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기현의 살림운동
에티오피아 순례기 본문
에티오피아 순례기
2018년 5월 7일(월)~5월 18일(금)까지
아프리카의 에티오피아 북부지역을 순례하기 위하여 2018년 5월 7일(월) 오후 1시에 광주를 출발하여 긴 여정을 시작했습니다. 인천공항을 출발한 비행기는 홍콩을 경유하여 약 17시간을 비행했습니다. 아프리카에서 가장 큰 공항에 속한 아디스아바바에 있는 볼레국제공항에 내려 긴 줄서고, 입국심사 마치고, 드디어 순례길이 시작되었습니다.
공항 대합실을 나오자 고산지대임에 불구하고 그것을 느낄 수 없었고 날씨는 맑고 눅눅하지 않아서 참 좋았습니다. 공항 주변은 식물의 나라에 온 것처럼 온갖 나무의 꽃과 열매들이 시선을 끌었습니다.
마중 나온 명성기독병원(MCM) 원목이신 송선교사의 안내로 공향을 빠져나와 준비된 미니버스 두 대에 일행들이 나누어 타고 명성기독병원병원으로 향하였습니다.
공항을 벗어나기도 전에 눈에 들어온 것은 좁은 비포장도로와 양들을 팔고 사는 가축시장이었습니다. 그리고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고 걸어지나가는 한 흑인 남자의 모습을 보면서 이것이 에티오피아의 전부라면 그 열악함과 원시성에 한숨지을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몇 번 공황주변을 왕래하고 나서야 그 길이 공항 뒷골목 길이고 나체의 남자는 일상이 아니라 어쩌다 목격한 특별한 일이었던 것입니다.
에디오피아의 수도는 아디스아바바, 그 뜻은 "새로운 꽃"이라는 뜻입니다. 사용하는 년도가 다르고 시간도 달랐습니다. 그것은 사용하는 역법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생활수준은 한국의 50~60년대 수준에 놓여 있고, 제조업은 4%, 나머지는 농업과 서비스업이 차지하고 있습니다. GNP는 정부의 공식적인 발표는 1,900불이라고 하는데 실제적으로는 810불 정도라고 합니다. 국토는 한반도의 5배, 남한의 11배로, 1,104,330평방킬로미터에 이르는 큰 나라입니다. 인구는 1억이 조금 넘습니다. 출산은 성인 여인 한 명당 5~6명, 평균 수명은 60여세, 종교는 개신교 18%, 정교회 40%, 이슬람 33%의 분포이며, 많은 지원을 받고 있는 무슬림이 급성장세에 있다고 합니다.
우리의 첫 방문지는 명성 크리스찬 메디컬센터였습니다.
명성교회가 에디오피아 수상의 요청으로 세운 종합병원과 의과대학입니다. 명성교회에서 이곳에 메디컬센타와 의과대학을 세운 것은 첫 번째로 아프리카에서 유일하게 유엔군으로 참여해서 한국전쟁을 치뤄준 나라이기에 그 보은의 일환으로 이 일을 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한국참전 용사들에게는 치료비를 전액 무료로 하고 있으며, 그 부인에게는 50%의 혜택을 주고 있고, 매년 그 자녀들 중에 특별학생으로 정원 외 2명을 선발하여 입학을 시켜 지도자를 키우고 있다는 것입니다.
에티오피아에서는 가장 좋은 병원으로 인정받고 있는 명성기독메디칼센타의 병원장으로부터 병원과 대학에 대한 브리핑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나라도 하지 않는 일을 개 교회가 주의 이름으로 이런 일을 하고 있음을 인해서 감격했고, 참 멋지고 값진 일을 하고 있음에 감사했습니다.
병원을 나와서 국립공원으로 조성된 한국전참전용사기념관을 방문하게 되었습니다. 그곳에서 선교하는 분의 주선과 안내로 참전용사를 만날 수 있었습니다. 현참전용사회장, 참전용사분들, 참전용사 가족 분들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기념관에 비치되어있는 한국전쟁 참전 관계물들을 관람했고 그리고 분들과 조촐한 티타임을 갖을 수 있었습니다.
