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기현의 살림운동
생수의 비유(요 4:1~15) 본문
오늘 저녁에 우리가 함께 나눌 예수 그리스도의 비유의 복음은 "생수의 비유"혹은 "샘물의 비유"가 되겠습니다.
본문은 사마리아 여인과 예수님의 만남과 그 만남에서 이루어진 대화를 기록한 말씀입니다. 이 말씀 중에도 예수님의 비유가 사용되었습니다. 그 비유는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가 만일 하나님의 선물과 또 네게 물을 좀 달라 하는 이가 누구인 줄 알았더면 네가 그에게 구하였을 것이요 그가 생수를 네게 주었으리라"하신 말씀 속에 담겨져 있습니다.
낮과 밤도 사람에 따라서 그 의미가 달라질 수 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찾아온 니고데모는 낮을 피하여 밤에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그것은 공회의원으로서 낮에 예수님을 찾는다는 것은 체면이 구겨지는 것으로 생각을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밤 중에 예수님을 찾아와서 어떻게 하여야 영생을 얻을 수 있는지를 질문했던 것입니다.
반대로 오늘 사마리아여인은 서늘한 아침과 저녁을 피하여 한 낮인 제6시에 물을 길으러 야곱의 우물을 찾았습니다. 제6시는 우리의 시간으로는 정오에 해당하는 시간입니다. 이 여인은 자신의 부끄러움 때문에 그리고 이런 저런 말을 듣는 것이 싫어서 아무도 물을 길으러 오지 않는 한 낮 뜨거운 시간을 선택한 것입니다.
사람은 자기의 처지에 따라 밤도 낮같이 쓰기도 하고 낮도 밤같이 사용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모든 일에 당당하고 그리고 남의 눈을 피해서 할만한 그런 일들을 하지 않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사마리아 여인과 예수의 만남은 지금까지의 유대와 사마리아의 722년 전통을 깬것입니다. 원래 사마리아와 유대는 한 나라, 한민족이였습니다. 이들은 야곱의 12아들이 나누어져 살고 있는 한 민족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적대관계에 들어가게 된 것은 722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합니다. 앗수르가 북이스라엘인 사마리아를 침략해서 대부분의 사마리아 사람들은 포로로 끌려갔습니다. 그리고 사마리아 땅에 남아 있던 사람들은 정책적으로 앗수르 사람들을 이주시켜서 함께 살게 함으로서 인종혼합이 이루어지게 되었던 것입니다. 유대민족들은 아브라함의 후손이라는 강한 긍지와 자부심을 가진 민족입니다. 그런데 이방민족과 인종이 섞여버린 잡종과 같이 된 사마리아를 곱게 보아줄리가 만무합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사마리아로 통행하는 것을 금하게 되었고 이와 같은 이유로 사마리아 사람들과 유무상통하는 것을 부끄럽게 생각하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그 전통을 깨고 직접 사마리아 땅으로 걸어들어가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여인이 물 깃고 있는 우물가로 찾아가셨고 그리고 거기서 사마리아 여인을 만나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사마리아여인에게 물을 달라고 요청을 한 것입니다.
샘물이 솟아나는 우물가는 사람이 모이는 곳이고, 필요를 채워가는 곳입니다. 또한 그곳은 만남의 광장이 되기도 합니다. 아브라함의 종이 이삭의 아내를 찾을 때에 리브가를 만난 곳이 우물이고, 야곱이 아내 라헬을 만난 곳도 우물입니다. 모세도 우물가의 사건으로 아내를 얻는 계기가 됩니다. 예수님도 영생의 진리를 생수의 비유로 말씀하시기에 좋은 장소가 우물가 임을 아셨습니다. 수가성의 우물가에 의도적으로 찾아오신 주님은 인적이 뜸한 시간에도 그곳에 왔던 사마리아여인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이 자리에서 두 사람이 생수에 대한 이야기를 한 것입니다.
두 사람이 대화를 하는 중에 금방 구하는 자와 주는 자가 바뀌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가 만일 하나님의 선물과 또 네게 물을 좀 달라 하는 이가 누구인 줄 알았더면 네가 그에게 구하였을 것이요 그가 생수를 네게 주었으리라"하신 것입니다.
