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기현의 살림운동
어느 것이 쉽겠느냐?(마 9:1-8) 본문
9:1 예수께서 배에 오르사 건너가 본 동네에 이르시니
9:2 침상에 누운 중풍병자를 사람들이 데리고 오거늘 예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이르시되 작은 자야 안심하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9:3 어떤 서기관들이 속으로 이르되 이 사람이 신성을 모독하도다
9:4 예수께서 그 생각을 아시고 이르시되 너희가 어찌하여 마음에 악한 생각을 하느냐
9:5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과 일어나 걸어가라 하는 말 중에 어느 것이 쉽겠느냐
9:6 그러나 인자가 세상에서 죄를 사하는 권능이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하노라 하시고 중풍병자에게 말씀하시되 일어나 네 침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 하시니
9:7 그가 일어나 집으로 돌아가거늘
9:8 무리가 보고 두려워하며 이런 권능을 사람에게 주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니라
현대인들은 보다 쉽고 보다 편리한 것을 쫒아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하는 것이 가장 지혜롭고 잘 사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그런 길이 결코 그리스도이들이 가야 할 길이 아닌 것을 말씀하여주시고 계신다는 사실입니다. 쉽고 편한 길을 버리고 굳이 쉽지 않는 길을 가려고 하셨고 이렇게 가는 것이 생명의 길이요 번영의 길임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오늘 주신 본문 말씀은 우리가 잘 아는 중풍병자를 고쳐주시는 예수님의 이적 사건입니다. 한 중풍병자가 있었는데 네 친구들이 그를 예수님 앞으로 데리고 왔으나 문 앞에라도 용신할 수 없음으로 인해서 중풍병자를 지붕으로 메고가 지붕을 뚫고 예수님 앞으로 달아내려서 고쳐주시기를 원했을 때 예수님께서는 그 네 친구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를 고쳐주셨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하여 예수님께 중풍병자를 고쳐주신 이적보다도 그 말씀에 주목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중퐁병자를 고쳐주시면서 먼저 '네 병이 나았으니 일어나 걸어가라 하지 아니하시고'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는 말씀을 먼저 하셨습니다. 이 말씀의 차이를 분명하게 이해해야 합니다.
중풍 병자가 네 친구들에 의해서 예수님 앞으로 오게 된 것은 중풍병을 고치고자 함이었습니다. 그러나 중풍 병을 고침받기 위해서 예수님께 나아갔지만은 예수님이 원하시는 것은 단순히 그의 육신의 병인 중풍 병을 고쳐주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그 영혼을 고쳐주시는 것이 목적이었습니다. 그래서 주님이 그 사람에게 네 육신의 병 낫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먼저 네 영혼이 구원받는 것. 네 영혼의 병이 낫기를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 땅에서도 모든 불행을 가져오게 할 뿐 아니라 영원한 지옥에 가서 영원한 고통을 받아야 될 그 죄의 문제, 죄를 먼저 사하는 것이 최우선이셨던 것입니다.
문제는 그 현장에 예수님이 어떻게 하는가 보자 하고 허물을 찾고 있던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의 그들이 악한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을 아셨습니다. 3절을 보세요. "어떤 서기관들이 속으로 예수님을 향하여 이 사람이 신성을 모독하도다"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이런 악한 생각을 간파하시고 그들에게 질문 하셨던 말씀이 있었습니다.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하는 말과 일어나 걸어가라 하는 말이 어느 것이 쉽겠느냐?"하신 질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중풍병을 치료하는 것과 사람의 죄를 용서해주는 것 중에서 어느 것이 더 쉽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에게는 병을 치료하는 것이나 죄를 용서하는 것이나 모두 다 쉬운 일은 결코 아닐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이 질문 속에는 '죄를 용서하는 것'보다 '일어나 걸어가라'는 말이 훨씬 쉽다는 뜻이 들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 자리에서 바로 그것을 보여주셨습니다.
6절하-7절,"중풍병자에게 말씀하시되 일어나 네 침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 하시니 그가 일어나 집으로 돌아가거늘"했습니다.
예수님에게는 이런 것이 아주 쉬운 일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 중풍병자에게 '일어나 네 침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고 하셨을 때 그는 벌떡 일어나 자리를 들고 걸어갔습니다. 내내 침상에 누워있던 환자가 그 침상을 들고 걸어간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그가 그 병에서 진정으로 놓여났고 그 병을 이겼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이 쉬운 것을 놓아두고 분쟁이 일어날 수도 있고 문제를 일으킬 수도 있는 "죄 사람을 받았느니라"하신 것입니다.
이렇게 말씀하신 것은 6절에,"인자가 세상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하노라"하셨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을 혼동하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단순히 예수 믿으면 병이 낫고, 복 받고, 모든 것이 잘된다더라는 생각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자신이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을 분명히 하기를 원하셨습니다. 지금까지 많은 병자들을 치료하신 것은 그들이 너무나도 무지하기 때문에 알아듣기 쉽게 시청각 교재를 사용하신 것이지 그것이 본질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은 죄를 치료하기 위해서입니다. 죄에 매여 있는 사람을 치료해서 새로운 삶을 살도록 하는 것이 목적이라는 뜻입니다.
오늘도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예수 믿는 목적을 혼동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왜 예수 믿는데 내 병은 낫지 않느냐고 불평을 합니다. 예수님께는 그 병을 고치는 것은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물론 우리들에게는 그것이 큰 문제이지만 예수님에게는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에게 어려운 것은 우리가 과거의 죄를 떨쳐버리고 매 순간 매순간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해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을 살게 하는 것입니다. 건강한 것 보다 더 중요한 것이 병중에서 하나님께 영광돌리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무엇이 어렵다고 생각합니까?
우리 삶에 부팆쳐오는 많은 문제들을 우리는 어려운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정작 영혼의 문제 죄의 문제 믿음의 문제는 쉽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서홀리 하는 경향성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것들보다 더 어려운 문제는 우리가 쉽게 생각하는 죄의 문제이며 연혼의 문제이며 믿음의 문제인 것입니다.
쉬운 것을 구하려고 오셨습니까?
오늘날 교회가 쉬운 것을 줄 수 있다고 광고하고 편리함을 선전하며 교인들을 모으려고 하고 또 그런 것에 혹하여 모여들었다면 그것은 교회답지 못한 것입니다. 차라리 쉽고 편리함은 쇼핑센터나 대업기업이 운영하고 있는 복지센터에 가면 얼마나 쉽고 편리하겠습니까?
교회가 쉬운 것과 편리함을 구하는 곳으로 전락하면 안됩니다.
무덤을 이야기하고 죽은 사람을 이야기하는 것은 참 쉬운 일입니다. 그런데 기독교는 어려운 부활을 이야기합니다. 인간이 생각할 때 불가능한 것이라고 여기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왜 쉬운 것을 말하지 않고 어려운 것을 말하는 것입니까? 이것이 사실이고 진실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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