에티오피아 군인들이 참전한 곳이 양구, 철원, 화천 지역이었기에 춘천시가 에티오피아 아디스아바바시와 자매결연을 맺고 참전 기념관을 춘천시에 건립하여 에티오피아인들의 숭고한 희생을 기념하고 있으며, 에티오피아의 수도 아디스아바바에도 기념탑과 공원을 건립하였던 것입니다.
에티오피아 지역은 구약성경에 구스로 등장하고 있는 지역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구스는 '검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실재로 에티오피아사람들은 자신들을 검다고 생각하지 않고 커피색이라고 한답니다. 그래서 에티오피아 사람들을 자세히 보니 정말 검지 않고 아름다운 커피색이었습니다.
성경에 등장하는 구스가 지금의 에티오피아라고 말할 수 있는 근거는 사실 없습니다. 고고학적으로 볼 때 구스는 넓게는 홍해를 건너 지금의 소말리아와 예멘 지역까지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어떻든 성경에 구스가 최초로 등장하는 곳은 창 2:13절입니다. "둘째 강의 이름은 기혼이라 구스 온 땅을 둘렀고" 에덴에서 발원되는 두 번째 강인 기혼이 구스땅을 휘감고 흘러내렸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창 10: 6~8절에 "함의 아들은 구스와 미스라임과 붓과 가나안이요 구스의 아들은 스바와 하윌라와 삽다와 라아마와 삽드가요 라아마의 아들은 스바와 드단이며 구스가 또 니므롯을 낳았으니 그는 세상에 첫 용사라" 그러니까 인류의 최초의 용사가 구스의 후손에서 나왔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에티오피아는 강한군대를 지니고 있습니다.
에티오피아는 이 땅에 6.25전쟁이 발발했을 때, 아프리카에서 유일하게 유엔군으로 참전을 해준 우리가 빚진 나라입니다. 총 6,037명이 파병되었는데 그들은 에티오피아 마지막 황제인 하일레 살라시에(Haile Selassie)황제의 근위대였습니다. 이들은 대한민국을 위해서 253회의 전투를 치렀습니다. 이 때 전사한 군인이 152명이고 부상자가 536명이 발생했습니다. 그러나 모든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었고 단 한 명의 포로도 발생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들이 대한민국에 군대를 파병한 이유는 그 나라가 1930년대 이탈리아의 침략을 받았을 때 국제적인 도움을 요청했으나 무위로 끝나 결국 잠시나마 이탈리아의 식민지배를 받게 된 쓰라린 역사적인 경험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자신들은 비록 국제적인 도움을 받지 못했지만 자신들과 같은 아픔을 겪지 않게 하기 위해서 대한민국에 지상군을 파병한 것입니다. 처음엔 유엔군으로 받아주지 않아서 단독으로라도 참전하겠다고 해서 결국은 유엔으로부터 허락을 받아 유엔군으로 참전을 했는데, 한국에 오기 위해서 항구로 이동하는데 열차로 보름, 다시 배를 타고 23일을 걸려 인천에 도착하여 참전한 걸로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명성기독병원과 의과대학을 이곳에 설립한 두 번째 이유는 아프리카선교의 교두보 역할을 삼기 위함이었다고 합니다. 에티오피아는 이슬람이 모든 기독교 지역을 집어 삼킬 때에도 그 모든 도전을 극복하고 아직까지 생존하는 몇 안 되는 기독교 공동체를 갖고 있는 대단한 나라입니다. 주변에 강력한 이슬람 국가들과 이웃하고 있을 뿐 아니라 내부적으로 계속 팽창 성장하는 이슬람에 대한 대처를 해야 하는 개신교입장에서 선교적인 차원으로 에티오피아에 거점적인 센터를 세웠다는 것입니다. 요즈음 명성교회가 세습 문제로 지탄을 받고 있지만 참 큰일을 했구나 싶었습니다.
이어 에티오피아 정교회 총회본부를 방문했습니다. 에디오피아 정교회는 국민의 40% 이상에 해당하는 교인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곳에는 에티오피아 정교회의 출발과 지금까지의 과정들을 그림을 통해서 전시하고 있고, 역대 총대주교의 초상화와 유품 그리고 정교회의 유물들을 보관하고 전시하고 있었습니다.
