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기현의 살림운동
항상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있으라(행 13:42~43) 본문
항상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있으라
행 13:42~43
행13:42 그들이 나갈새 사람들이 청하되 다음 안식일에도 이 말씀을 하라 하더라
행13:43 회당의 모임이 끝난 후에 유대인과 유대교에 입교한 경건한 사람들이 많이 바울과 바나바를 따르니 두 사도가 더불어 말하고 항상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있으라 권하니라
우리 복음적인 그리스도인들이 가지고 있는 신앙생활에 있어서 '하나님의 은혜'는 그 어떤 것보다 중요한 가치를 지닌 내용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있기에 우리가 구원을 선물로 받았고, 그 은혜 때문에 감사하며 사는 삶을 살 수 있는 것입니다. 은혜가 있기 때문에 활기차고 능력있고 소망이 넘치는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은혜가 없다면 우리가 어찌 구원을 받을 수가 있으며, 어찌 범사에 감사하며 살 수 있겠으며, 이런 흥미있는 삶을 살아갈 수 있겠습니까?
바울사도가 바나바와 함께 비시디아 안디옥에 가서 설교할 기회를 얻어서 설교한 내용의 중심점은 구약시대부터 약속하시고, 그 약속대로 사람으로 오신 주 예수 그리스도를 힘입으라는 것입니다. 그 이름을 의지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이처럼 바울이 행한 설교는 예수님께서 그리스도이시고 구원자이심을 증거하는 내용이었습니다.
이러한 바울의 설교에 감동과 도전을 받은 비시디아 안디옥에 사는 많은 사람들이 바울과 바나바를 따르게 되었습니다.
여기 '따르다'로 번역된 헬라어 '아콜루데오'는 '의견이나 견해에 동의하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바울이 전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듣고 뜻을 함께하였다는 의미가 됩니다.
그런데 이렇게 비시디안 안디옥에서 바울과 바나바를 따르게 된 유대인들과 경건한 이방인들은 대부분 유대교 출신 개종자들이었거나, 이방들 가운데 하나님을 믿게 된 초신자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이런 특징을 가지고 있던 비시디아 안디옥의 이제 복음을 믿고 따르는 사람들에게 특별히 권해야 필요성을 느낀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이 오늘 우리가 함께 나누고자 하는 말씀입니다.
그것은 은혜가 가진 '특별한 속성' 때문입니다. 은혜는 받을 때는 그 의미가 분명하지만, 받고나서 시간이 지나면 희미해지고 쉬 잊혀진다는 것입니다. 은혜는 거래로 산 것이 아니라 공짜로 거저 받은 것이기 때문에 귀하게 여기지 않습니다. 그래서 바울과 바나바 두 사도가 한 맘으로 더불어서 그들에게 간절하게 권한 것입니다.
그 권하는 내용이 오늘 본문 43절 하반절 말씀입니다.
"...... 두 사도가 더불어 말하고 항상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있으라 권하니라"했습니다.
너희가 지금 말씀을 듣고 은혜를 받아 '우리를 따르는 이 일'이 일시적이지 않고, 한시적이지 않토록 하라는 것입니다. 기분에 따라 좌우되거나 환경에 흔들리지 말고, 항상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머물러 있는 이들이 되라고 한 것입니다.
이처럼 비시디아 안디옥에서 복음을 따르는 자들에게 "항상 은혜 가운데 있으라" 권한 것은 반은혜적인 일들이 있을 것을 예측했고, 의당히 그런 일이 발생하리라 생각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복음이 선포되면 거기에는 은혜가 임하는 것은 당연하여 그 말씀을 따르려는 사람들이 생기기 마련입니다. 그런데 다 그렇지만은 않았습니다.
나중에 보게 되겠지만 비시디아 안디옥 회당에서 많은 사람들이 바울과 바나바를 따르기도 했지만, 행 13:45절과 50절에서 보는 것처럼 "유대인들이 그 무리를 보고 시기가 가득하여 바울이 말한 것을 반박하고 비방하거늘"(45) 했고, "이에 유대인들이 경건한 귀부인들과 그 시내 유력자들을 선동하여 바울과 바나바를 박해하게 하여 그 지역에서 쫓아내니"(50)라고 했습니다.
