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기현의 살림운동
생명이 떡 비유(요 6:32~40) 본문
오늘 저녁에 우리가 함께 나눌 예수 그리스도의 비유의 복음은 "생명의 떡 비유"입니다.
예수님은 "나는 ....이다"하는 형식으로 많은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형식의 말씀들은 대부분 비유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습니다. 오늘 말씀도 "나는 생명의 떡이다"라고 하셨습니다.
구약성경에 보면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양식이 없어서 굶주릴 때 하늘에서 생명의 떡인 만나와 메추라기가 내려서 이스라엘백성들이 그 생명의 떡을 공급받음으로써 살 수가 있었습니다. 엘리야는 까마귀가 물어다준 양식을 통해서 기력을 회복할 수가 있었습니다. 예수님도 벳세다광야에서 물고기 두마리와 보리떡 다섯개로 굶주린 5000명을 먹이시기도 하셨고, 또 다른 곳에서는 떡 일곱개와 물고기 두어마리로 4000명을 먹이시는 놀라운 능력을 보이셨습니다.
만나와 메추라기의 기적, 까마귀의 기적 그리고 오병이어의 기적, 그리고 칠병이어의 기적을 경험한 무리들은늘 하나님 앞에서 먹을 것에 집착되어 있었습니다. 그들의 눈에는 오직 먹을 것 밖에는 보이지 않았습니다. 사막에서 물을 찾는 사람들처럼 그들은 먹을 것을 찾았습니다.
구약시대나 예수님 당시는 굶주림 가운데 허덕이는 시대였기 때문에 더욱 그랬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떡이라는 주제가 얼마나 소중하고 귀한 것인가를 누구든지 잘 압니다.
떡은 먹어도 되고 안 먹어도 되는 기호품이 아니라 꼭 먹어야 하는 필수품입니다.
여러분! 무인도에 홀로 포류되어 있다면 다이야몬드가 소중하겠습니까?
쌀 한되가 소중하겠습니까? 이때는 다이야몬드가 아무리 많아도 소용이 없습니다. 양식이 중요합니다. 다이야몬드는 단지 기호품에 불과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와 같은 떡 즉 양식을 자신으로 비유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뒷받침하기 위해서 예수님은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셨는데 베들레헴은 그 뜻이 '떡방앗간 즉 떡집'이라는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유월절에 예루살렘 다락방에서 성찬식을 세우시고 자신의 살과 피를 상징하는 빵과 포도주를 나누어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정체성을 이처럼 떡에 비유하셨습니다. 떡 그냥 떡이 아니라 참 떡, 생명의 떡이라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먹어야 생명을 얻는다는 개념이 생깁니다. 이 개념을 이해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어떻게 예수님을 먹어야 합니까? 살아 계시는 예수님을 먹는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실재적으로 초대교회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기독교인들이 세례를 베풀고 성찬식을 행하면서 "이 떡은 예수 그리스도의 살이요 이 음료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라"함으로써 기독교인들 예배를 주목하고 있던 사람들이 저들은 사람의 살과 피를 먹는다 오해를 해서 식인종처럼 여기고 핍박을 더욱 가한 경우도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나는 생명의 떡이라" 하신 말씀이나 "이 떡은 나의 살이라"한 것은 모두 비유의 말씀이지 실재가 아닌 것입니다.
실재로 사람의 인육이나 사람의 피를 먹고 마시는 것은 윤리적으로나 현행법상으로 용납될 수 없는 행위입니다.
예수생명의 떡은 일용할 양식처럼 예수님을 떡으로 삼고 그것을 떼어 먹고서 산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예수를 먹어야 한다는 것은 그를 믿고 그가 원하시는 일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죽지 않고 영생을 얻는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나는 생명의 떡이라 "하신 것은 육체를 만족케 하고 육체를 베부르게 하는 양식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의 떡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생각할 때 단순히 육신적인 것 세상적인 것만을 떠올리거나 생각할 것이 아닙니다. 하늘로부터 오는 양식으로서 우리 영혼을 살찌게 하는 영혼의 양식으로 먼저 생각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아주 단순하게 육적인 문제 해결자로만 생각하는 우를 범해서는 안됩니다.