에티오피아의 정교회는 에티오피아 사람들의 정신과 삶을 지배하고 있고, 지금도 활발하게 움직이고 있는 에티오피아의 정신적 지주의 역할을 하는 생명력 있는 종파입니다.
에티오피아에 입국하자마자 쉬지 않고 시작된 순례길에서 첫 숙박지(호텔)에 여장을 풀었습니다.
싼 값으로 인한 것도 있겠지만 전기가 두 번 정전되었고, 수돗물이 잘 나오지 않아서 씻는 일은 대충, 물이 잘 빠지지 않아서 화장실 가기가 싫었습니다. 전기 문제는 이곳의 일상이란 것을 나중에야 알았습니다.
다음날 악숨제국을 순례했습니다.
아침 4시에 기상, 아침식사 6시, 식후에 공항으로 출발, 아디스아바바 볼레공항에서 다시 비행기를 타고 악숨으로 이동했습니다.
에티오피아의 시작은 기원전 800년경에 형성되었는데, 시바의 여왕이 솔로몬의 지혜의 소문을 듣고 3개월에 걸려 예루살렘을 찾아와 6개월 동안 머물면서 솔로몬의 여인이 되었고, 임신한 상태로 자신의 나라 악숨으로 돌아와 아들을 낳았는데 그가 에디오피아 초대왕인 메넬리크(Menelik) 1세였습니다. 그 이후로 아프리카에서 유일하게 자주 독립국가를 형성하는 대표적인 나라로 인정받고 있습니다. 이렇게 솔로몬왕과 시바 여왕으로 시작된 에티오피아의 왕가는 마지막 황제인 하일레 셀라시에(Haile Selassie, 1892-1975)까지 3000여년 동안 이어집니다.
그러나 1974년에 쿠테타로 황제를 몰아내고 공산주의 통치를 실현하기에 이렀습니다. 이후 각 지역별로 반란이 일어나고 심각한 가뭄과 기근이 에티오피아 전체를 강타하였습니다. 이는1991년 멩기추(Mengistu)의 마르크스 통치의 몰락으로 이어졌습니다. 이때부터 아마라 종족이 아닌 티그라이(Tigrary)종족 주도의 연방제 형태의 민주 정부가 출현하게 됩니다. 1998년부터2000년에는 에리트리아(Eritrea)와의 전쟁으로 에티오피아 내부적 결속이 강화되었습니다. 2005년에 성공적인 선거가 치루어졌고 멜레스 수상 정부가 많은 논란 가운데 출현하여 많은 우여곡절을 겪은 뒤 현재에 이르고 있습니다.
솔로몬과 시바여왕 사이에서 태어난 에티오피아왕 메넬리크 1세는 장성한 후에(22세), 아버지인 솔로몬을 찾아갔을 때 유다통치를 제안받았으나 거부하고, 예루살렘에서 3년을 머물다 돌아오면서 언약궤를 가지고 돌아왔다고 주장합니다. 그리고 그 언약궤는 이프리카 최초의 교회로 일컬어지는 "시온의 성 마리아교회(Church of st, Mary of Zion)"에 보관되어 지금까지 내려오고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제까지 한 번도 공개한 적이 없습니다. 언약궤를 볼 수 있는 사람은 언약궤를 지키고 있는 수도사 한 사람뿐입니다. 그는 죽을 때까지 성소 밖으로 나올 수 없고, 그 외에는 어느 누구도 언약궤가 있는 지성소로 들어갈 수 없습니다. 어떻든 메넬리크를 돌려보내면서 솔로몬은 이스라엘 각 지파에서 천 명씩을 뽑아 모두 12,000명의 이스라엘 백성들을 그 아들과 함께 에티오피아로 보냈다고 합니다.
시바여왕의 궁전터와 목욕하던 곳을 방문했습니다.
병풍처럼 낮은 산으로 둘러쌓인 곳에 50여칸으로 형성된 궁전으로 지금은 옛 성터의 흔적위에 규모를 알 수 있도록 나지막하게 돌담을 쌓아놓은 궁전터였습니다. 그리고 시바여왕이 사용했다던 산 아래 노상에 위치한 저수지 같은 목욕장소를 스처지나가듯이 보았습니다.
