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기현의 살림운동

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막 8:14~21) 본문

예수님의 질문

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막 8:14~21)

유앙겔리온 2018. 1. 10. 07:22

8:14 제자들이 떡 가져오기를 잊었으매 배에 떡 한 개밖에 그들에게 없더라
8:15 예수께서 경고하여 이르시되 삼가 바리새인들의 누룩과 헤롯의 누룩을 주의하라 하시니
8:16 제자들이 서로 수군거리기를 이는 우리에게 떡이 없음이로다 하거늘
8:17 예수께서 아시고 이르시되 너희가 어찌 떡이 없음으로 수군거리느냐 아직도 알지 못하며 깨닫지 못하느냐 너희 마음이 둔하냐
8:18 너희가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며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느냐 또 기억하지 못하느냐
8:19 내가 떡 다섯 개를 오천 명에게 떼어 줄 때에 조각 몇 바구니를 거두었더냐 이르되 열둘이니이다
8:20 또 일곱 개를 사천 명에게 떼어 줄 때에 조각 몇 광주리를 거두었더냐 이르되 일곱이니이다
8:21 이르시되 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 하시니라

 

  부활절 이후로 계속해서 부활하신 주님께서 오늘 우리에게 찾아오셔서 무슨 질문을 던지시는가?하는 "예수님의 질문"을 함께 나누고 있습니다. '어느 것이 쉽겠느냐?' '어떻게 읽느냐?'에 이어서 오늘은 '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하는 예수님의 질문을 가지고 함께 생각해보도록 하겠습니다.   

 

  고사성어에 동상이몽(同床異夢)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같은 잠자리에서 잠을 자는데도 서로 다른 꿈을 꾼다는 뜻입니다. 같은 자리에 있으면서도 서로 생각이 다르다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우리는 같은 마음일 것이라고 생각하하고 믿지만, 사실 서로 다른 생각, 서로 다른 마음을 갖고 살아가는 삶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지금 한 배를 타고가고 있는 예수님과 제자들의 경우가 그렇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 가운데서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왜 "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라고 말씀도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배를 타고 건너편으로 가시면서 제자들에게 "바리새인들과 헤롯으 누룩을 주의하라"고 교훈을 주셨습니다. 그러자 제자들은 자신들이 떡을 준비하지 못한 때문에 예수님께서 그러시나보다하고 넘겨집어 걱정하게 된 것입니다. 제자들이 가지고 있는 떡이라곤 한 개 밖에 없었던 것이지요. 그러자 예수께서 제자들의 그런 걱정거리를 아시고 8:17~20 "너희가 어찌 떡이 없음으로 수군거리느냐 아직도 알지 못하며 깨닫지 못하느냐 너희 마음이 둔하냐 너희가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며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느냐 또 기억하지 못하느냐 내가 떡 다섯 개를 오천 명에게 떼어 줄 때에 조각 몇 바구니를 거두었더냐 또 일곱 개를 사천 명에게 떼어 줄 때에 조각 몇 광주리를 거두었더냐?하고 물으셨던 것입니다.

 

  이 무슨 말씀입니까? 오늘 이 말씀이 있기 전에 불과 며칠 전에 예수님께서 오병이어를 가지고 오천명을 먹이시고, 칠병이어를 가지고 사천명을 먹이셨던 것입니다. 이 두 사건이 몇 년 전의 사건이 아니라 불과 하루 이틀 전의 사건이며, 오래돼 봐야 열흘도 지나지 않은 시간에 일어났던 일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미련한 제자들이 그런 능력의 예수님을 따라가면서 먹을 것을 걱정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니 세상에 이렇게 미련한 사람들이 어디 있습니까? 금방 예수님이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떡 다섯 개로 오천명을 먹이시고 부서리기를 12광주리나 거두었으며, 또 떡 일곱 개로 사천명을 먹이시고 일곱광주리를 거두었던 것을 경험하지 않았습니까? 자신들이 그 현장에 있었지 않았습니까? 아니 그냥 현장에 있었던 것만이 아니라 그들이 직접 나누어 주지 않았습니까? 그게 일년 전도 아니고 몇 달전도 아니고 바로 며칠전 전의 일이 아닙니까? 그런데 먹을 것을 가지고 걱정을 하다니 이 얼마나 답답하고 안타까운 노릇입니까? 그야말로 듣기는 들어도 듣지 못하고, 보기는 보아도 보지 못하는 우매한 모습이 아닙니까?

