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기현의 살림운동
두 빚진자의 비유(눅 7:39~50) 본문
오늘 우리가 나눌 예수 그리스도의 비유의 말씀은 "두 빚진자의 비유"가 되겠습니다. 이 비유를 예수님께서 하시게 된 배경은 예수님이 초대를 받고 간 바리새인의 집에서 일어난 한 사건입니다.
비유의 배경,
시몬이라는 한 바리새인이 예수님께 음식을 대접하기 위해서 자기집에 초청한 사건을 중심으로 펼쳐지고 있습니다. 본문의 문맥을 잘 살펴보면 이 바리새인은 예수님에 대한 분석과 세밀한 관찰을 위해서 자신의 집에 초청했음이 나타나있습니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이미 시몬의 의도를 간파했지만, 자신을 그들앞에 계시하시기 위해 친히 초청에 응하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런 부분은 이해하기가 쉽지 않지만 문맥을 통해서 살필수 있어야 비유에 대한 바른 이해를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시몬이 주님을 초청하고, 주님께서 그의 집을 방문했을 때 그가 영접하는 방법이 어떠했습니까?
초청은 했지만 귀한 손님으로 영접하지는 않았습니다. 당시의 귀빈을 영접하는 풍습에는 평화를 기원하는 입맞춤, 발을 씻겨주고 향료를 피우거나 향수를 손님의 머리에 바르는 행위등이 따라야 하는데 그는 그렇게 영접한 일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바리새인의 초청을 받아 대접을 받고 있는 중에 아주 특별한 일이 발생한 것입니다.
바리새인들로부터 죄인 취급을 받는 한 여인(창기)이 느닷없이 값비싼 향유를 가지고 나타나서는 향유를 주님께 붓고 눈물을 흘리며 자기 머리를 풀어 향유로서 발을 씻기고 입을 맞추었던 것입니다. 그가 예수님을 귀빈중의 귀빈으로 대접을 했던 것입니다.
그러자 사람들은 이것을 아름답게 보아주지를 못하고 시기, 질투하는 꼬여진 마음을 가지고 못마땅해 하는 것이었습니다.
심지어는 그 집주인은 생각하기를 "이 예수가 저 여자가 얼마나 더러운 여자인가를 알았더라면 아마 저러지 못하게 했을 것이다. 그것도 모르는 것을 보면 선지자가 아닌지도 모른겠다"는 식으로 나옵니다.
그때 주님께서 "시몬아 내가 네게 이를 말이 있다" 고 하셨고, 시몬이 "선생님 말씀하소서" 라고 응답을 했으므로 이런 상황(배경)아래서 이 두 빚진자의 비유가 등장하게 된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시몬에게
빚 주는 사람(대금업자)에게 두 빚진자가 있었는데, 한사람은 오백 데나리온(노동자의 오백일 품삯)을 빚졌고 한 사람은 오십 데나리온(노동자의 오십일 품삯)을 빚졌는데 둘 다 갚을 것이 없으므로 두 사람이 각각 채주에게 가서 사정을 했는데 그 채주가 워낙 사람이 좋아서 두 사람 모두에게 빚을 탕감해 주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누가 저를 더 사랑하겠느냐? "라고 물으셨습니다.
주님의 이 질문에 "제 생각에는 많이 탕감함을 받은 자니이다" 라고 답변하게 됐고, 주님께서는 "네 판단이 옳다" 고 하시고는 시몬의 주의를 그 여인에게 돌리게 하여 주님께서 하신 비유가 곧 두사람(시몬과 여인)을 겨냥한 것임을 밝히시고, 구원주요 메시야를 영접하고 접대하는 여인의 행위가 많은 죄를 탕감받은 자로서 행한 최고의 헌신임을 선언하셨습니다.
그리고 그와는 반대로 당대의 가장 지혜있는자로 존경받던 시몬은 스스로를 의로운 자로 규정했으므로 죄인이라는 고백도, 죄를 대속하는 구속주의 필요성도, 하나님의 용서도 모르는 까닭에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있을 수 없음을 밝혀 눈을 뜨고도 메시야요 구원주를 보지 못하는 그들을 책망하셨던 것입니다.
그리고서 여인을 향하여 "네 죄 사함을 얻었느니라(48절)" 고 하시면서 주님께서 자신이 누구신지 그리고 무슨 일을 하고 계시는지를 친히 계시하셨습니다.
죄는 원래 빚과 동의어입니다. 빚은 갚아야 하는 것입니다. 빚을 갚지 않고는 절대로 자유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 여기 나오는 여인은 죄많은 여인이었습니다. 그 빚쟁이와 같은 여인입니다.
여기에 나오는 여인을 창녀로 보는 성경해석학자들의 견해를 따른다고 하면 이스라엘에서 가장 큰 죄인인 것입니다.
여기에 비한다면 예수님을 초청하여 대접하는 바리새인은 스스로 의롭다고 여기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니까 빚진 것이 그렇게 많지 않는 사람과도 같은 것입니다.
창녀일지도 모르는 오늘 등장하는 여인은 빚이 많은 500데나리온을 빚진자와 같습니다.
그런가하면 예수님을 초청하여 대접을 바래인은 50데나리온을 빚진자와 같습니다. 어차피 이둘은 예수님의 사죄권을 통하여 죄사함을 받아야하는 존재들입니다. 그리고 이미 예수님은 그들의 죄를 용서해 주셨습니다.
많은 빚을 탕감받은 자와 같은 이 여인은 울며 눈물과 자기의 머리카락으로 발을 씻기며 발에 입을 맞추며, 향유를 예수님께 부어들인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 바리새인은 예수님을 초청하여 대접을 하기는 하였으나 발을 씻어주기를 커녕 발씻을 물도 주지 않았으며 발에 입맞추기는 커녕 볼에 입맞추지 않았으며 머리에 향유를 붓기는 커녕 감람유도 부어주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차이가 어디더 온 것입니까? 많이 탕감받았다고 생각하는 것과 자신은 조금밖에 탕감받지 않았다거나 아니면 자신은 빚진 것이 없다고 생각하는 것의 차이인 것입니다.
많이 탕감받은 자가 많이 사랑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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