악숨제국의 왕들의 무덤과 무덤에 세워진 오빌리스크를 살펴보았습니다. 가장 큰 오벨리스크는 높이 33미터, 무게가 500톤이나 됩니다. 무게 중심을 잡지 못해서 무너져 내려 여러 개의 조각으로 깨져 누워있었습니다. 두번째 큰 오벨리스크는 높이 24미터, 무게가 160톤 정도로 무솔리니 시대에 이탈리아의 침공 때에 로마로 옮겨졌다가 유엔의 권고로 다시 제자리로 오게 되었고, 돌아오는 과정에서 세 토막으로 분리해서 가져와 다시 복원했으므로 그 흔적이 고스란히 오벨리스크에 남아 있어 에티오피아인들의 고통을 볼 수 있었습니다.
한 때 악숨제국은 세계의 4대 제국에 들어갈 만큼 거대하고 강한 나라였으나 지금은 악숨지역 모든 곳에서 하나같이 어린이와 청소년들이 달라나 초콜렛을 얻고자 관광객들에게 손을 내밀고 조악한 수공물건들을 팔아보겠다고 끈질기게 따라붙어 다녔습니다. 그 과정에서 어떤 아이 하나를 보았는데 어렵게 초콜렛 하나를 얻어 껍질을 다 까지도 않고 냄세만 맡아보다가 손가락에 초콜렛을 묻혀 입에 넣는 아이가 있었습니다. 얼마나 귀했으면 한 입에 다 털어넣지도 못하고 오래 오래 아껴 먹으려고 저러나 싶어 안타까웠습니다. 한 때는 세계의 4대 제국에 속한 위대한 땅이었는데 그 후손들이 이렇게 사나 싶었습니다. 한 아이가 어렵게 얻은 초콜렛을 힘센 아이가 빼앗고, 빼앗겼다고 우는 아이를 두둘겨 패고, 오줌까지 싸버리는 일도 발생했습니다. 청소년들이 연필이나 공책, 심지어 물까지도 얻으려고 하는 모습들 속에서 우리는 얼마나 좋은 나라에서 사는지 새삼 깨닫게 되었습니다.
시온 마리아교회(Church of st, Mary of Zion)를 방문했습니다.
구교회당, 박물관, 신교회당 세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는 곳인데, 구교회당은 여자는 들어갈 수가 없는 교회당이었고, 그래서 세운 신교회당은 남녀모두 들어가 예배할 수 있는 교회당이었습니다. 박물관에는 제정일치 시대에 많은 유물들이 보관되어 있었습니다.
에티오피아는 아르메니아에 이어서 지구상에서 두 번째로 기독교를 국교로 공인한 국가입니다. 이 나라의 역사 하나 하나가 역경과 투쟁 그리고 가난 속에서도 복음의 꽃을 피운 나라입니다. AD 330년경 에자나(Ezana)왕 통치시기에 기독교를 국교로 받아들였습니다. 전통적인 유대교의 전례를 따르면서 그리스도교가 접목되어 독특한 종교양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악숨에서 비행기로 랄리벨라로 이동해서 순례길을 이어갔습니다. 랄리벨라에 도착하여 미리와 있던 미니버스를 타고 대부분 비포장도로였는데 군데 군데 포장공사를 하고 있는 지루하고 먼 길을 달려 숙소에 도착하자마자 방배정만 받고 다시 순례길을 이어갔습니다.
악숨 왕국을 이어서 12세기 초에 자그웨 왕조가 세력을 형성하게 되었고 자그웨 왕조의 가장 영향력있는 지도자는 랄리벨라 왕이었습니다. 그는 수도를 악숨에서 라스타지방의 로하로 천도했으며 그곳 지명을 랄리벨라로 바꾸었습니다. 랄리벨라는 해발 3000미터 고원지대에 위치해 있습니다.
로하에 랄리벨라 왕이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이 이슬람에 의해서 막히게 되자 제2의 예루살렘을 건설하게 되었습니다. 붉은 용회암을 망치와 끌과 정으로 깎고 파서 총 11개의 암석교회당을 세웠습니다. 건물의 벽을 보면 그 자국들이 선명하게 남아 있는 것이 보입니다. 암석교회당은 위에서부터 바위산을 지하로 깎고 파서 만든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모든 교회당은 지하 통로로 연결되어 있는 신앙의 요세입니다. 한곳의 지하통로를 걸어보았는데 그곳을 일명 지옥길이라고 한다고 합니다.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칠흙 같은 흑암의 길을 걷는 체험이었습니다.
