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기현의 살림운동
무화과나무의 비유(마 24:32-36, 막13:28-32,눅21:29-33) 본문
예수님께서는 무화과무의 비유를 여러 종류로 하셨습니다. 오늘 본문에 기록된 무화과나무의 비유는 "시기와 때"를 비유하기 위해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눅가복음 13장에 기록된 열매맺지 않는 무화과 나무의 비유에서는 마지막 심판에 앞서 열매없는 무화과 나무를 잘라버리는 것을 참으신 것처럼 얼마간의 유예기간을 두시는 은혜로우신 하나님에 대해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마태복음 21장과 막 11장에 열매맺지 않는 무화과 나무에 대한 저주가 비유적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이것은 열매없는 하나님 백성들에 대한 아니 인생들에 대한 비유입니다.
많은 나무들은 새싹과 함께 연한가지가 나오고 계절에 따라서 그 색갈과 모양에 변화가 옵니다. 그리고 그 변화를 보고 우리 인간들은 시절과 때를 읽게 됩니다. 시계가 없고 달력이 없을 때는 이런 자연의 변화를 보고 시간을 읽고 때를 읽고 시절의 흐름을 읽었을 것입니다. 특히 예수님께서 무화과 나무에 대한 비유를 많이 하셨는데 그것은 예수님께서 사셨던 지방에 무화과 나무가 많았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을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청중들이 무화과 나무를 가까이에 두고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이 됩니다. 예수님께서 사물을 들어서 비유로 말씀하실 때는 대부분이 자기 자신과 청중들의 주변에 있었던 사물을 사용하셨음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가장 가까운 곳에서 그리고 친숙한 것으로부터 진리를 찾아내 전하셨습니다. 멀리 있는 이야기해보았자 잘 알아 먹지도 못하고 관심도 없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무화과는 실재적으로 팔레스틴의 길가에도 있고 울 안에도 있고 정원이나 밭에 심겨지기도 하고 무화과가 포도원에까지 심겨지기도 했습니다.
영적으로도 보아도 구약성경에 보면 무화과는 포도나무와 함께 이스라엘 민족이나 그 조상을 말하였습니다. 호세아 9장 10절이나 예레미아 8장 13절에는 포도나무와 나란히 씌어져 있습니다.
"무화과나무가 가지가 연하여지고 잎사귀를 내면 여름이 가까운 줄 안다" 이것은 속담과도 같은 것입니다. 속담은 보편적이고 상식적인 지혜를 사람들에게 전달합니다.
무화과 나무 가지를 보면서 이스라엘 사람들은 계절을 준비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천기의 징조를 통해서 지혜를 얻듯이 무화과 나무의 변화를 보면서 그 변화가 주는 의미를 배우라는 말입니다.
무화과 나무 가지가 연하여지고 잎사귀를 내면 여름이 가까운데 여기서 여름이 가깝다는 말은 추수 때가 가깝다는 뜻입니다. 무화과 나무 비유 중에서 특히 여름이 가까워지는 이야기를 하신 것은 팔레스틴에서는 여름에 추수를 하기 때문인듯합니다.
그러니까 이 무화과 나무의 비유는 추수 때를 예비하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이 추수 때는 실재적으로 이스라엘의 곡식을 추수하는 때를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영적인 추수 때를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비유의 의미는 아무런 준비없이 돌발적으로 임하시는 주의 임재를 맞이하는 어리석음에서 탈피해야함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무화과 나무를 보면서 유대인들이 추수 때를 준비한 것처럼 우리는 시대의 징조를 통하여 임박해오는 종말과 인자의 날을 예비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 비유를 통하여 주님은 하나님의 자녀들과 그의 교회를 깨어 있게 하려는 의도에서 이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오늘 주시는 이 본문 말씀은 우리에게 깨어 있을 것을 요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날과 그 시는 아무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천사들도 모르고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까지도 모른다고 했습니다. 오직 아버지만 아신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막상 그 날과 그 시가 오면 몰랐다고 핑계할 수 없도록 하나님은 믿는 자에게 그 징조만큼은 분명하고 확실하게 보여주시겠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정신차리고 깨어 있으면 결코 안심해도 될 만큼 그렇게 예비할 수 있도록 그 날과 그 시기가 임할 것임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노아가 방주를 예비하고 심판 때에 그 방주로 들어가 구원함을 받았던 것처럼 항상 주님 말씀에 따라서 살아가면 되는 것입니다.
성도는 말씀을 따라야만 주를 따르는 것이지, 자기 생각대로 말씀을 맞추려 한다면 이미 잘못된 신앙인입니다. 그러므로 자기 신앙에 빠져 나올 줄 모르는 미련한 신앙인이 되지는 말아야 합니다.
깨어 있다는 뜻은 주님이 가르쳐주신 말씀을 토대로 하고 그 위에 굳게 서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깨어 있지 못한 노아시대의 사람들은 노아가 방주를 짓는 일을 어리석게 생각했으며 비웃었습니다. 노아의 식구들이 방주에 들어갈 때도 그들은 깨닫지 못했습니다. 홍수가 나서 저희를 다 멸할 때까지 저희는 깨달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세상 일에만 취해 있으면 주님의 날이 코 앞에 임박해 오더라도 또 세상 끝날이 목전에 있어도 알 수 없게 됩니다.
이 비유는 작은 일에 불충하다가 영원한 상급에 참여치 못하는 어리석음을 탈피해야 한다는 뜻일 것입니다. 마지막 날에는 버려둠을 당하는 자와 데려감을 당하는 자들로 나뉘일 것을 분명하게 말씀했습니다.
종말이 가까울수록 불신풍조와 이기심이 더욱 만연해 갈 것인즉 이러한 세상을 보거든 성도들은 더더욱 살아계신 주님과의 깊은 만남을 통하여 충성되고 지혜로운 종으로 칭찬받는 축복된 삶을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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