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기현의 살림운동
종교적 원리(근본)주의 본문
극단적인 것은 독선으로 흐르게 되고 결국은 대화와 협상과 절충을 통한 살림의 묘보다는 단절과 오기와 편협으로 가게 되고 결국 이것은 죽임의 묘를 발휘하게 된다.
종교적 원리(근본)주의는 유대교나 이슬람교나 기독교나 기타 경전을 소유하고 있는 종교등에서 경전의 문자적이며 기계적인 이해와 해석을 바탕으로 하는 보수적 신앙운동의 일환이다. 특히 이슬람 원리주의는 18세기 중엽, 서양 제국주의 세력의 증대에 반기를 들고 일어난 사우디의 와하비운동으로 시작된 운동으로서 이슬람이 타락하여 무슬림 사회가 쇠퇴하자 이를 재생·부흥하기 위하여 등장한 것이며 시대변화에 따라 다양한 성향을 띠며 오늘에 이어지고 있다. 그리고 기독교의 원리(근본)주의는 현대 과학과 과학적 세계관에 보조를 맞추려던 19세기 극단의 자유주의 신학에 대한 반동으로 생긴 20세기 초의 극단적인 보수주의의 신앙과 신학과 종교운동이다.
이러한 원리주의 운동의 처음 출발이야 신앙의 근본적인 원리를 보존하려는 열심과 순수성을 지니고 있었을 것이며 오직 경전에 담겨진 신의 뜻을 준행하려는 정직한 신앙의 몸부림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원리(근본)주의 자체가 잘못된 것이 아니다. 그런데 이러한 신앙운동이 나 아닌 다른 것은 모두 부정하고 배타하는 극단화현상을 보이면서 이것이 정치적으로 민족적으로 문명적으로 이용되어 왔던 것이다. 종교의 극단적인 원리주의는 배타적인 신앙관을 무기로 자신들의 견해와 의견을 달리하는 세력은 예외 없이 자신들이 믿는 "신의 대적"으로 여기고 단죄를 서슴치 않는다. 그래서 이 극단적인 원리(근본)주의가 세력을 떨치는 곳에는 여지없이 분열과 투쟁과 적대와 다툼과 미움과 정죄가 있게 되었고 살상과 테러와 보복의 악순환이 있었으며 온갖 부정적인 현상이 나타나게 되었다. 단죄하는 방법도 개인적인 살상에서 집단적인 테러와 전쟁에 이르기까지 온갖 방법을 다 동원을 하고 있는 실태에 있다.
종교는 끝까지 살림의 운동을 전개하는 공신체가 되어야지 죽임의 운동으로 변질되는 것은 이율배반이요, 주객전도며, 종교가 그 정도와 순도를 잃어버린 것이며, 종교의 순기능의 상실이며, 역기능의 활성화이며, 이것은 결국 종교의 종말적인 현상인 것이다. 이렇게 되면 기성 종교 자신이 싸잡아 종교의 무용론의 희생양이 될 수도 있음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무종교운동과 또는 신흥종교운동은 이와 무관하지 않다.
지금 세계는 이런 극단적인 원리(근본)주의의 홍수 앞에 위기를 당하고 있다. 지금까지 국지적으로 일어난 많은 종교전쟁들이나 민족적 갈등들의 내면 속에는 극단적인 원리주의의 망령이 도사리고 있었다. 지난번의 미국 세계무역센터와 펜타곤 등을 민간 항공기를 이용해서 테러를 가해 7000명에 이르는 인명을 살상한 것도 이슬람의 원리주의가 작용한 작품이라고 볼 수 있다.
98년 11월 4일 유엔총회는 21세기를 여는 첫해인 2001년을 "문명간 대화의 해(UN Year of Dialogue Among Civilization)"로 선포했다. 이는 인종, 이념, 종교 등 문화의 충돌로 점철된 인류의 역사를 20세기로 마감하고 인류화합의 새 장을 열자는 취지를 담고 있다. 이것은 사무엘 헌팅턴 교수가 그의 저서 [문명의 충돌]에서 냉전이 인류를 분열시키던 시대는 끝이 났으나 21세기에는 각 민족, 종교, 문명권간에 따른 인류의 더욱 근본적인 분열과 충돌이 거세질 것이라는 경고를 한지 2년만에 나온 대응이어서 대단한 의미가 있으며 희망이 있는 조처이기는 했으나 21세기가 시작되는 첫해 그것도 "문명간 대화의 해"에 그것을 비웃기라도 하는듯이 극단적 이슬람 원리주의에 의한 테러가 자행됨을 목격하게 되니 인류의 장래가 걱정이 되지 않을 수가 없다.
인류가 안심하고 살 수 있기 위해서는 너 없이 내가 있을 수 없다는 포용과 획일이 아닌 다양성을 인정하는 공심체적인 삶의 원리를 회복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한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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