이 여인은 먹을 물만 해결이 된다면 야곱의 샘에 가서 샘물을 길러오는 일을 끝내고 싶어했던 것이 이 여인의 늘상 가지고 있는 마음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여인은 아주 단순하게 요구를 합니다.
"주여 이런 물을 내게 주사 목마르지도 않고 또 여기 물 길러 오지도 않게 하옵소서"
사람을 피해서 아무도 찾지 않는 시간인 한 낮에 샘물을 길러 오는 일이란 그렇게 재미 있는 일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꼭 필요한 것이 아니라고 하면 절대로 가기 싫은 곳이 우물가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럴 수 없는 것이 물이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우물가를 매일 찾을 수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물은 그런 것입니다.
생수는 인간이 마실 수 있는 오염되지 않은 샘물을 말합니다. 인간의 육신은 70%가 수분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물을 마시지 않고는 인간은 결코 살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여행을 다니시다가 사마리아에 있는 야곱의 샘물을 찾은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에서 보면 생수는 오히려 사마리아여인이 예수님께 드려야 할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말하는 생수라는 것은 자연적으로 흘러나오는 샘물 자체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이것은 비유의 말씀이라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야곱의 우물에서 솟아오르는 샘물을 바라보시면서 비유로 사마리아 여인을 가르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람을 보면서 바람과 같은 성령을 가르치셨으며 씨앗을 바라보면서 하나님 나라와 믿음을 가르치셨습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께서는 야곱의 우물을 보시고 인간의 마음 속에서도 저 우물의 샘물처럼 계속해서 솟아오르는 생명수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예수님만이 인간의 영원한 생명수가 되십니다. 다른 것은 쉬이 다시 목마르지만 예수 그리스도는 한번 영접하면 우리 속에서 영원토록 쉬지 않고 평안을 주시고 기쁨을 주시며 은혜를 주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사마리아여인에게 샘물을 바라보시면서 그리고 지금 가장 두 사람을 가까갑게 연결시켜줄 생수를 바라보면서 영생에 이르는 샘물을 가르쳐주신 것입니다.
생수는 인간의 육적 갈증을 해결해 줍니다. 옛날에는 음료수가 따로 있을 수가 없고 빙과루가 따로 있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냉장고도 없었을 것이고 가장 시원한 것은 우물에서 솟아나는 샘물 즉 생수를 먹는 것이었을 것입니다. 생수는 마시면 그 어떤 음료수 보다 갈증이 덜하고 시원합니다. 다른 음료수는 먹을 때는 상쾌한 것같지만 곧 더 심한 갈증에 빠지게 합니다.
아뭍은 생수는 인간의 육적 갈증을 해결해 주는 귀중한 물질입니다. 그러나 이 우물에서 나는 생수는 인간의 영적 갈증을 해결해 주지는 못합니다. 예수님은 인간의 육적 갈증을 해결해 주는 샘물을 비교해서 자신은 영적 갈증을 해결해 줄 수 있는 생명수가 되심을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생수는 잘 상하지 않으며 그리고 자생적으로 솟아 나는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믿는 자들에게 주님은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자생적으로 흘러 넘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상하지 않고 영속적으로 흘러넘치는 은혜의 생수를 약속하신 것입니다.
생수는 깨끗케 하며 치료하는 성질을 가지고 있습니다. 어지간한 자질구례한 상처는 생수로 깨끗이 씻기만 해도 치료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생수라고 하셨습니다. 예수 앞에 나오는 자는 누구든지 깨끗해지며 치료를 받게 됩니다.
생수의 강이 흐르는 곳에는 풍성함이 있습니다. 에덴에는 4개의 생수의 강이 흐르고 있었습니다. 에덴동산은 부족함이 없는 모든 것이 풍부한 낙원이었습니다.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시절을 좇아 과실을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을 시편 1:3에서는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나는 생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이 생수를 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이 생수를 믿음으로 마시는 자는 영원토록 목마르지 않을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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