육적인 문제도 해결이 되겠지만 먼저는 영적인 문제해결이 먼저입니다. 그리고 육적인 문제와 영적인 문제가 충돌할 때는 당연히 영적인 문제부터 우선시해야 할 것입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이것을 바르게 하지 못해서 시험에 빠집니다.
이 세상의 떡은 육체를 위해서 반드시 필요합니다. 이 세상의 삶을 연장하기 위해서는 떡이 없으면 안됩니다. 떡을 육신의 생명을 위해서는 필요적인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이 태어난 목적은 단순히 생존을 위해서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영원히 행복하게 살기 위해 창조하셨습니다.
육체가 건강한 생명을 유지하려면 좋은 생명의 떡을 먹어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영생복락을 위해서는 예수생명의 떡을 먹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영원한 생명에 관하여 관심을 가지지 않고, 이 땅에서 먹고 마시고 즐기는 일에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죽으면 끝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생명을 단순히 육체적인 생명으로만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배고품을 면한 이 시대를 살아가는 현대인들조차도 여전히 육신의 떡을 쫓아 영혼을 파는 일들을 서슴치 않습니다.
그러나 "배부른 돼지가 되기보다는 배고픈 소크라테스가 되겠다"는 말이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40일 주린 예수님에게 마귀는 돌로 떡을 만들어 먹으라고 유혹합니다. 이 때 예수님께서는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다."(마 4:4)라고 말씀하시므로써 육신의 떡보다 영혼의 떡이 더 소중함을 일깨워주셨습니다.
우리의 육체는 일용할 양식을 먹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생명을 지속시켜나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양식을 먹음으로써 힘을 얻고 성장하고 힘을 쓰는 것입니다. 먹지 않으면 힘을 얻을 수가 없고 힘을 쓸수가 없고 종국에는 생명을 지킬 수가 없어서 죽고 마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영혼도 주님없이는 힘을 얻을 수가 없고 힘을 쓸 수가 없고 결국은 영혼의 생명을 지킬수가 없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육체의 양식 앞에서 다툽니다. 육신의 양식을 위해서 염려합니다. 육신의 먹을 것을 위해서 욕심을 부립니다. 그것이 육체뿐이면 썩을 양식에 불과한 것입니다. 영혼의 양식을 위해서 또한 그렇게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영의 양식 앞에서 군침을 흘릴 줄 아는 그리스도인 되어야 하겠습니다.
세상에 밥상 차려서 떠먹여 주고 있는데 꾸벅꾸벅 졸고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여러분 밥숱가락이 입으로 들어가면서도 졸고 있는 사람이 있다고 하면 그 사람은 정상인 사람입니까? 아마도 피곤한 사람이든지 병든 사람이든지 입맛을 잃어서 죽고자 하는 사람일 것입니다.
현대를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은 육신의 떡보다는 마음이 굶주려 있습니다. 현대사회를 살면서 많은 사람들이 고독함을 느끼고, 외로움을 느낍니다. 자신의 꿈을 향해 뛰어나가야 하는 청소년과 청년들은 무한경쟁체제 속에서 지쳐서 쓰러져 가고 있는 것이 지금 우리 시대의 모습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생명의 떡으로 먹는 자는, 다시 말해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마음 속 깊이 믿고 구주로 영접한 자는 영원히 배고프지 않고 영원히 외롭지 않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세상처럼 특정 소수만 누리는 행복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세상처럼 우리의 어느 한 부분만 고치시고 해결하는 분이 아닙니다. 우리의 인생 모든 부분을 주님께서 고치시고 새롭게 하셔서 우리에게 새로운 생명을 주신 분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에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영원한 만족과 배부름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생명의 양식, 생명의 떡이라고 했습니다. 이 생명의 떡을 맛있게 받아먹는 사람이 건강한 사람입니다. 그리고 성장하는 사람입니다. 영생의 삶을 지탱하는 사람인주로 믿습니다.
'비유의 복음' 카테고리의 다른 글
양의 문의 비유(요 10:1~10) (0) | 2013.08.09 |
---|---|
빛의 비유(요 8:12~20) (0) | 2013.02.28 |
생수의 비유(요 4:1~15) (0) | 2013.02.28 |
들린 구리뱀의 비유(요 3:14~17) (0) | 2013.02.28 |
성전의 비유(요 2:13~22) (0) | 2012.12.1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