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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매맺지 못하는 무화과나무의 비유(누가복음 13:1~9) 본문

비유의 복음

열매맺지 못하는 무화과나무의 비유(누가복음 13:1~9)

유앙겔리온 2011. 3. 26. 16:11

  열매맺지 못하는 무화과 나무의 비유는 구약성경에 많이 나오는 비유입니다. 구약성경에서 무화과 나무는 하나님의 백성에 대한 하나님의 축복과 특별한 사랑을 표상하는 상징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도 무화과 나무의 비유를 여러번 말씀하셨습니다. 무화과 나무의 열매는 성경에 60번이상이 언급되어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무화과나무는 산에서 저절로 나는 무화과 나무가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길가에 그냥 심어진 그런 똘무화과 나무도 아니었습니다. 산에 있는 무화과 나무는 열매가 없어도 땔깜으로 쓰면되고 길가에 있는 무화과 나무는 열매가 없어도 시원한 그늘만 제공을 해주어도 그 아래서 잠시 쉬어가고 그 그늘에서 성경을 공부하거나 기도를 하는 장소로 또는 사람들이 만나는 장소로 사용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 나오는 말씀은 야생 무화과나무가 아닌 포도원에 심겨진 무화과 나무였다는 사실입니다. 6절을 보세요. "....한 사람이 포도원에 무화과나무를 심은 것이 있더니..."했습니다. 포도원에는 포도나무를 심는 것이 옳습니다. 그러나 이 포두원주인은 포도원에 포도나무를 심는 대신에 특별히 자리를 마련하여 무화과 나무를 심은 것입니다. 이렇게 한 것은 땔깜으로 쓰려는 것이 아니며 그늘을 위해서도 아니었을 것이 분명합니다. 오직 한가지 이유 그것은 열매를 얻기 위함인 것입니다. 자격이 없지만 특별하게 여겨서 포도원에다가 무화과를 심고 가꾼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무화과나무는 가장 좋은 환경 속에서도 열매를 맺지 못하고 있습니다.

  포도원은 경작를 위하여 준비된 땅입니다.
  포도원은 수확을 목표로 한 과수원이므로 농토도 좋고 과원지가 있어 때를 따라 거름을 주거나 가꾸기에 힘을 기울인 곳입니다. 길 가,  울 안,  정원이나, 밭에 심겨진 무화과나무보다 더 좋은 땅, 다 좋은 환경, 더 좋은 기회를 가졌으면서도 그 목적인 무화과 열매를 맺지 못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나무는 쓸모없는 것입니다.
  모든 것은 존재하는 목적을 가지게 마련이고 그 목적을 향하여 가게 되는 것입니다. 존재하는 목적이 없는 것은 절대로 귀한 것이 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태초에 천지를 창조하시고 모든 존재하는 것을 보시고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내신 모든 창조된 것들은 목적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다 귀하고 보기에 좋은 것입니다. 이 보기에 좋은 것을 인간이 너무 자기 주관대로 생각해서 불필요하다느니 있어서는 않될 것이라느니해서 없애기도 하며 귀하게 여기지 않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것 때문에 닥아올 인류의 재앙을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인생을 살면서 작은 목적이라도 정하고 살아야 합니다. 그래야 수고할 명분도 생기는 것이고 고생하는 보람도 생기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을 이 시대에, 그것도 이 땅에 살아야 할 이유가 있기 때문에 어려분들을 이곳과 이시대라는 시공간을 주신 것입니다. 있으나마나한 존재가 아니라 꼭 필요해서 주신 인생이라고 생각하면 얼마나 멋진 인생이 펼쳐지겠습니까?
  목적에 충실한 그리스도인 되어야 합니다. 목적에서 멀어져갈 때 그 그리스도인은 실패한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입니다. 열매는 목적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나오는 이 무화과 나무는 본래의 목적인 열매를 맺는데 실패한 것입니다. 그래서 주인은 실망을 이만저만하게 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주인은 자신을 실망시킨 열매맺지 못하는 무화과 나무를 찍어버리기로 작정을 하게 된 것입니다. 본문은 3년을 기다리며 과수원을 찾았으나 그 때마다 실망만 안고 돌아갔습니다. 참아줄 만큼 참아주었고 기다려 줄만큼 기다려 주었습니다. 이제 한계상황이 왔습니다. 더 이상 기다리고 참을 수가 없는 상태에 이른 것입니다.

