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기현의 살림운동
탐욕적 구원관에서 벗어나라 본문
인간의 실존 상태는 기아와 질병과 각종의 사고와 재해 그리고 전쟁이라는 외적인 도전에 직면해 있으며, 내적으로는 욕망을 가지고 그 욕망을 성취해보지만 결국 권태로움에 빠지고 성취할 수 없는 경우에는 절망에 이르게 되는 유한한 존재이며 완전치 못한 존재가 인간인 것이다. 그런데 인류에게 던져진 이러한 모든 문제는 결국 인간의 욕구나 욕망의 무절제한 추구와 섭렵과 실현에 의해서 더욱 조장되고 확산되고 위기가 고조되고 있는 것이다.
불교에서는 이러한 인간 존재가 고통이며 비극인 것으로 보았고, 또한 실존주의에서는 인간을 불안과 절망을 통하여 나타나는 무에 둘러싸인 유한자인 것으로 보았던 것이다. 심리분석학자들은 인간을 자아의 근원으로부터 이탈(離脫)한 억압(抑壓)당한 자로 보았으며, 유대교에서는 인간 존재는 아담의 타락으로 야기된 원죄를 걸머진 “죄인”으로 보았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인간을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마 11:28)로 보셨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은 구원을 지향하는 존재인 것이다. 이러한 인간 상태에서 구원을 추구하는 많은 방법들이 제시되었다. 일예로 신비종교들은 감각(感覺)의 길을 제시했으며, 대부분의 종교들은 선행의 길을 제시하고 있다. 그런가하면 구원의 길이 지식이나 철학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이러한 구원의 길들이 전혀 인간에게 도움이 되지 못했다고는 할 수 없으나 완전한 길은 아니었으며 최선과 최상의 길은 아님을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통해서 발견하게 되고 깨닫게 되는 것이다.
우주적인 모든 존재가 구원받아야할 필요성을 가지고 있겠지만 자신의 비구원적인 실존적 상태를 인식하고 구원론적인 추구를 하는 것은 인간만이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나머지 모든 존재들은 결국 인간들에게 맡겨주신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인간의 존재 상태는 종말론적인 구원의 계시가 없이는 그 구원의 실체를 파악할 수도 없으며, 하나님의 성육신적인 복음의 역사가 없이는 구원의 길과 진리와 생명에 접근할 수도 없다는 한계점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산업사회와 함께 자유주의, 인본주의, 세속주의가 만연하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없이 인간의 구원을 찾아보겠다고 하는 욕구적인 구원에 빠져 허상을 좇아가는 이들이 시대정신을 풍미하여 왔다. 욕구적인 구원이란 것은 찰라적이며 개인적이며 탐욕적이며 이기적인 구원을 말하는 것이다. 이것은 진정한 의미에서 구원이 아닐 뿐 아니라 도리어 인류에게 재앙을 던져주는 것이며 자멸과 공멸에 있게 하는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는 기독교를 포함해서 기존 종교들의 구원 무능을 비판하고 반기를 들면서 새로운 구원을 구상하였던 포이에르바하(Feuerbach)와 마르크스(Marx), 하나님이란 관념까지를 포함해서 모든 가치들의 전도를 요구하고 나선 니체(Nietsche), 새로운 현실에 대한 교육을 제창하고 나선 프로이드(Freud) 같은 사람들은 인간 자신이 인간의 구원과 속량을 도맡아야 한다는 확신을 가지기도 했던 것이다.
그런가하면 신성과 신비적인 연합으로 구원이 오는 줄 알고 그런 것에 몰두를 하고 신출귀몰한 신비로운 것에 구원이 있는 것으로 생각하고 신비적 기술을 부리는 마술적 신비자들이나 사이비에 빠져들고 신비주의에 몰입을 하기도 한다. 이러한 허구적인 노력 속에서 어떤 이들은 거기에 들지 못함으로써 비관론에 빠지기도 하고 그런 것을 경험하는 몰아경 속에서 낙관론에 빠지기도 하지만 저마다 현실도피적이며 피안적인 허구적인 구원을 좇게 된 것이다.
그래서 얼마 전까지만 해도 세계는 종교의 미래에 대한 암울한 예견으로 가득했다. 이태리의 탁월한 사회학자 아쿠아비바(Sabino Acquaviva)는 「산업사회에서의 신성의 몰락」이라는 저서에서 “종교적 관점에서 볼 때, 인류는 세대가 거듭될수록 더욱 더 어두워 가는 길고 긴 밤 속에 잠겼고, 그 밤의 종말은 아직 보이지 않는다.”고 했던 것이다. 그러나 21세기를 전망하는 사회학자들은 세속화가 만연하고 종교가 몰락해 가는 대신 한편으로는 영적이며 종교적인 시대가 도래하고 있음을 말하고 있다. 그것은 인간의 한계상황을 깨달은 결과이며 또한 욕구적인 구원과 허구적인 구원론에 대한 반성에서 기인한 것이라고 볼 수 있겠다.
