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기현의 살림운동
겉을 만드신 이가 속도 만들지 아니하셨느냐?(눅 11:37~41) 본문
11:37 예수께서 말씀하실 때에 한 바리새인이 자기와 함께 점심 잡수시기를 청하므로 들어가 앉으셨더니
11:38 잡수시기 전에 손 씻지 아니하심을 이 바리새인이 보고 이상히 여기는지라
11:39 주께서 이르시되 너희 바리새인은 지금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나 너희 속에는 탐욕과 악독이 가득하도다
11:40 어리석은 자들아 밖을 만드신 이가 속도 만들지 아니하셨느냐
11:41 그러나 그 안에 있는 것으로 구제하라 그리하면 모든 것이 너희에게 깨끗하리라
오늘 주신 본문 말씀 중심으로 해서 "겉을 만드신 이가 속도 만들지 아니하셨느냐?"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묵상하도록 하겠습니다.
우리가 세상 살다보면 앞과 뒤, 겉과 속이 다른 모습을 갖고 있는 사람을 만나게 됩니다. 이런 사람들은 순간적으로 문제를 모면하는데 아주 능숙합니다. 표정하나 바꾸지 않고 거짓말을 하고 겉과는 다르게 속에서는 계산이 빠르게 진행됩니다. 그러나 이런 사람들은 잠깐은 문제를 모면할 수 있을지로지만 결국은 사람 사이에 믿음을 잃게 만들고 맙니다. 믿음을 잃은 삶은 자기 영혼의 분열도 초래하지만 다른 사람과의 관계도 끝내 깨지게 됩니다. 무엇보다도 하나님께서 그런 사람을 좋아하지 않으신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아니히하시고 중심을 보신다고 하셨습니다.
오늘 본문말씀의 배경은
예수님께서 한 바리새인이 자기와 함께 점심 잡수시기를 청하매 그 집에 들어가 앉으셨습니다. 그리고 음식을 잡수시기 전에 일부러 손을 씻지 아니하셨습니다. 아마도 예수님은 의도적으로 바리새인들을 교훈하시고자 그렇게 하신 것으로 보여집니다. 그러자 38절에 "이 바리새인이 보고 이상히 여기는지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리새인들의 잘못된 것을 바르게 잡아주어야 겠다는 생각을 하고 계셨던 모양입니다. 그리고 언젠가 교훈할 구실을 찾아서 그것을 통하여 말씀을 주시고자 하셨던 모양입니다. 그런데 마침 바리새인에게 초대를 받을 기회가 생겼고 이 기회를 바리새인을 교훈하기 위한 절호의 기회로 여기신 것 같습니다.
사실 자녀들을 훈계할 때도 구실이 있을 때 하는 것과 구실이 없는데 느닷없이 하는 것과는 받아들이는 것 자체가 다릅니다.
일부러 손을 씻지 않고 식탁에 앉음으로써 바리새인으로 하여금 반응을 일으키게 하고 그 반응에 따라서 교훈을 하신 것입니다. 아니나 다를까 예수님께서 손을 씻지 않고 점심식탁에 앉은 것을 바리새인은 이상히 여기는 반응을 보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과 같은 교훈을 주시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은 부정한 것을 조장하신 분이 아니십니다. 그리고 손을 깨끗이 씻는 것을 나쁘다고 정죄하는 것이 아닙니다. 손씻기만 잘해도 많은 질병을 예방할 수 다고 하지 않습니까? 그럼으로 손을 부지런히 잘 씻어야 합니다. 그러나 구원은 손을 깨끗이 씻는 외적인 정결예식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속 사람의 정결과 속사람의 강건과 속사람의 거듭남에서 오는 것입니다.
오늘 "겉을 만드신 이가 속도 만들지 아니하셨느냐?"하고 질문하신 예수님의 질문의 단추가 되었던 바리새인들은
1. 매우 주의 깊게 외적인 정결은 준수했지만 내적인 사악함은 무시했습니다.
이것이 바리새인들의 '인격'과 '삶'과 '신앙'의 특징 중의 하나였습니다. 하나님 말씀보다는 유전으로 내려오는 유대인들의 관습을 훨씬 더 중요시했습니다. 주님은 처음으로 바리새인들의 가장 큰 잘못이 무엇인가를 지적하시고 가르쳐주신 것입니다. 그것은 외적인 것에 지나치게 관심을 갖는다는 것입니다. 그들의 삶의 내적인 조건에 대해서는 무관심하면서도 말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초대한 사람을 면전에 두고 매우 강한 어조 그들의 위선을 지적하신 것입니다. 단순한 실수나 잘못을 지적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고질적인 병패를 지적하신 것입니다.
