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기현의 살림운동
피리를 불어도 춤추지 않는 아이들의 비유(마 11:15-17, 눅 7:31-32) 본문
사람은 시대를 읽는 눈을 가져야 합니다.
그래야 그 시대를 지헤롭게 살 수 있습니다.
시대를 읽을 줄 아는 사람들은 절대로 실패하지 않습니다. 시대를 읽지 못하고 아직도 옛것을 붙잡고 있는 사람들은 결국 실패자가 될 수 밖에 없습니다.
마이크로 소프트사를 창설해서 세계에서 1등갑부가 된 빌게이츠는 "대학 4년을 졸업하는 것조차도 시대적으로 뒤진다고 생각을 하고 그 당시에 대학을 중퇴하고서 컴퓨터 프로그램개발을 해서 세계에서 1등 재벌이 되었습니다. 그가 대학을 졸업하기 위해서 창업을 몇년 미루웠다면 사실 다른 사람이 프로그램을 계발했을 것이고 그 부는 다른 사람에게 돌아가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렇다고 누구나 대학 중퇴하고 회사창업한다고 다 성공하는 것은 아닙니다.
분명한 것은 빌게이츠는 그 당시 시대를 보는 눈을 가졌다는 것입니다.
모든 분야가 컴퓨터에 의해서 움직일 수 밖에 없는 시대가 도래했다는 것을 그는 보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공부를 더 해서 졸업장을 얻는 것보다도 시대를 놓치지 않는 쪽을 선택한 것입니다.
이런 눈을 가졌기에 대학을 중퇴한다면 반대할 이유가 없습니다.
예수님께는 누구보다도 시대를 분별하는 정확한 눈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그의 말씀을 듣는 자들이 놀랄 때가 많았습니다.
오늘 본문말씀도 시대와 연관된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시의 시대를 다음과 같이 평하셨습니다. "아이들이 장터에 앉아 제 동무들을 불러 가로되 우리가 너희를 향하여 피리를 불어도 너희가 춤추지 않고 우리가 애곡하여도 너희가 가슴을 치지 아니하였다 함과 같도다"
이 비유는 어쩌면 예수님의 유머스러운 모습을 볼수 있는 몇 안되는 본문 가운데 하나일 것입니다.
장터에서 피리를 불어도 춤추지 않고 애곡을 하여도 가슴을 치지 아니하는 세대가 바로 예수님 시대의 모습이었다는 것입니다.
피리를 분다는 것은 잔치를 의미합니다. 잔치가 열리면 피리소리에 맞추어 누구든지 춤을 추며 기뻐해야 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피리를 불어도 춤을 추지 않습니다.
애곡한다는 말은 초상집의 상황을 말합니다. 슬퍼해야 하는 상황입니다. 그러나 슬퍼하지 않습니다.
동의하고 동조하고 동역하는 미덕이 있어야 하는데 그런 미덕이 전혀 없는 시대가 바로 예수님의 시대였다는 것입니다.
마음이 통하지 않는 단절의 시대, 완악한 시대, 회개하지 않는 시대가 바로 예수님 시대의 모습이었습니다. 그러나 어디 예수님 시대만 그렇겠습니까?
현재 우리가 살아가는 현대사회는 더욱 더 그렇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이 시대를 주님이 평가하신다면 오늘 본문 말씀에서 이야기하신 것보다 더 강하고 염려된 표현을 사용하셨을 것이 분명합니다.
구약시대부터 선지자들을 하나님께서 보내셔서 말씀하셨지만 여전히 이스라엘백성들은 하나님의 말씀 앞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세례요한이 와서 회개의 세례를 주는데도 회개하지 않는 사람들은 여전히 회개를 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곧 이어 주님께서 직접오셔서 말씀하셨지만 여전히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이처럼 모든 것을 자신의 일로 받아들이지 않고 거부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앞에 놓고 "장터에 앉아서 피리를 불어도 춤주지 않고 애곡을 하여도 가슴을 치지 않는 아이들의 비유"를 말씀하신 것입니다.
오늘 주시는 이 장터의 아이들의 비유를 통해서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는 교훈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마음이 통하지 않는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심전심으로 마음이 통하여 슬플 때는 함께 슬퍼하고 기쁜 때는 함께 기뻐할 수 있어야 하는데 전혀 그렇지를 않다는 것입니다. 슬픈 것은 너의 문제지 나의 문제가 아니며 기쁜 것도 너의 문제지 나의 문제가 아니다라는 식입니다. 무관심의 극치를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너나 할 것 없이 왜 이렇게 마음이 통하지 않는 것입니까?
개인주의 때문입니다. 너와 내가 무슨 상관이냐는 것입니다.
관계를 생각해야 하는데 관계가 없는 것이 편하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지나친 개인주의의 폐해를 지적하고 계신 것입니다. 지나친 개인주의는 상대방을 생각하거나 배려하려는 생각이 전혀 없습니다. 모든 것이 자기 중심적이기 때문에 자기 편하면 되고 자기 이익에 합치되면 되고 자기에게 이로우면 되는 것입니다.
남의 아픔이나 상처나 남의 불편 같은 것은 안중에도 없고 마음에도 없는 것입니다. 그러다보니 남을 함부로 대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결국 부메랑처럼 언젠가는 자신에게 그 피해가 돌아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당장에는 자신에게 아무렇지 않다고 해서 함부로 하게 되는 것입니다.
외국의 아이들은 자랄 때부터 타인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범위에서 자기의 자유를 누리는 법을 철저하게 배웁니다. 그런데 우리 나라 아이들은 다른 사람에게 피해가 되든 말든 자신이 좋은 대로 사는 법을 배웁니다. 그러니까 문제가 생기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자녀를 교육할 때 철저하게 남에게 피해를 주지는 않고 사는 법을 가르쳐야 하고 그렇게 길러야 합니다. 그러면 결국 자신도 그 패해 당사자가 되지 않는 것입니다. 결국은 서로 사는 것입니다. 나만 살자고하면 결국 다 죽게 되는 것입니다.
특히 현대 사회, 자본주의 사회가 지나치게 개인주의로 흘러 많은 문제점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이러한 개인주의의 그늘을 뛰어 넘어 공동체적인 가치관이 절실히 필요해져가고 있습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공동체적인 가치관을 귀중히 여기는 곳입니다. 교회에서는 지나친 개인주의가 용납되어서는 않됩니다. 모두가 다 교회를 정점으로하고 중심으로 해서 함께하는 공동체를 만들어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럴러면 서로 서로 말하는 입장에서, 들어주는 입장으로 바뀌어야 합니다. 서로 서로 이해받으려는 입장에서 이해하려는 입장으로, 섬김을 받으려는 입장에서 섬기는 입장으로, 높아지려는 입장에서 낮아지려는 입장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서로 서로 함께하고 동참하려는 정신이 필요합니다. 그렇게 될 때 교회는 교회다운 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참다운 교회 상의 실현은 말뿐이지 불가능한 것입니다.
가정에서나 교회에서나 지나치게 독립적인 기질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문제거리입니다.
공동체적으로 생각해야하는데 자기 자신만 생각하는 사람들 때문에 가정과 교회가 시련을 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피리를 불면 함께 춤을 추고 애곡을 하면 함께 가슴을 칠 줄 아는 그런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