  무화과나무는 포도나무보다 5-6배 정도 더 많은 자리를 차지합니다. 그리고 양분도 더 많이 흡수합니다. 7절에 주인이 “어찌 땅만 버리느냐”고 한탄하는데 사실 무화과나무는 다른 어떤 나무보다 많은 양분을 빨아들인다고 합니다. 다른 나무들이 먹을 양식을 더 먹고 자랍니다.

  그런데 과원지기가 등장을 합니다. 과원지기는 무화과나무를 길렀던 사람입니다. 그는 포도원 주인인에게 "주인이시여 금년에도 그대로 두소서"하며 간절한 만류의 부탁을 합니다. 그래서 그 간절한 간청이 받아들여져 한 해 더 생명을 연장 받게 된 것입니다. 주인은 과원지를 나무라지 않았습니다. 무화과가 열매를 맺지 못한 것에는 사실 과원지기에게도 그만한 책임이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므로 그 책임을 물을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주인은 과원지기를 나무라지도 않았을 뿐 아니라 그의 간청을 아무런 문제없이 받아주고 있음을 주시하시기를 바랍니다.
 
  왜 그랬겠습니까? 그것은 과원지기가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음을 주인이 알아준 것입니다. 거름을 주고 물을 주고 나무가 잘 자라서 열매를 맺는데 최선의 환경을 제공해주었음을 알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무가 소망이 없으니 "나무만 찍어버리라"고 하신 것입니다.
  만약의 경우 과원지기가 게으르고 기술이 부족해서 무화과가 열매를 맺지 못했다고 한다면 그 주인은 오히려 과원지기를 조처했을 것입니다.
과원지기는 누구라도 알아줄만큼 최선을 다했습니다. 문제는 무화과 나무 자체에게 있었습니다.

 

  그러나 과원지기는 나무를 탓하지 않습니다. 밭을 탓하지도 않았습니다. 자신이 한번 더 수고를 해보겠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과원지기에게서 예수 그리스도를 보게 되는 것입니다. 주님은 자신을 믿어주지 않고 끝내는 십자가에 못을 박아 죽이는 자들에게까지 "저들이 하는 일들을 저들이 알지 못해서 한 일이오니 저들을 용서하여 주시기를 바랍니다" 하신 주님이셨습니다.
  여기에 복음이 있습니다. 복음은 다른 사람을 바꾸려고 하지 않습니다. 복음은 자신이 바꾸어지는 것입니다. 복음은 십자가를 다른 사람들에게 지우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를 자신이 지는 것입니다.

 

  여기에 포도원 주인으로 비유되는 하나님의 인내와 기다림과 또다시 참아주시는 사랑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는 오늘 본문 말씀에 나오는 과원지기에게서 그리스도 예수를 보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중보자, 우리의 대변자, 우리의 변론자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는 마지막 한계 상황속에서도 우리를 위해서 중보하시며 대변하시며 변론하시는 분이라는 사실입니다. 이것이 복음인 것입니다.

 

  우리의 모습도 마찬가지입니다. 열매맺지 못하는 생활은 주인의 마음을 안타깝게 하고 실망시킵니다. 우리는 그래도 한 번 더 기회를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하고 열매를 맺는 목적에 충실한 그리스도인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역할이 과원지기와 같다면 밭 핑계되지 말고 나무 핑계되지 말고 두루파고 거름을 주고 노력하여 열매를 맺게 해야 할 것입니다.

 

  특별히 유대백성들은 하나님께서 친히 조성하신 포도원에 심겨진 무화과 나무와 같은 존재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먼저 택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하나님과의 교제와 친교속에서 열매를 맺어 장차 온 세계를 구원하시고자 하는 도구로 사용하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열매맺지 못한 무화과 나무처럼 하나님의 뜻을 외면했습니다. 선지자들을 죽이고 마지막에는 예수 그리스도마져도 십자가에 못을 박아버린 민족이었습니다.

  이 유대인들은 바로 오늘 복음적인 우리 그리스도인들을 상징하고 의미하는 것입니다.
우리도 유대인들처럼 없매없는 무화과 나무가 되지 않아야 할 것입니다. 풍성한 열매를 맺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