이처럼 따르는 사람들과 시기가 가득하여 박해 쫓아내는 이들이 있는 가하면 그 가운데서 흔들리는 사람들도 없지 않았던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생활에서 은혜에서 떠나고 마음이 시들해지면 어떤 현상이 일어납니까?
거룩하게 사는 삶이 부담됩니다. 말씀과 기도로 산다는 것이 재미없이 느껴집니다. 마음이 굳어져서 말씀이 들어오지 않습니다. 영혼의 기능이 파괴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어지고 맙니다. 그러면 은혜 없는 기독교인이 되고 현대판 서기관과 바리새인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은혜없이도 교회출석은 가능합니다.
은혜없이도 설교도 가능하고, 기도도 가능하고, 찬송도 가능합니다. 은혜없어도 봉사와 섬김도, 헌신도 감당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은혜 없으면 이런 모든 것들이 시끄럽고 요란합니다. 분쟁과 다툼이 가득하고 시기와 미움에 가득합니다. 서로 정죄하기 바쁩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리도 은혜를 강조하고 또 강조한 것입니다.
오늘 43절, "항상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있으라"
15:40, "바울은 실라를 택한 후에 형제들에게 주의 은혜에 부탁함을 받고 떠나…"
20:32, "지금 내가 여러분을 주와 및 그 은혜의 말씀에 부탁하노니 그 말씀이 여러분을 능히 든든히 세우사 거룩하게 하심을 입은 모든 자 가운데 기업이 있게 하시리라"했습니다.
바울사도는 하나님의 은혜가 동력이 되지 않고, 자기 열심으로만 할 때 자기 의가 생겨서 다른 사람들을 판단하게 되고 정죄하게 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자신도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의 주님을 만나기 전에는 자기 열심에 취하고 매료되어서 하나님의 일을 했었고 그 폐혜가 얼마나 컸던가를 나중에서야 알게 되었습니다.
은혜를 받고 은혜를 맛본 자에게 그 다음에 필요한 것은 "지속성"입니다. 은혜 받은 사람도 유혹이 있고, 어려움을 당하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오늘 말씀에서 '항상'이라는 말을 놓치지 않아야 합니다. '항상' 하나님의 은혜 속에 사는 것, 항상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살아가는 것, 항상 하나님의 은혜의 원리가 지배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이 바로 바른 신앙생활입니다.
아무리 우리가 1회용 시대를 살아가고 있지만 우리가 받은 은혜가 1회용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성경의 모든 믿음의 사람들은 수없이 넘어지고 위태로웠지만 하나님의 은혜를 떠나지 않았다는 공통된 특징을 지니고 있습니다.
우리는 순간 찬송으로 눈물을 흘릴 수도 있습니다. 잠시 말씀 때문에 열광하기도 합니다. 잠시 흥분하는 가운데 커다란 결심이나 희생을 치를 수도 있습니다. 은혜받고 흥분해서 과도한, 지키지도 못할 서원을 하고 약속을 하기도 합니다.
얼마나 빨리 은혜에서 미끄러져 버리고, 은혜의 자리에서 떠나버리는 일이 자주 일어나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과 성경은 우리에게 그것이 일시적인 것이 아닌 그 상태를 지속하는 일, 그 은혜의 상태에 항상 머물러 있는 것이 매우 중요함을 거듭 말씀하고 있는 것을 수고롭게 여기지 않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계속 머물러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은혜 안에 머물기 위해서 몸부림쳐야 합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하나님의 은혜 안에 머물러 있기만 하면 하나님이 책임져 주십니다.
믿음생활은 은혜를 받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러나 받은 은혜를 간직하고 유지하는 것은 더욱 중요합니다. 받은 은혜를 더욱 키워가며 성장시켜 가는 것은 더 더 중요합니다. 은혜를 내 삶의 전 영역으로 내 시야의 모든 영역으로 확장시키는 일은 더욱 더 더 중요한 일인줄로 믿습니다. 항상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머물러 있기를 축복합니다.