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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전의 비유(요 2:13~22) 본문

비유의 복음

성전의 비유(요 2:13~22)

유앙겔리온 2012. 12. 14. 21:31

  오늘 저녁에 우리가 함께 나눌 예수 그리스도의 비유의 복음은 "성전의 비유"입니다.


이 성전의 비유는 예수님 당시에 성전에서 벌어지고 있는 성전의 상업주의와 성전주의을 보시고 이런 성전이면 헐어버리고 새로 지어야 하겠다는 예수님의 의중을 학고하게 나타내신 말씀입니다.
  이것이 주님께서 말씀하신 "내가 내 교회를 세우리니"하셨던 주님의 교회를 세우려고 작성하신 이유기도 합니다.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셔서 성전에들어 가셨을 때 성전에서는 장사가 한창이었습니다.
성전에는 기도하는 소리와 성경 읽는 소리와 예배하는 무리들의 찬양하는 소리가 넘쳐야 하는 데 그보다 예루살렘성전에서는 장사하는 무리들로 넘치고 있었습니다. 언제부터인가 제사를 돕는 다는 핑계로 아무 생각없이 무비판적으로 장사가 성행하게 된 것입니다.

 

  성전은 본래 하나님께서 거하시는 하나님의 집입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이름을 두시기 위해서 택하신 장소가 성전입니다. 또한 성전은 하나님께 제사 드리는 장소입니다. 솔로몬이 성전을 건축한 후 뭐라고 기도했습니까?
열왕기상 8장 13절 말씀입니다. "내가 참으로 주를 위하여 계실 성전을 건축하였사오니 주께서 영원히 계실 처소로소이다..."
그렇습니다! 성전은 하나님을 예배하는 장소입니다.

 

  그런데  시간이 흐름에 따라서 성전은 하나님을 만나고기도의 집에서 종교적 장사터로 변질돼 갔던 것입니다. 짐승들은 성전에서 제사를 드릴 때 희생제물로 사용되었습니다. 짐승들은 제사드리는 자들에게 상품처럼 팔렸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관례가 되어 버림으로써 하나님의 전(殿)은 장사터로 변질되고 말았습니다. 성전의 뜰은 파는 짐승으로 채워져서 이방인들이 하나님을 경배할 공간까지 빼앗아버렸던 것입니다.

 

  사람들은 이렇게 하나님의 성전을 자신들의 이익과 쾌락과 만족을 추구하는 장소로 만들어버렸습니다.
세월이 흐르면서 하나님보다 건물 그 자체를 더 소중하게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제사에는 관심이 없고 잿밥에만 마음을 빼앗긴 꼴이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계셔야 할 성전에 하나님께서 계실 수 없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이 와서 기도해야 할 장소에 장사치들만 들끓었습니다. 오죽했으면 예수님이 그 성전을 가리켜 강도의 소굴이라고 말씀하셨겠습니까?

 

  교회는 하나님의 구원의지에서 세워진 구원의 방주입니다. 그래서 거룩하고 복된 것입니다. 이상적인 하나님의 교회는 잘못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교회는 또한 교회를 이루고 있는 인간의 공동체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교회를 이루고 있는 인간들의 잘못으로 인해서 생긴 것들이 많습니다. 교회 내의 악, 이것이 슬그머니 자리를 잡고 뿌리를 내리기도 하고 슬그머니 고개를 내밀기도 합니다. 이것은 놀랄 일도 아니며 교회가 "그럴 수가 있느냐"하고 호들갑을 떨일도 아닙니다. 


  교회가 전적으로 하나님만의 교회이면 그렇지 않겠지만 인간들이 모인 인간의 교회라는 측면에서 보면 그럴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때때로 비판의 소리를 듣게 되고 개혁과 변화와 쇄신의 대상이 되기도 하는 것입니다.  

  왜 구약시대나 예수님 시대에 성전에서 장사가 성행했느냐? 하면 이스라엘백성들의 의례적인 신앙 때문이었습니다.
이스라엘백성들은 죄는 그대로 짓고 살면서도 의식적이고 의례적으로 제물을 드려서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의 허물을 찾아 고치는 것보다는 제물에 '험'이 없어야 하는 것으로 잘못생각을 했습니다.
  생활을 고쳐야지 제물로 하나님을 달래서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이사야 1장 11-12절을 보면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너희의 무수한 제물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뇨 나는 수양의 번제와 살진 송아지나 어린 양이나 수염소의 피를 기뻐하지 아니하노라. 너희가 내 앞에 보이려고 오니 그것을 누가 너희에게 요구하였느뇨 내 마당만 밟을 뿐이니라"고 하셨습니다. 

  율법주의적이고 교리적인 신앙생활이 이와같습니다. 기껏해야 하나님의 성전에 마당만 밟고 다니는 성도가 되어서는 않됩니다.