 

  그래서 예수님은 그런 제자들을 향하여 "아직도 꺠닫지 못하느냐?며 안타까운 마음으로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누구십니까? 예수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 생명의 주관자이십니다. 우리의 모든 것을 공급해 주시는 분이십니다. 죽은 자를 살리시고, 오병이어의 기적으로 오천명을 먹이시고, 병든 자를 고쳐 주시고, 십자가의 죽음으로 우리의 죄악을 사해주시고, 사망권세를 깨트리시고 부활하신 분이십니다. 이런 사실을 예수님께서 귀가 따갑도록 누누이 말씀하셨고, 수없이 보여 주셨던 것입니다. 그런데도 안타깝게도 한배타고 가는 제자들조차도 여전히 깨닫지 못하고 있었고, 오늘도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 중에서도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깨닫지 못하고 예수님을 따를 때 세상에 속한 것들, 엉뚱한 것을 생각하며 따르며, 그래서 세상의 것들 때문에 걱정하고 염려하며 자기 방식대로 살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 예수님은 그걸 지적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우리가 진실로 우리의 생명이시며 진리이시며 구원이신 예수님을 믿는다면 그 예수님을 온전히 믿고 신뢰해야 합니다. 그 말씀을 바르게 깨닫고 그 말씀대로 살아가야 합니다. 자신의 생각, 경험, 논리의 집착을 버리고 주님과 동행해야 합니다. 그래야 주님 안에 있는 그 생명, 평안, 기쁨, 안식, 소망을 충만하게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삼가 바리새인들의 누룩과 헤롯의 누룩을 주의하라(15절)"고 당부하신 진짜 뜻은 무엇입니까?
  우리가 누룩비유를 통해서 이미 살펴보았지만 누룩은 빵을 만들 때 반죽을 부풀리는 역할을 하는데, 여기서 '누룩'은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악'을 상징합니다. 적은 양의 누룩이 전체를 부풀게 하듯, 바리새인들이 지닌 악과 헤롯이 지닌 악은 영혼을 파멸시키고, 세상을 파멸시킬 수 있음을 분명히 알아 가벼이 여기지 말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럼에도 제자들은 바리새인들과 헤롯의 누룩을 주의하라는 말씀에 육의 양식을 떠올리며 걱정 근심을 하는 어리석음을 나타내게 되었던 것입니다.

 

  제자들이 주의 해야 하고 또한 오늘 우리가 주의 해야할 바리새인들의 누룩이 과연 무엇입니까?
원래 바리새인들은 로마의 지배 하에서 목숨걸고 저항하며 신앙의 정절과 유대민족의 정체성을 지킨 사람들입니다. 그랬던 이들이 점차 변질되기 시작했습니다. 스스로 정결하고자 했던 열정은 사라지고, 자기들은 지키지도 못하는 규범과 관습을 다른 사람에게 지키도록 강요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바리새인들을 향해서 외식하는 자라고 책망을 하셨습니다. 회칠한 무덤같다고도 하셨습니다. 바리새인들의 신앙의 특징은 바로 외식입니다.

  보여주기 위한 신앙, 그래서 바리새인들은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시장 바닥에 가서 손을 높이 들고 큰 소리로 기도를 합니다. 바리새인의 신앙은 형식주의입니다.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는 자"(딤후 3:5)입니다. 겉으로는 그럴 듯한 데 속은 텅빈 것, 아니 텅빈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온갖 더러운 것으로 가득찬 것, 종교적 행위는 잘하는 것처럼 보이는데 실생활에서는 사랑과 의와 선을 실천하지 않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앞부분을 보면 바리새인들이 예수님께 와서 표적을 구합니다. 믿기 위해 표적을 구한 것이 아니라 힐난하며 예수님을 시험하기 위한 목적으로 표적을 구합니다. 참 신앙은 표적을 보고 믿는 것이 아닙니다. '이 눈에 아무 증거 아니뵈어도 … 이 귀에 아무 소리 아니 들려도'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나아가는 것이 참 믿음입니다.