그리고 낙타 등과 같이 생긴 바위산과 그 밑으로 바늘귀 같은 통로가 있어서 그 길을 통과하면서 세상을 어떤 자세로 살아가야 할 것인가를 깊이 묵상하는 시간이 되었습니다.
암석교회 중 가장 규모가 큰 "메드하네알렘교회당"은 가로 22미터, 세로 33미터, 깊이 11미터입니다. 모든 교회당은 상징화 되어 있습니다. 문, 문양, 천장 그림, 벽화, 건축양식 등 모든 것은 다 십자가와 구원을 위한 길을 안내하고 있었습니다. 이 암석교회가 12세기에 수십 년을 걸쳐서 완공하였다고 하는데 그 믿음과 열정이 정말 대단함에 감탄이 나옵니다. 인근에 요단강, 겟세마네, 무지개 언약 등의 성경에 등장하는 지역들과 모형들을 그대로 재현해 놓았습니다.
그 어려운 시절에 모든 것이 열악하기 짝이 없었을 그때에 예배당에 그렇게 많은 상징과 의미를 부여해 놓았다는 것과 그 정교함과 아름다움을 담아놓았다는 것이 놀랍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경제적인 이유로 또는 편리성만 생각한 나머지 문화유산이 되도록 건축하지 못한 것이 우리 한국적인 상황인데 랄리벨라를 보면서 깊은 고민과 생각을 하게 했습니다.
랄리벨라의 풍광이 정말 아름답습니다. 그 중에서도 석양이 그렇게 아름다울 수가 없는 곳이 있다고 해서 저녁 먹는 장소를 그곳에 정하고 석양을 기다렸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곳에 간 날은 석양을 제대로 볼 수는 없었습니다.
어떻든 사방이 캐년인 아름다운 풍광, 좋은 기후, 맑은 공기, 아름다운 야생화들 이런 자연에 잠시라도 안겨 있다는 것이 참 행복했습니다. 이곳에서 에티오피아의 전통 석식을 하면서 잠시이지만 여유 있는 시간을 보낼 수 있었습니다.
랄리벨라에서 숙박을 했는데, 화장실 바닥에 물이 잘 빠지지 않는 것과 창문 잠금장치가 없는 것 빼고는 평안했습니다.
다시 이른 아침에 일어나 식사하고 Yirehane Kristos Monastery(그리스도께서 인도하심을... 이란 뜻) 에르한테 크리스토스 수도원(교회)를 방문했습니다.
이 수도원은 랄리벨라에서 40킬로미터 거리에 위치해 있었습니다. 11세기에 세워진 지하 동굴 속에 세운 수도원(교회)과 사제와 왕을 겸한 그의 거처 팔레스(거처)인데 그곳엔 그의 무덤과 신하의 무덤이 있고 수 많은 순례자들이 이곳에 묻히길 원해서 이곳을 찾았고 죽었으며, 그들의 시체가 미라형태로 그 동굴 속에 그대로 쌓여 있었습니다.
다시 어제 시간이 부족해 다 보지 못한 지하 암석교회 중 천상의 교회라고 일컬어지는 교회를 방문하고 그 지역의 교회유산들을 살펴보는 일을 마무리했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멀지 않는 산꼭대기에 위치하고 있는 Asheten Mariyan Church를 방문하기로 했는데, 비로 인하여 길이 나빠져 안전상 갈 수가 없었으므로 길을 바꾸어서 다른 지하 동굴에 세워진 교회당을 방문하기로 일정을 변경했습니다. 비포장도로를 얼마쯤 달려 도착한 그곳은 자연동굴에 세워진 수도원이었습니다. 새들의 천국, 원숭이들의 놀이터, 식물들의 세상 참 아름답습니다. 그곳에서 수도생활을 하는 수도사들은 자연의 일부분처럼 느껴졌습니다. 해가 지기 전에 일정을 마무리 하고 호텔에 돌아와 가까운 곳에서 식사후 저녁시간을 보냈습니다.