  예수께서 이와 같은 성전을 깨끗이 정화하시고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 되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성전을 정화하신 사건은 성전의 본래적인 모습으로 돌려놓기 위함이셨습니다. 그러자 염치가 없어진 제사장들이 "네가 이런 일을 행하니 무슨 표적을 우리에게 보여주겠느뇨"라고 묻습니다.
  이 때 예수께서는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만에 일으키리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솔로몬이 건축한 첫 번 성전은 바벨론 왕 느브갓네살에 의해서 파괴되었습니다.
그 후 바벨론 포로 생활을 청산하고 귀환한 스룹바벨이 파괴된 성전을 재건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 당시의 성전은 헤롯 대왕이 유대인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서 스룹바벨이 재건한 성전을 46년 동안 고쳐지었다고 합니다. 그 성전의 면모는 완전히 새로운 것이었습니다. 아마도 매우 화려하고 웅장했던 것 같습니다. 그 성전은 뛰어난 종합 예술 작품과도 같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무엇이었습니까? 헤롯에 의해서 건축된 성전의 외형은 화려하고 아름다웠지만 그 내용이 문제였습니다. 성전을 천막으로 지었든지, 아니면 돌이나 황금으로 지었든지 그것은 별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무엇으로 지었느냐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거기서 어떤 일이 일어나느냐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성전 안에 하나님께서 계시느냐 아니 계시느냐 하는 것이 진짜 중요하다는 말입니다. 다시 말해서 올바른 예배와 기도가 드려지지 않는 성전은 더 이상 하나님의 성전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이렇게 46년 동안이나 지은 큰 성전을 사흘만에 다시 짓겠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그들은 이해하지를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그 말씀은 예수께서 비유로 사용하신 말씀이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육신을 성전이라고 비유하신 것입니다. 사도요한은 오늘 말씀 중에서 주를 달기를 이것은 예수님이 자신의 육체를 가르키신 말씀으로 십자가에 돌아가시고 사흘만에 부활하실 것을 의미하고 있다고 설명을 해 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사흘 만에 성전을 다시 지으시겠다는 것은 두 가지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 하나는 십자가요 다른 하나는 부활입니다.
성전은 하나님께서 계신 장소요 또한 사람들이 하나님께 예배 드리는 장소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그 성전의 본질적인 의미를 살리기 위해서 무엇이 요구되겠습니까? 하나님과 사람의 만남을 가로막고 있는 죄의 문제가 반드시 해결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바로 그 죄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셨습니다. 다만 죽으셨을 뿐만 아니라 사망 권세를 이기시고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다시 말해서 성전이 본래의 모습을 회복하도록 하기 위해서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고 사흘 만에 부활하셨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자기 육체가 참된 성전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요한복음 기자가 21절 말씀을 통해서 예수님이 비유적으로 말씀하신 것이라고 설명하지 않았습니까?
"예수는 성전된 자기 육체를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물론 그 당시 그 말씀을 제대로 알아들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유대인들은 물론이고 예수님의 제자들조차 그 말씀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서 성전의 본질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깨닫게 되었습니다. 사도 바울도 분명히 말하지 않았습니까? 에베소서 1장 22절, 23절 말씀입니다.
"또 만물을 그의 발 아래 복종하게 하시고 그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삼으셨느니라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하게 하시는 이의 충만함이니라"
무슨 말입니까? 교회의 머리는 예수님이시고 교회는 예수님의 몸이라는 말입니다.

 

  사실 교회를 말함에 있어서 건물은 별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 교회가 장로교회냐 감리교회냐 하는 것도 별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런 것들은 본질적인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교회의 본질은 하나님께 예배 드리는 사람들이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서 죄 사함을 받는 것이요 그 주님 안에서 참 자유와 해방을 누리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성령 충만함을 받고 날마다 그 성령의 능력을 가지고 이 어둡고 캄캄한 세상에 나가서 세상을 밝히는 것이 주님의 몸된 교회의 존재 의미인 것입니다.

주님은 또한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사마리아에 있는 수가라 하는 동네에 있는 우물 곁에서 물을 길으러 온 여인에게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여인이 주님에게 어디서 예배하는 것이 옳으냐고 물었습니다.
"우리 조상들은 이 산에서 예배하였는데 당신들의 말은 예배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 하더이다"(요 4:20)
그러자 주님이 뭐라고 대답하셨습니까? 어디서 예배하느냐 하는 것은 별로 중요하지 않고 다만 중요한 것은 어떻게 예배하느냐 하는 것이라고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요 4:23~24)
때문에 주님은 예루살렘 성전을 헐라고 하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길은 제물이나 성전이나 그 어떤 형식에 있는 것이 아니라 진실한 마음에 있는 것입니다.
마음은 하나님으로부터 먼데 제물만 드린다고 성전만 출입한다고 의식을 행한다고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제물이나 성전이나 의식은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 필요한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 없다면 이런 것은 아무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고린도 전서 3:16절에 보면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이다"라고 하셨습니다. 우리의 인격과 생활이 하나님의 성전이 되는 것임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 성전을 헐라 하신 그 성전은 무슨 성전입니까?
  장사는 성전이었고 형식적인 성전이었고 교만의 성전이었고 하나님을 만날 수 없는 그런 성전이었습니다. 이것은 헐어버려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성전을 헐라고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성전을 헐지 못한 이스라엘백성들이었습니다.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신지 40년이 지난 주후 70년에 성전은 헐리우고 말아씁니다. 그리고 헐려진 성전은 2000년이 지난 지금도 다시 세워지지를 못했습니다.

  이스라엘백성들이 스스로 성전을 헐고 세로 성전을 세웠더라고 하면 지금도 멋진 성전이 있을 터인데 스스로 허물지 못한 성전은 로마인들로 인하여 허물어지고 말았습니다.
  나의 부패한 성전을 우리 스스로가 허물지 아니하면 하나님께서 직접 허물어 버리심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있어서 헐어야 할 옛 성전은 과연 무엇입니까?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것을 방해하고 있는 것들은 과연 어떤 것들이 있습니까? 이제 다 허물어야 합니다! 돌 위에 돌 하나도 남지 않게 말끔히 허물어야 합니다.
그리고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서 우리에게 참되게 예배할 수 있는 길을 활짝 열어 주신 그 주님으로 말미암아 날마다 영과 진리로 하나님께 예배하는 참으로 복된 여러분 모두가 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