런데 오늘 사도 바울은 이 질그릇에 보배를 가졌다고 했습니다.
  가끔 아주 오랜 옛날 자기와 질그릇이 골동품으로 비싼값을 받기도 합니다만 그것은 역사적인 유물이고 희소가치가 있는 것이기 때문일 뿐이지 결코 질그릇은 본질적으로 가치가 뛰어난 것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질그릇과 같은 우리 인생들이 교만해져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릇은 거기에 무엇을 담느냐에 따라 그 가치와 의미가 달라집니다. 쌀을 담으면 쌀그릇이고, 쓰레기를 담으면 쓰레기통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질그릇이 가치는 질그릇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속에 담겨져 있는 내용입니다. 옛날 서양 선교사들이 한국에 와서 보니까 요강 그릇을 보니까 사탕 담아 먹기 좋게 생겼다고 사탕 그릇으로 사용했다고 합니다. 나중에 그 용도가 요강인 것을 알고 얼마나 황당했겠습니까?
  인간이 존엄하고 다른 동물과 비교해서 그래도 가치있고 소중한 생명인 것은 이 보배와 같은 하나님의 형상을 담고 있는 것이며 양심과 정신과 생각을 담고 있기 때문입니다.
  창세기에 보면 하나님께서 인간을 만드실 때 흙으로 사람을 만드시고 그 코에 생기를 불어 넣어주셔서 생령이 되었다고 했습니다.
  이 생기는 '르하흐요' '퓨뉴마'로서 숨, 바람, 생명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 숨을 주시고 바람을 불어넣어주시고 생명을 주신 것입니다.

 

  3. 우리 그리스도인은 한 가지 더 귀중한 보배를 이 질그릇에 담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 말씀과 그의 복음을 이 질그릇에 담고 살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사도는 우리가 비록 연약하여 상처나기 쉽고 깨어지기 쉽고 가치가 없는 질그릇에 불과하나 이 질그릇에 보배를 담고 있으니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 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핍박을 받아도 버림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려 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한다"고 했습니다.

 

  왜 하필이면 질그릇에 인생을 비유했습니까?
  본문 7절 하반 절에 "우리가 이 보화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능력의 심히 큰 것이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하노니" 금 그릇도 있고 은그릇도 좋은데 하필이면 질그릇인가? 그 이유는 능력의 심히 큰 것이 하나님께 있음을 알게 하기 위함입니다.

  비록 우리가 연약하여 깨어지기 쉬운 질그릇과 같은 존재일지라도 보배 예수께서 이 질그릇을 성전삼고 계시니 우리는 두려울 것이 없습니다. 설혹 이 질그릇이 깨어진다고 할지라도 결코 낙망할 것이없습니다. 왜냐하면 더 좋은 처소를 주님께서 예비하고 계신줄로 믿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