그들은 식전에 손을 씻음은 물론 자기들이 먹고 마시는 잔과 대접도 깨끗이 씼었습니다. 반면 그들은 탐욕과 악독이 가득 차 있는 자기들의 속 마음은 씻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표리가 부동한 위선자들이었던 것입니다.
상스러운 말을 정결케 하는 방법은 이를 닦는 것으로나 혀를 닦는 것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을 정결케 하는 것으로 되는 것입니다.
주님은 바리새인들을 향하여 "어리석은 자들아"라고 하셨습니다.
겉만 깨끗하게 포장을 하면 속의 추악함이 감추어질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던 그것이야 말로 하나님 앞에서 용납될 수 없는 어리석은 짓임에 틀림없는 일입니다.
그래서 눅 11:44절에보면 예수님이 위선적인 바리새인들을 보고 “너희는 평토장한 무덤 같아서 그 위를 밟는 사람이 알지 못한다”고 하셨습니다. '평토장한 무덤’이란 것은 ‘흙을 둥글게 쌓아 올리는 무덤, 곧 ’봉분을 만들지 않고 평평하게 매장한 무덤’을 가리킵니다. 그러니까 숨기어서 사람들이 알아볼 수 없는 무덤을 가리킵니다. 무덤인 줄 모르게 해 놓았으니 사람들이 무덤 위를 마구 밟는 것입니다. 따라서 “바리새인들이 평토장한 무덤 같다”는 것은 “그들은 매사에 철저하게 덮어 감추거나 가리어 숨긴다”는 것입니다.
같은 사건을 기록한 마태복음 23:27-8에서는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을 향해 ‘회칠한 무덤 같다’고 하셨습니다.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회칠한 무덤 같으니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나 그 안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더러운 것이 가득하도다 이와 같이 너희도 겉으로는 사람에게 옳게 보이되 안으로는 외식과 불법이 가득하도다”
그러나 잠 26:23절에서 "온유한 입술에 악한 마음은 낮은 은을 입힌 토기니라"하셨습니다. 은을 입혀서 실제로는 없는 가치가 있는 것처럼 보이게 하지만 그 은이 낮은 은이기 때문에 결국 그 본심을 드러내고 말게 되는 것입니다.
2.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을 이렇게 꾸짖으시면서 "겉을 만드신 이가 속도 만들지 아니하셨느냐? 질문을 던지신 것은 그들이 가치를 전도시켰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동기가 악했기 때문입니다. 겉과 속의 우선 순위를 둔다고 하면 가치의 경중을 따진다고 하면 당연히 속이 우선되어야 하고 속의 가치가 더 큰 것입니다. 그런데 바리새인들은 이것을 뒤바꿔버렸던 것입니다.
겉과 속을 만드신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속을 더 중요하게 여기든지, 그렇지 아니하면 겉과 속의 가치를 동등하게라도 해야 될 것입니다. 그것이 만드신이를 경외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가끔은 "보기보다는 다르네, 보기보다는 내용이 알차다"는 말을 듣습니다.
적어도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멀리서 겉만 볼 때보다도외모보다도 내용이 더 좋은 사람이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3,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의 모습에는 바리새인들의 외모지상주의, 외형중시주의는 없습니까?
우리에게는 겉다르고 속다른 것은 없습니까?
있다면 오늘 말씀 앞에서 겸손히 회개하고 고쳐야 할 것입니다.
내면은 놓아둔채 외모 집착, 외형만 집착하는 것은 복음적이지 않고 예수적이지 않습니다.
실속형, 내적 풍부함을 갖추는 것이 복음적이고 예수적인 것입니다. 겉만 번지르르한 삶보다는 실속형 삶을 사는 우리 교회와 우리 성도들이 되도록 합니다. 믿음의 사람들인 우리들은 밖에서 잘보이는 부분만 가꾸는 자가 아니라 밖에서 보기에는 너무 깊어서 잘 보이지 않는 곳까지 잘 가꾸는 삶을 살아가야 할 줄로 믿습니다.
'예수님의 질문' 카테고리의 다른 글
누가 나를 너희의 재판장이나 물건을 나누는 자로 세웠느냐?(눅 12:13~21) (0) | 2018.01.26 |
---|---|
참새 다섯마리가 두 앗사리온에 팔리는 것이 아니냐?(눅 12:1~7) (0) | 2018.01.26 |
스스로 분쟁하면 그의 나라가 어떻게 서겠느냐?(눅 11:14~20) (0) | 2018.01.26 |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눅 11:11~13) (0) | 2018.01.24 |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눅 10:25~37) (0) | 2018.01.2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