호텔에서 아침 6시 45분에 식사후 7시에 출발하여 하루 종일 버스를 타고 랄리벨라에서 곤드라까지 달려 호텔(Goha Hotel)에 도착하여 4자매 식당으로 옮겨가서 식사후 잠깐의 전통공연을 관람 후 잠자리에 들었습니다.
지금 에티오피아는 공사중입니다. 도로공사중, 주택공사중입니다. 앞으로에티오피가 얼마나 변모할까를 생각해 봅니다. 에티오피아를 횡단하면서 잠깐 공동체 마음을 방문했습니다. 전통마을을 기대하고 갔었지만 그곳은 기대에 미치지 못했습니다. 한 지도자에 의한 신념 공동체로 모여 있는 마을이었을 뿐이었습니다.
순례길을 다니면서 받은 에티오피아인들은 아직은 착하고 순수함을 간직하고 있는 모습입니다. 우리의 버스가 지나가면 먼 곳에서 부터 달려와 손을 흔들어주는 그들의 모습 속에서 옛 추억의 내 어리디 어린 모습이 보였습니다.
깍아지른듯한 지형들인데 그곳을 일구어서 밭을 만들고, 거반 돌로된 밭에 씨를 뿌려 거두는 그들에게서 강인한 생명력과 부지런한 모습을 보게 됩니다. 넓은 대륙, 많은 인구, 가난이 웬수같이 보이는데 그들은 아닐지도 모르겠습니다. 어떻든 에티오피아 백성들이 잘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저들을 축복하옵소서!
오늘은 주일인데 새벽부터 옆에 누워있는 아내에게서 고달픈 신음소리가 들립니다. 몸이 많이 편찮은 모양입니다. 어제 하루 종일 덜커덩거리는 버스를 타고 이동한 후유증에다가 지난 낮과 밤에 먹은 식사가 부담이 되었나 봅니다. 한국에서도 차(車) 멀미를 하는 사람이고 늘 소화 문제를 안고 있는 사람이라도 내가 곁에서 차(茶)를 끊어주는 일들을 해서 별탈없이 지내는데 이곳에서 한다고 했지만 몸에 온 무리를 막아줄 수는 없었던 모양입니다. 먹는 것 다 토하고 아침 금식, 중식 금식, 석식 금식, 호텔에 하루 종일 머물면서 몸이 좋아지기를 기다리고 있어야 했습니다.
"건강이 자유이고 건강이 실력이다"라고 내가 늘 말해왔는데 내 집 식구가 건강하나 돌보지 못해서 부자유하게 호텔에 갇힌 신세가 되었습니다. 건강에 더 신경을 써야 할 것 같습니다.
우리의 일행들은 시멘 국립공원에가서 산상예배를 드리고 유대인 정착촌을 방문 할 것입니다. 아무쪼록 유익하고 행복한 시간들이 될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해질 무렵이 가까워지자 호텔에 결혼식이 한 건 있었습니다. 쉽게 끝나지 않은 대단하고 성대한 결혼식이었습니다. 네자매식당에서 식후에 잠깐 구경했던 전통 음악과 춤과 같은 그런 음악과 춤으로 시작된 결혼식은 몇 시간 계속되었습니다. 신랑과 신부들의 들러리들에 둘러싸여서 노래하고 춤추며 행복해하는 신랑신부의 모습을 보면서 일평생 저 모습 저대로 살 수 있기를 축복했습니다.
식후에는 유대인공동체를 이끌고 있는 지도자와 함께 잠깐 질의응답시간이 있었으나 오늘 일정을 함께 하지 못한 관계로 조용히 참석만 했습니다.
곤다르에서 다시 1박을 하고 집사람의 건강이 회복되었습니다. 많은 이들의 염려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건강해진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모릅니다.
아침에 일어나 파실게비를 방문했습니다. 파실게비는 17세기 총 5명의 황제에 의해 건립되었습니다. 건축양식은 악숨양식과 포르투칼 양식 그리고 아랍양식이 혼합되어 있습니다. 시내에 있는 파실게비는 성벽으로 둘러싸인 파실라데스 궁궐, 요한네스 궁궐, 이수아 궁궐, 다윗 궁궐, 베카파스 궁궐로 이곳에서 역대왕들의 유적을 살펴보았고, 파실라디스 황제의 목욕탕을 보았습니다.