 

  그리고 헤롯의 누룩은 무엇입니까?
  헤롯의 누룩은 물질 중심적이며 세속적인 신앙을 의미합니다.
헤롯은 하나님이 아닌 자신을 섬긴 사람입니다. 권력과 부와 명성을 섬긴 사람입니다.
  헤롯은 탄생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죽이려고 베들레헴의 2세 이하의 아이들을 몰살한(마2:13-16) 인물입니다. 대규모 건축사업과 더불어 예루살렘 성전재건 사업에 착수하여 헤롯성전을 지은 사람이기도 합니다. 말년에는 끊임없는 내분과 질병으로 비참한 생활을 하다가 죽은 사람입니다.
 
  주간지 시사저널은 1134호(2011년 07월 08일)에서 "빚내서 몸 키우는 한국 대형 교회들"을 커버스토리로 실었습니다. 대형교회들이 수백억에서 천억에 이르는 빚을 내서 새로운 교회를 건축하고 있다는 내용입니다. 교회를 크게 짓는 것이 무조건 나쁠 것은 없습니다. 교인 수가 늘어나 기존 건물로는 충분치 않기 때문에 불가피하게 건물을 새로 지을 수밖에 없는 경우나 건물이 너무 낡아서 더 이상 사용할 수 없는 경우는 결코 부정적으로 볼 수 없습니다. 그런데 그 기사 가운데 교회들이 빚을 내서 큰 교회건물을 짓는 이유에 대해 우려할 만한 대목이 나오는데 "교회 건물을 근사하게 지어놓으면 교인이 늘어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위험을 무릅쓰고 빚을 내가면서도 큰 교회를 건축하려고 한다는 것입니다.(김상구 종교권력감시시민연대 사무처장 인터뷰) 참 신앙을 위협하는 큰 적 중에 하나는 바로 헤롯의 누룩 즉 물질중심적이며 세속적인 신앙입니다. 물질중심적이며 세속적인 신앙은 이 세상에서 어떤 수단을 쓰든지 부자만 되면 된다는 신앙입니다. 부자가 되기 위해서는 하나님도 이용하고, 예수님도 이용합니다. 이것을 경계하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리새인과 헤롯의 악행들이 누룩처럼 빠르게 퍼져서 제자들에게 영향을 미치고 있음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바리새인의 누룩과 헤롯의 누룩을 경계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하는 것을 염려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혹시라도 믿지 아니하는 악한 마음을 품어서 살아계신 하나님에게서 떨어지지나 않을까를 염려하고, 또 죄의 유혹을 받아 마음이 강퍅하게 되어 바로와 같이 멸망당하지 않을까를 염려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오늘날도 헤롯의 누룩과 바리새인의 누룩은 세상을 압도하고 있습니다. 교회들조차도 헤롯의 누룩에서 자유롭지 못합니다. 많은 교회가 가난한 삶을 외면하고 규모와 권력과 부 그리고 명성과 칭송을 더 바랍니다.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정직하지 않아,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위선자가 되어 살아갑니다. 그러나 인간이 자기자신을 이기적으로 섬긴 결과는 언제나 참혹합니다. 같은 실수를 반복하며 배우지 못할 때, 예수님이 묻습니다."아직도 알지 못하며 깨닫지 못하느냐(17절)."

 

  예수님은 제자들을 향해 오늘 우리들을 향해 "'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 '그래도 아직 모르겠느냐'라고 바로 알아야 할 것을 촉구하시고 있습니다.
  이는 '인간적인 사고로 현실적으로 사느라 하나님이 보여주시는 뜻을 깨닫지 못하고 살아서는 안 된다!'는 경고였습니다.
예수님은 바른 믿음과 진실한 삶을 교훈하시는데, 제자들을 빵을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내 시선이 내 손에 있는 떡에 고정되어 있는 한, 문제는 해결되지 않습니다. 떡이 아니라 주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주님이 내 옆에 계시는데 무슨 걱정인가. 주님에게 드리지 못하고 내가 움켜쥐고 있는 것이 문제일 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