인간이 겪고 있는 모든 갈등과 모순으로부터 구원받고 탈출하는 길과 진리와 생명은 욕구적인 구원관으로나 허구적인 구원관으로는 불가능하며 오히려 욕구적이고 허구적인 구원관은 이러한 갈등과 모순을 더욱 증폭시켜놓은 결과를 가져왔던 것이다. 인간의 무한한 욕구와 욕망을 채우려는 곳에는 언제나 미움과 다툼과 대적과 대립과 피흘림과 전쟁과 죽음과 파멸이 있게 되는 것이다. 나무를 휘감고 있는 덩굴식물이나 나무껍질에 기생하는 잡초가 나무의 양분을 다 빨아먹어 결국은 나무의 성장을 헤치고 고사케 하는 것처럼 인간의 욕구적이고 허구적인 구원관은 우리의 신앙과 삶에 뿌리를 내리고 우리들의 복음적인 구원의 삶을 휘감거나 그 활력소를 빨아 먹어버려 결국은 참 구원을 현저히 위협하며 도리어 비구원적인 상황으로 빠뜨린다. 그러니 하나님 믿는 신앙이 하나님은 믿는 이를 위하여 늘 싸워주시고 이겨주시고 채워주시고 타인의 것이라도 빼앗아서 내 것이 되게 해주시며 자신이 만든 만고불변의 법칙이라고 믿는 이를 위해서는 깨뜨리시는 분으로 믿는 이런 욕구적인 구원관의 산물이라고 한다면 얼마나 위험한 것인가? 그런데 인간은 어떤 종교인이든지 대부분 이런 욕구적이고 허구적인 구원관에 사로잡혀 있지 아니한가? 그래서 새 파라다임의 구원의 복음을 탄식하며 기다리는 인류에 있게 된 것이다.
지금은 욕구적이며 허구적인 구원을 찾아나서도록 한 기독교와 교회가 신학적 반성을 해야 할 때이다. 이성과 과학을 악마적이라 하고, 인간 사회와 종교 영역을 분리하는 이원론적인 종교전통은 이제 더 이상 진리가 아니다. 이성을 잃어버린 신앙은 장님처럼 잘 속거나, 혹은 맹목적인 경신(輕信) 또는 미신(迷信)이 될 위험성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이성을 가지고 발견을 하고 발명을 하고 계시를 깨달아야 하는데 이성을 부인하고 죄악시하면 언제나 신앙은 주관적인 자기 주장만 있을 뿐이며 객관성을 잃게 된다. 이성과 신앙을 분리하고 정치 사회 경제와 종교가 더 이상 다른 영역으로 구획되는 일은 종식이 되어야 한다. 참된 이성과 참된 과학은 참된 신앙과 다르지 않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이런 구별이 없다.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에는 이런 경계가 없다. 그러나 과연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복음 없이 이성과 과학과 신앙이 참될 수가 있는 것인가? 그럴 수는 없는 것이다. 사실 지금까지 과학자와 이성적인 사람들은 과학의 발전과 그것을 응용함으로써 자동적으로 그리고 꾸준히 인류복지와 행복이 증진될 것으로 믿어왔다. 그리고 얼마 정도는 사실이다. 이 역사 속에서는 반짝이는 빛과 같은 정신적이고 이성적인 사람들이 있어 왔다. 그리고 무지한 세계를 밝혀주는 발견과 발명을 한 사람들도 있어왔다. 그들이 주는 빛의 영향은 지대한 것이다. 그것을 외면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그러나 작은 빛은 큰 빛, 궁극적인 빛 앞에서는 그 속으로(능력 안으로) 빨려들어 갈 수밖에 없다. 구원도 그렇다. 이 세상의 많은 종교와 이상들과 윤리들과 법들과 여타의 사회적 합의들은 구원의 여망을 주며 궁극적인 구원은 아닐지라도 구원의 빛을 던져 주고 있다. 이러한 구원의 여망들이나 구원역사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복음이 없이는 욕구적인 구원이나 허구적인 구원으로 전락하게 될 뿐이다. 궁극적인 참된 구원은 구세주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서로 사랑”의 구원의 복음으로부터 오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복음으로 원상회복을 해야 하며 돌아가야 하며 이것을 붙잡아야 하는 것이다.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과 원수 사랑은 각각이 아니며 “사랑의 3위 1체”인 것이다. 하나님으로부터의 소외, 동료인간들로부터의 소외, 자연으로부터의 소외, 자기 스스로부터의 소외의 탈출과 해방은 이 사랑의 삼위1체를 통하여서 온다. 죄란 결코 사랑 받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지 않는데 있다. 이것은 결코 속죄적인 맨탈리티로 해결할 문제가 아니라 사랑과 용서, 섬김과 봉사로 이루어야 하는 실천적인 과제인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과 인류와 이 세계의 구원은 여기에 있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복음은 이것을 분명하고 확실하게 보여주고 있다.
'살림운동'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인간의 비인간화 (0) | 2003.04.16 |
---|---|
영적 바이러스 (0) | 2003.04.09 |
인간의 내적 자아와의 모순과 갈등 (0) | 2003.03.19 |
반전과 반핵의 정신운동 (0) | 2003.03.12 |
이제는 안전제일주의로 (0) | 2003.02.2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