파실레스 목욕탕은 팀카스(Tmkat) 곧 예수님이 요단강에서 세례받은 날을 기념하여 1월 20일에 축제가 있는 곳입니다.
유대인공동체를 방문했습니다. 지난 저녁에 호텔에서 질의 응답을 했던 유대인공동체의 지도자의 안내를 받았습니다. 이곳은 지금까지의 수도원과 교회와는 달리 함석으로 얼키설키 엮어서 만든 그런 공간이었지만 유대인공동체의 교육와 예배 그리고 공동식사가 이루어지는 곳입니다. 그곳의 출입구에는 어김없이 메주자(기둥)에 쉐마(토라)가 달려 있었습니다. 드나드는 사람들이 얼마나 만졌는지 손떼가 묻어 윤이 나고 있었습니다.
데브레 바르한 셀라시에 교회(Debre Birhan Selassi Church)를 방문했습니다.
이 교회당은 17세기에 만들어진 교회당으로 곤다르에 남아 있는 교회당중 가장 오래된 역사를 지니고 있다고 합니다. 이 교회당 천장에는 144천사의 다양한 얼굴이 그려져 있어, 아프리카의 시스티나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살라시에 교회당의 그림은 한 수도사에 의해서 12년 동안 그려졌다고 합니다.
곤다르에서 바하르다르로 이동하여 바하르다르에 있는 호텔에서 여장을 풀었습니다. 이곳 숙소는 참 깔끔하고 좋았습니다. 가까운 곳에 거대한 호수가 자리 잡고 있었으나 낮선 곳이기도 하고, 피곤하기도 하고, 무엇보다도 숙소가 좋기도 해서 그냥 숙소에 머물면서 다우와 찻자리 후에 잠자리에 들었습니다.
바하르다르 지역에는 타나호수와 블루나일이 있습니다. 내륙에 이렇게 큰 호수가 있음도 신기하고, 나일강의 시작이 여기서부터 발원하고 있다는 사실에 경외감을 갖습니다. 아침 식사 후에 배를 타고 타나호수에 있는 수도원(Ura Mihret)을 방문했습니다.
이 수도원은 무슬림의 공격과 파살라세스 황제의 아버지가 카톨릭으로 개종하면서 종교탄압을 하자 정교회 수도사들이 섬으로 들어가기 시작했고 그렇게 세워진 수도원이라고 합니다.
온통 성화로 가득한 원추형 예배당과 시설들을 관람하고 숲길을 내려오면서 그곳의 상징 십자가 하나를 구입하고 타고들어온 배를 다시 타고 숙소 가까운 곳에 준비된 중식을 먹을 곳으로 갔습니다.
호수 옆 공원에 마련된 야외식당에서 중식을 먹고 바하르다르에서 비행기로 아디스아바바로 이동하여 저녁을 먹고 호텔에 투숙했습니다.
마지막 에티오피아에서 호텔은 참 좋았습니다. 편한 잠을 잘 수가 있었습니다.
아침 식사후에 하일레 살라시에 황제 궁궐터에 세워진 에티오피아 최고의 국립대학 아디스아바바대학교에 있는 에티오피아 민속박물관을 방문하여 에티오피아의 생활사를 관람하고 하고, 다시 에티오피아민족국립물관을 방문하여 직립보행의 시작을 알리는 루시의 유골을 보았습니다.
하일레 셀라시에 황제가 세운 트리니티정교회를 방문하여 교회당에 아름다운 스테인글라스를 보았고, 특이하게 교회당 안에 황제의 자리와 황후의 자리가 마련된 것을 보았으며, 그 두 사람의 무덤이 교회당 안에 있음을 보았고, 그 예배당 지하에는 한국참전용사 중에 전사한 152명의 유골이 안치 되어 있는 것을 살펴보면서 다시 그들에게 감사의 마음을 품었습니다.
에티오피아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받은 시기는 에티오피아인들은 예수님께서 어린 시절 이집트를 거쳐서 악숨지역까지 왔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성경의 뒷받침은 없습니다.
