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기현의 살림운동

누가 그를 더 사랑하겠느냐?(눅 7:40~42) 본문

예수님의 질문

누가 그를 더 사랑하겠느냐?(눅 7:40~42)

유앙겔리온 2018. 1. 24. 11:59

7:40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시몬아 내가 네게 이를 말이 있다 하시니 그가 이르되 선생님 말씀하소서
7:41 이르시되 빚 주는 사람에게 빚진 자가 둘이 있어 하나는 오백 데나리온을 졌고 하나는 오십 데나리온을 졌는데
7:42 갚을 것이 없으므로 둘 다 탕감하여 주었으니 둘 중에 누가 그를 더 사랑하겠느냐

 

  예수님께서 시몬이라는 바리새인으로부터 초청을 받아 그 집에 들어가서 식사를 대접받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바리새인집에서 식사하는 자리에서 의외의 일이 벌어지게 되었습니다. 그 동네에서 누구나 다 아는 죄인으로 여겨지는 한 여자가 예수님께서 그곳에서 식사하신다는 소식을 듣고 찾아와 값비싼 향유 한 옥합을 깨뜨려서 예수님의 머리에 붙고 울며 눈물로 그 발을 적시고 자신의 머리카락을 풀어 예수님의 발을 닦아드리며 그 발에 입맞추는 일을 했던 것입니다.

 

   바리새인인 시몬은 싹싹한 말투와 예의 있는 태도로 예수님을 자기 집에 초청해서 식사를 대접하기는 했습니다. 그렇지만 그의 식사대접은 옥합을 깨트려 예수님께 부어드린 여인으로 말미암아서 빛을 잃게 되었습니다.

 

    이런일이 벌어지게 되자 바리새인 시몬은 꾀나 불쾌했고 언짢아졌습니다. 자신이 예수님께 한 것보다 죄인이라고 딱지가 붙은 여인이 한 것이 더 크고 많음에 분노가 치밀었을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런 일을 말리지 않고 고스란히 받아들이고 있는 예수님에 대해서  "이 사람이 만일 선지자더면 자기를 만지는 이 여자가 누구며 어떠한 자 곧 죄인인 줄을 알았으리라"(39)하면서 예수님을 경멸하는데까지 이르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바리새인 시몬의 이러한 생각을 아시고 오늘 본문의 말씀을 주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시몬의 이름을 불러서 비유를 말씀하시고 그에게 질문을 하셨습니다. 
"빚 주는 자에게 빚을 진 사람이 둘이 있었는데 하나는 오백 데라리온을 졌고 다른 하나는 오십 데라리온을 졌는데 둘 다 갚을 길이 없음으로 인해서 그 빚진 것을 탕감을 받았다면 둘 중에 누가 빚을 탕감해 준 그 사람을 더 사랑하겠느냐?"
  이에 시몬은 "많이 탕감받은 사람입니다. 대답하자 예수님은 "네 판단이 옳다"말씀하셨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비유로 화폐의 단위인 한 데라리온은 장정이 하루 품삯에 해당하는 금액입니다. 따라서 오백 데나리온빚진자와 오십 데나리온의 빚진자가 있다는 말은 충분히 그 격차를 느낄 만큼 큰 것입니다. 그리고 이 비유는 죄인인 여성과 스스로 의롭다하는 바리새인 시몬과의 격차를 나타내는 것입니다. 

 

  500데라리온 빚진자가 죄인이라고 딱지가 붙은 여인이라고 하면 50 데라리온 빚진자는 바로 바리새인 시몬일 것입니다. 바리새인인 시몬은 죄인인 여자에 비교하면 죄가 작은 자였고 빚을 진 것이 별로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세상의 판단 기준으로하면 충분히 도덕적 우월감을 가질 수 있는 격차임에 분명합니다. 그러므로 당연히 탕감받은 것도 그리 크지 아니하니 고마워 할 것이나 감사할 것이 별로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니 예수님을 초청하고 식사를 대접하는 것도 예수님을 사랑해서가 아니라 그 시대에 예수님 정도는 모시고 식사 한 끼쯤은 해야 사람노릇하는 것으로 생각해서 그렇게 한 것일 뿐입니다. 그러다보니 시몬의 예수님 초대는 진정한 존경과 사랑이 없는 그저 격식만 약간 갖춘 초대가 되고 말았습니다. 아니 사실은 가장 기본적인 예의조차도 빠뜨린 것들이 많았습니다.

 

  7:44~46절을 보면 " 그 여자를 돌아보시며 시몬에게 이르시되 이 여자를 보느냐 내가 네 집에 들어올 때 너는 내게 발 씻을 물도 주지 아니하였으되 이 여자는 눈물로 내 발을 적시고 그 머리털로 닦았으며 너는 내게 입맞추지 아니하였으되 그는 내가 들어올 때로부터 내 발에 입맞추기를 그치지 아니하였으며 너는 내 머리에 감람유도 붓지 아니하였으되 그는 향유를 내 발에 부었느니라 "


  그 당시 사회에서는 이것은 웬만한 손님에게는 기본적인 대우에 불과한 것이었지만 시몬은 예수님을 손님으로 초대했놓고도 이런 것조차도 제대로 해드리지 않았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바리새인인 시몬이 이렇게 한 것은 자신이 "사함을 받은 일이 적은 자라 여기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적게 사랑할 수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교훈은 죄 많은 곳에 은혜도 많다는 영적인 역설을 담고 있습니다. 그 만큼 용서받은 감격이 더 하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나 은혜를 더하기 위하여 죄를 지을 수능 없습니다.

 

  오늘을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 중에도 예수님을 초청하고 예수님을 모시고 잔치를 벌리고 예수님을 만나고 살면서도 시몬처럼 예수님을 대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뜨거운 눈물 대신에 겉으로 싹싹한 매너만 남아 있고 감격스러운 기쁨과 감사는 전혀 없고 오직 세련된 예절만 가지고 예수님을 섬긴다고 섬깁니다. 이렇게 예수님을 만나는 것은 형식적인 만남이요 외식적인 만남일뿐입니다. 이런 만남은 제밥 잘 갖춘 것 같아도 아주 기본적인 것조차 빠뜨려 먹은  것입니다. "발씻을 물도 주지 아니하였으되"하셨습니다.

 

  우리 믿는 사람들에게 가장 위험한 것은 시몬처럼 나는 이만하면 괞찮다는 생각입니다. 나의 믿음이, 나의 봉사가, 헌신이, 충성이, 섬김이, 사랑이, 겸손이 이만하면 괜찮다고 생각하고 간절히 사모하고 목마름이 없다는 것입니다. 시 107:9절에는 "저가 사모하는 영혼을 만족케 하시며 주린 영혼에게 좋은 것으로 채워주심이로다"라고 했습니다.

 

  바리새인 시몬에 비하여  죄인이라는 딱지가 덕지 덕지 붙은 이 여인은 형식대신에 감격을 예의보다는 진실을 발휘했습니다. 자신은 여전히 부족하고 죄인이라는 사실을 인정합니다. 그래서 항상 열정이 사그라들지 않습니다. 간절함과 사모함이 넘칩니다.

많이 용서 받은 사람으로 자신을 자리매김할 때, 많이 빚을 탕감받은 빚진자로 자신을 이해할 때, 우리는 주님을 더욱 많이 사랑할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500데라인의 빚을 탕감받은 사람처럼 주님을 사랑하십니까? 아니면 50 데나리온 탕감받은 사람처럼 주님을 사랑하십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