에티오피아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받아들이게 된 것은 우리가 잘 아는대로 빌립이 성령에 의해서 예루살렘성전을 찾아와서 예배하고 돌아가던 에디오피아 여왕 간다게의 모든 국고를 맡은 관리인 내시에게로 보내심을 받음으로 인해서 였습니다.
그런데 빌립집사가 성령의 부르심을 받은 때는 누구도 성공을 예상하지 못했던 사마리아에서 큰 성공을 거두고 있을 때였습니다. 행 8:5절 이하에 보면 "빌립이 사마리아 성에 내려가 그리스도를 백성에게 전파하니 무리가 빌립의 말도 듣고 행하는 표적도 보고 한마음으로 그가 하는 말을 따르더라 많은 사람들에게 붙었던 더러운 귀신들이 크게 소리를 지르며 나가고 또 많은 중풍병자와 못 걷는 사람들이 나으니 그 성에 큰 기쁨이 있더라."고 했습니다.
이처럼 사람들의 환호와 기대가 커져가는 공동체는 아마도 그에게 많은 유혹이 되었을 것입니다. 더 많은 사람을 모으고, 더 큰 공동체를 만들고 싶은 생각이 있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그 동안의 고생을 보상 받을 기회를 얻은 빌립에게 성령께서는 그 모든 것을 내려놓고 남쪽으로 내려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남쪽은 바로 광야의 길이었습니다(26절).
광야가 무엇입니까?
히브리어로 광야를 '미드바르'라고 합니다. 그 뜻은 '하나님을 만나는 곳'이란 뜻입니다. 하나님 밖에는 의지할 대상이 아무것도 없는 곳에서 사람들은 자연히 하나님께만 집중하게 되고 결국 그곳에서 하나님을 만나게 되기 때문입니다. 광야에서의 시간은 '하나님'에 대해서 알아가는 시간입니다. 세상에서 떨어져서, 고립되어 있는 광야에서의 시간에 기존에 자신의 정체성을 하나님에게서 찾은 사람들은 필연적으로 하나님을 찾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잘 나가던 빌립을 하나님께서 ‘미드바르’ 즉 광야로 부르신 것입니다. 빌립은 성령의 부르심에 순종했습니다. 그렇게 성령의 부르심에 순종하여 모든 걸 버리고 내려간 그 길에서 빌립은 누구를 만나게 됩니까? 그렇습니다. 에티오피아 내시를 만납니다. 그리고 그 만남은 에티오피아에 복음의 길을 여는 만남이 되었던 것입니다.
마침 그때 에티오피아의 내시는 성경을 읽고 있었는데 그 뜻을 깨닫지 못하고 읽고 있었을 뿐이었습니다. 에티오피아 내시가 읽고 있었던 성경은 이사야 53장이었는데 누구에 대한 예언인지 깨닫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당시 에티오피아는 구약 유대전통에 머물러 있었으니 당연히 복음을 몰랐습니다. 성령님께서 에티오피아를 구원하시려고 이사야가 예언하고 있는 그 분이 바로 십자가를 지시고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이신 것을 연결하여 깨닫게 해주었습니다.
에티오피아는 기독교적인 유산이 참 많은 나라입니다. 그들이 신앙을 지키기 위해서 이슬람에 의해서 성지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이 막히자 자신들의 나라에 제 2 예루살렘을 건설하여 신앙을 지켰고, 바위를 파서 11개의 교회당을 만들어 지하로 연결하여 암혈과 토굴속에서 믿음을 지켰고 동굴과 호수로 들어가 그곳에 교회당을 짓고 믿음을 지켰습니다.
그리고 에티오피아 어디를 가든 진한 커피향이 코끗을 간지럽힙니다. 호텔을 가도 식당을 가도 공항의 한편에서도 배를 타도 커피를 끊이는 여인이 있었습니다. 최초로 커피를 발견한 나라답습니다. 집에 돌아갈 때 에티오피아에서 사갈 것은 커피밖에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순례를 마치고 명성기독병원식당에서 식사를 한 후 아디스아바바 공항에서 수요일(16일) 저녁 비행기를 타고 목요일 내내 그리고 인천비행장을 거처 광주에 도착하니 금요일(18일) 새벽 2시 반이 되었고, 집에 돌아와 아침에서야 잠이 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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